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가 흘렀고 조금은 채워졌다

긍정할 수 있다는 희망

by 신거니

글을 쓰려고 브런치를 켰는데 어쩐지 어색하다. 긴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집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유튜브고 인스타고 전부 '정지' 버튼을 누른 지 3주가 흘렀다. 그동안 여행도 다녀왔고, 친구들도 만나고, 게임도 하나 끝냈고, 드라마 정주행도 마쳤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낮잠도 자고, 술도 홀짝이며 지지리 궁상을 떨었다. 그렇게 한껏 충전, 어쩌면 조금은 과충전 된 채로 다시 손에 일을 잡았다.


다시금 나를 발견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사실 자기 발견이란 골방에 앉아 신경회로만 계속 돌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나가서, 아니 방구석에서 뭐라도 잡고 해야만 가능하다. 실은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그놈의 '충만함'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에 있는 공허감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사람은 매일매일 착실하게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죽는다는 사실 자체는 확정이다. 이는 지독한 공허함의 단초가 되면서 동시에 충만함의 동기가 된다. 그리고 이 둘은 내 안에서 항상 치고받고 싸운다.


다만 3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나의 충만함을 정의할 수 있었고, 또 죽음에서 도리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단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휴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사람마다 충만함을 느끼는 포인트는 다르다. 그래서 충만함이란 실은 연역적으로 개념화하는 대상이 아니라 귀납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존재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충분히 관찰하고, 감정을 살피고, 자극 점을 찾아야 한다.


최근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다시 폈다. 한편으로는 불안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심했으니까. 불안감의 가장 대표적인 치료제로 제시되는 게 바로 죽음이다. 더 정확히는 죽음에 대한 자각, 그리고 지혜다. 만약 모든 게 죽음으로서 끝을 맺는다면 내 삶은 그 자체로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어차피 모든 건 끝난다.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며 버둥거리던, 집착하던, 괴롭게 하던 일체의 관념이.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즉 죽음이나 삶을 부정하면 공허함과 두려움이 찾아온다. 손에 틀어쥐고 있던 알량한 무언가마저 누군가가 빼앗아간다는 공포감에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다만 죽음이라는 녀석의 물꼬를 '긍정' 방향으로 틀면 오히려 더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어차피 끝날 거 제대로 살면 좋지 않나? 뭐 이런 종류의 희망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 쾌락만을 좇거나 혹은 의욕을 잃어버린다. 모든 건 마음에 달려있다. 정말로 그렇다. 그렇다고 어설픈 자기 계발서가 꼬드기는 것처럼 뭐든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에게는 천성이라는 게 있다. 이를 깨는 건 힘들고, 또 괴롭다. 다만 한 스푼의 용기가 필요할 때 이러한 깨달음이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라는 인간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최근에 연습하고 있는 두 가지가 있다. 1) 사람에 덜 예민해지기 2) 일상에 더 민감해지기.


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 아주 예민한 사람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또 <개인주의자 선언>을 쓴 문유석 작가가 고백하듯 인간 혐오론자에 가깝다. 지하철에서 옆에 누가 붙는 것도 싫어서 대개 서서 간다. 저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면 괜히 신경 쓰인다. 누군가 내 삶의 영역이나 사회적 거리를 침범해서 훅 하고 들어오면 차갑게 굳어버린다. 그래서 굳은 표정 뒤에서 그 사람을 열심히 분석한다. 그렇게 무언가로 정의 내려야만 내 마음이 편하다는 듯이.


이는 실은 아주 근본적인 피로감을 불러오는 태도다. 또 누구와도 전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벽을 완전히 허물고 모두를 받아들이기엔 이 소심한 가슴이 문제다. 아까도 말했던 천성의 문제다. 적어도 난 그렇게 넓은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주변 사람에 대해 덜 예민하게 굴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너도 결국은 완벽하지 않다. 게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그래. 날을 세워서 무엇하겠는가. 나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내려놓고 살자.


또 일상에서 마주하는 존재들을 더 민감하게 자각하고 받아들이자고 다짐했다. 공허감을 이기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 어느 정도 뇌를 속이는 한이 있더라도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감탄이다. 물론 가끔은 빈정거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긴 하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감탄하려면 관심을 기울여 구석구석 살펴야 한다. 그럼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살짝 설렌다. 조금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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