사랑을 찾아라
'하나만 보면 열을 안다.' vs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두 속담은 서로 충돌한다. 한쪽은 누군가 내뿜는 조그마한 신호를 이용해 그 사람 전반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한쪽은 사람이란 결코 쉽사리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한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뭘까? 특히 상대방을 연인이나 배우자 등 사랑의 대상으로서 보고 있다면 이 질문은 참으로 중요하다. 내 애인이 피에 굶주린 사이코패스인지,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인지는 사실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여기엔 너와 내가 가진 정보의 비대칭과 더불어, 그 자신조차도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트릭이 존재한다. 여기엔 '성찰이 부족해서'라며 넘겨 짚기엔 더 속 깊은 사연이 있다. 실은 얼마 전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왜 감정이란 그 자신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걸까? 감정이라는 게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독창성 내지는 특이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가 된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른 표현을 하고 반응을 보인다.
보통은 나의 '자아'와 나의 '감정'을 분리하는 식으로 설명한다. 감정이란 내 의식 저편에 있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은 일종의 뭐랄까, 장기 같은 녀석이다. 몸속에 팔딱팔딱 뛰고 있는 장기. 장기는 내 마음대로 어쩌지 못한다. '심장아 나대지 마!' 이렇게 말해도 심장은 여전히 나댄다. 위장도, 간도 열심히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 이건 내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장기는 엄연히 내 몸의 일부다. 즉, 나의 일부다. 또 특정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다스리는 게 가능하다. 완전한 통제권을 쥐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편하게 쉬면 심장박동은 차분하게 느려진다. 매운 음식을 갑자기 삼키면 위는 충격을 받는다. 즉 외부 환경이나 내 행위 등을 변화시켜 간접적으로 손댈 수 있다.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갑자기 화가 나야지라고 해봐도 그쪽으로 감정이 변하지는 않는다. 물론 화가 나는 시늉을 하거나 연기를 할 수는 있다. 또 정말 노력하면 실제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에서 노닌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스위치를 켰다가 끌 수는 없다. 다만 감정의 진폭을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다스리거나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는 있다.
이런 설명은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훌륭하게 답할 수 있으나 여전히 '감정은 왜 내 의지와 관계없이 생기는가'라는 물음에는 답변을 주지 못한다. 만약 감정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또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나조차도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이 나를 알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에는 정녕 닿을 수 없는 걸까?
이는 사랑의 관점에서는 꽤나 중요한 난제다. 사랑이란 분리된 두 사람 사이를 일시적으로나마 이어 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나와 타인은 엄연히 다른 자아, 다른 생각,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뇌를 연결하는 뉴럴 링크 장치라도 개발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그 벽을 부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적어도 모두가 그렇게 믿는다. 만약 너와 내가 이 순간에 진정으로 합일되지 않는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실 이런 반응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감정이라는 녀석을 굳이 '나' 자체와 연결시킬 이유는 없다. 즉 '나'와 '나의 감정'은 다르다. 또 누군가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이르지 않아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애초에 나 자신이 나를 완벽히 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면 그걸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사랑 아닐까? 사랑이란 본디 안정성만큼이나 위험성을 같이 가지고 있다. 결혼은 인생 최대의 갬블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이 경우엔 비단 사랑만이 문제가 아니겠지만)
다만 감정이라는 게 나를 규정하는데, 그리고 사랑의 관계를 이어나갈 때 주요한 지표로 자리매김한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만약 내 연인이 일시적으로 화가 나서 내 앞에서 그릇을 집어던진다. 만약 내 연인이 더 화가 나서 나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한다. 만약 내 연인이 한때의 충동으로 바람을 피운다. 이 모든 게 감정 때문이라면, 그리고 그 감정이 '나'와 분리되어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연인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을까? 애초에 사랑 또한 하나의 감정이 아니던가?
사랑은 매끄러운 볼링공이 아니라 온갖 굴곡과 요철로 뒤덮인 너덜너덜한 럭비공과 같다. 언제 어디로 튈지를 알 수가 없다. 애초에 불확실한 감정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감정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상대방은 오죽할까? 그래서 그토록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여러 절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결혼이 그러하고, 기념일마다 서로에게 챙겨줘야 하는 선물이 그러하고, 손편지가 그러하고, 아무튼 엄청나게 많다. 그건 사랑에 대한 증거이고, 내 감정을 너에게 단단히 묶어두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다. 쉽게 생각하면 쉬운데 어렵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다. 어차피 내 '본심'은 드러날 수 없고, 어쩌면 그 본인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맨 처음 제기했던 의문, 즉 '무언가 작은 걸 보고 그 사람 전반을 파악할 수 있을까?'로 이어진다. 감정과 나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보면 그러기 어려워 보인다. 다만 현실은 반대로 흘러간다. 즉 사람은 보통 작은 단서를 통해 누군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남자/여자는 믿고 거르세요'식의 조언이 유효하게 먹힌다. 어떤 사람이든 실은 단점이 있다. 실수도 한다. 감정이 왔다 갔다 하다가 헛소리도 한다. 그럼 걸러야 한다. 이렇게 결론이 나버린다.
물론 아무리 좋은 장점이 많더라도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면 가까이하기 어렵다. 다만 이는 지나치게 누군가를 일반화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사람은 대개 적당히 나쁘고, 또 적당히 좋다. 그 현실적인 굴곡을 인정하고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미리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실은 만나봐야 알 수 있다. 아니, 실은 만나봐도 모를 수 있다. 설령 모든 걸 드러낸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다고 믿는 것뿐이지 다 드러낸 게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나 자신조차도 나를 모르니까.
그럼에도 현실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건 그만큼 누군가를 알아갈 시간도, 에너지도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든 패를 보고 게임에 임할 수는 없다. 제한된 정보와 단서로 그 사람에 대한 관념을 형성해야 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어쩌면 그 모든 '논리적' 단계를 뛰어넘어 둘 사이를 맺어지게 만드는 일종의 하이패스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슴으로는 절절하게 느끼는 그 감정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사랑을 보고 왈가왈부하는 건 무의미하다. 사랑이라는 게 본디 그렇고, 또 감정이란 게 본디 그렇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감정이란 어째서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걸까? 어떻게 논리적인 설명을 뛰어넘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걸까? 여기에 대한 나름의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냥 재미로만 봐줬으면 좋겠다. 알고 있는 걸 적당히 끼워 맞춘 유사과학 이론이니까.
인간이 통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시 세계 안에는 미시세계가 존재한다. 원자, 쿼크, 중성자, 전자의 세계다. 여기에선 거시 세계와는 다른 규칙이 흐른다. 물리법칙으로 얘기하면 양자역학이다. 거시 세계는 뉴턴의 고전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미시세계는 다르다. 양자역학 시스템 하에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는 특정한 궤도를 따라 도는 게 아니라 일종의 순간이동을 한다. 이를 양자 도약, 퀀텀 점프라고 부른다. 또 전자는 확실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확률로서 존재한다. 그러다 관찰이라는 행위를 하면 존재가 확정된다.
방이 3개 있고 문은 닫혀있다고 치자. 창문도 없어서 안을 볼 방법은 없다. 그 방 중 하나에 전자가 숨어있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오로지 문을 여는 (관찰하는) 것뿐이다. 그럼 어디에 전자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은 전자는 그 방에 없다. 더 정확히는 확률로서 존재한다. 그러다 문을 열고 방 안을 보는 순간 생겨난다. (이를 파동 함수의 붕괴라고 표현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거시 세계에서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럼 전자가 의식이 있어서 누군가 관찰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만들어진다는 말인가? 그리고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지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건 뭘까? 실제로 이 이론이 나왔을 때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양자역학을 부정했다.
이걸 감정과 연결해보자. 감정이란 확률로서 존재한다. 모두가 동일한 확률은 아니다. 특정 환경에서는 특정한 감정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파동 함수가 붕괴되며 어떠한 감정이 실제로 발생한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이르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확률로 규정되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만 짐작하고 대처할 뿐이다. 감정이라는 게 양자 레벨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면, 나아가 정신 메커니즘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떨까? 지식의 한계로 상상은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지만 꽤나 재밌는 연결점이다.
꼭 양자역학과의 연관성을 밝히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1. 감정이란 그 자신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2. 그래서 감정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3. 이를 받아들이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절하는 건 가능하다. 즉 감정이라는 혼돈(Chaos)을 질서(Cosmos)의 세계로 끌어올 수 있다.
4. 다만 그 혼돈이라는 특성이 나를 나답게 만들고, 또 특별하게 만든다. 질서란 본디 모든 걸 안정시키고 균일화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5. 사랑을 사랑으로 만드는 것도, 또 어렵게 만드는 것도 감정이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또한 숭고하다. 혼돈의 세계에서 서로에 대해 완벽히 알지 못함에도 상대방을 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확률을 뛰어넘은 믿음, 그리고 어쩌면 신앙의 영역이다. 여기엔 성스러운 기운마저 감돈다. 다만 이 모든 행위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영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일종의 구도자가 되어 순례를 떠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분명 쉽지 않다. 때로는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이 길을 선택했다는 건 비단 사랑의 달콤함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그런 무의식적인 깨달음에서 오는 행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