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공허감을 느끼지 않아요

저는 기본값입니다만

by 신거니

공허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그 말이 참으로 신기했다. 수시로 텅 빈 감정을 마주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평생 경험하지 못할 상태가 아닐까. 내게 삶의 의미란 파도치는 바닷가에 열심히 쌓아 올린 모래성과 같다. 단단하게 다져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수시로 밑동이 깎이고 만다. 그렇다고 삶이 이어지지 않는 건 아니다. BTS의 유명한 노래 제목처럼 'Life goes on'이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쩌면 깊게 구멍이 파인 내면마저도 '문제'는 아니다. 구덩이의 테두리를 따라 아슬하게 걷는 삶을 살아온 지가 이미 오래니까.


어제 한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삶의 공허감을 내면화하고, 사고하고, 또한 채우려는 노력을 하는 이가 얼마나 소수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공허감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손쉽게 '외로움, 허기, 심심함'으로 치환되고, 또 '모임, 맛있는 음식, 바쁜 일상'으로 채워진다는 걸 고백하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나도 그럴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허기, 갈증, 혹은 뭐라고 부르든 그 부족한 감각이 여전히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어쩌겠는가.


자아실현이니, 자기 초월이니, 진지한 얘기와 자유이니 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누구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끔씩 하면 좋은, 신기한 대화 정도의 말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살아있다'는 기본적인 상태라도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임을 실은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것쯤 알고 있다. 이건 마치 매주 수요일마다 오마카세를 먹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니까.


개인 대 개인으로서 깊고 진중한 관계를 맺는 이들을 돌이켜보면 하나같이 삶의 공허감에 치이고 있다. 서로가 가진 빈 공간을 알아보고, 서로가 서로를 채움으로서 자신이 채워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부단히도 '진지한' 얘기를 나누곤 한다. 사실 '진지하다'는 말에는 어딘가 낯간지러운, 심지어 배부른 뉘앙스가 숨어있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는 핀잔을 듣고는 한다. 그 핀잔이란 대개 영혼 없는 대답과 눈빛으로 은은하게 전달된다. '아~ 그러시구나.'


사람은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기에 여장을 꾸려 찾아 나서곤 한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영혼이 공명하는, 그 결맞음의 상태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타인을. 공허감을 경험하고, 이를 채우기 위해 누구보다 애쓰고 있으며, 이 모든 과정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부단히도 흔들리는, 책과 영화와 예술과 철학과 영성에 빠져드는, 그 자신 또한 자신을 붙잡아줄 존재의 이유를 갈구하는, 온몸으로 무의미의 찬바람을 맞아가며 삶을 이어가는 사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예수의 저 유명한 말은 일차적으로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으되,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허기에 시달리는 소수를 향해 던지는 속 깊은 메시지다. 살아있음이란 생존과 동의어가 아니다. 적어도 몇몇에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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