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해석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물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양성자나 쿼크까지 나오게 되지만 우선 원자핵과 전자가 있는 익숙한 그림에서 출발해보자.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실제 원자핵과 전자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다. 원자핵이 농구공 정도의 크기라면 전자는 10km 바깥에서 돌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전자조차 지구가 공전하듯 빙글빙글 돌지 않는다. 실제로는 양자 도약을 통해 일종의 순간이동을 한다. 즉 원자를 이루는 건 대부분 빈 공간이다.
원자가 모여 분자를 만든다. 분자가 모여 물질을 만들고, 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만든다. 즉 이 세상이란 텅 빈 공간이 거의 대부분인 존재로 형성되어있다. 하지만 분명 감각으로는 세상을 단단하게 지각할 수 있다. 눈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건 꽉 차 있는 존재 덩어리다. 그런데 이는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물자체(사물의 본질)가 아닌 현상(감각의 대상)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사람은 세상이 본질적으로 어떠한가를 알 수 없다. 다만 오감을 통해 새롭게 번역할 뿐이다.
만약 세상이 나 자신이 오감으로 느끼는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나 중심', 아무리 확장해도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 머무는 셈이다.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 세상을 지각한다. 방울뱀은 적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지각 방식은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인간과는 다른 해석을 통해 결괏값을 내고 있다. 사실 같은 사람이어도 마찬가지다. 색맹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향에 민감한 사람과 둔감한 사람이 느끼는 세상은 다르다. 그렇다면 누구의 '세상'이 진짜인가?
진짜는 없다. 적어도 그 '진짜'가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존재의 정수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가짜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진짜도, 가짜도 아닌 해석과 상상, 인식만이 있을 뿐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을 통해 인간 문명을 이루는 상상의 체계를 끄집어낸다. 화폐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도덕관념도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은 해석의 결과물이며,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건 해석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내가 가진 공허감이라는 녀석에 대해서도 돌이켜보게 된다. 공허감이란 뭘까? 왜 누군가는 공허감을 거의 느끼지 않고, 누군가는 공허감에 몸서리치는 걸까? 어쩌면 공허감이란 감각의 겉표면을 뚫고 그 안에 있는 거대한 빈 공간을 자각하는, 새로운 형태의 능력이 아닐까?
물리적으로든 의미론적으로든 꽤나 그럴듯하다. 물질의 대부분은 사실 텅 비어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은 실은 상상의 체계에 빚지고 있다. 불교는 '일체는 공(空)하다'라는 표현을 통해 모든 게 마음에서 빚어지는 해석의 체계임을 가르친다. 전도서 1장 2절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어떤 분야를 파고들어도 종국에는 항상 공허와 만나게 된다. 갖은 고생 끝에 문을 열었더니 무한한 우주와 만나는 격이랄까?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할까? 여기서부터 공허감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지게 된다. 누군가는 지독한 허무감에 시달리며 쾌락으로 인생을 채운다. 누군가는 결국 세상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며 무기력함에 빠진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허공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의미. 공허감에서 충만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공허감은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감각이지만,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수시로 잡아먹히고 마는 파도와도 같지만,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여전히 의미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말장난 같겠지만 '의미에는 의미가 있다.'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다. 반면 허무주의는 허무하다. 세상을 허무하게 보든 의미 있게 보든 그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보는 방식, 마음이 세상을 자아내는 형태는 달라진다. 그리고 적어도 한 존재에 있어 이는 세상의 변화와도 맞먹는 중차대한 사건이다. 모든 건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공허감이라는 건 의미의 기둥을 힘겹게나마 세워보라는 자아의 명령이 아닐까?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 하는 일이 의미의 색으로 무채색의 캔버스를 메워가는 걸 보면 말이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