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하고 감각하는 삶
생각해 보면 난 항상 느린 사람이었다.
걸음이 항상 쳐져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일행의 뒤꽁무니를 뽈뽈거리며 따라다녔고, 밥알을 세면서 먹냐는 잔소리도 심심찮게 들어왔다. 운동신경이 없어 구기종목은 어불성설, 나를 재촉하지 않는 책과 글에 침잠하여 긴 시간을 보냈다. 20대를 재수생활로 시작, 한 박자 늦게 사회에 진입했고, 군대에는 무려 6수 끝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유행에 항상 뒤처지는 건 덤이다.
그래서 숨 가쁘게 살아왔다. 적어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빠르게 성과를 내어야만, 더 일찍 경험해야만, 뭔가를 완성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비로소 저만치 앞서간 세상의 뒷덜미라도 붙들고 막차를 탈 수 있다고. 그 덕분일까, (사실 상당 부분 운이라고 생각하지만) 졸업 전에 취업하여 사실상 공백기 없이 경제생활을 시작했고, 책을 낸 작가가 되었고, 다음 도약처를 찾아 두리번거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둘러보면 나보다 잘난 인간쯤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 타이밍에 '하면 좋은 것들'이 항상 눈앞에 아른거린다. 여기서 약간만 더 노력하면, 더 서두르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서도, 심지어 생면부지의 목소리도 말을 걸어온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바쁘게, 빨리빨리. 숨이 찬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달리고 나서 (다음 달에 있을 마라톤 준비를 위해) 노래를 하나 들었다. 이아람의 <느림의 미학>이다.
좀 게으르게 살고 싶어
남보다 걸음이 느리 대도
더 많은 걸 보면서
천천히 즐겁게 걷고 싶어
신경 쓰지 마
먼저 지나가도 돼
어차피 우린 다 언젠가 만날 테니까
난 잔잔하게 흘러갈 거야
이대로 바다까지 나아갈 거야
이아람 <느림의 미학> 중
'어차피 우린 다 언젠가 만날 테니까'
유난히 저 한 문장이 마음에 잔향을 남긴다. 완주만 해낸다면 어차피 결승선에서 만난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동일한 결말을 맞이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도 결국엔 만난다. 우린 모두 만난다.
'느림'의 미학이라고 했지만 결국엔 세상의 속도가 아닌 고유의 속도를 따라 살겠다는 다짐. 어쩐지 여타의 힐링 에세이가 줄기차게 뽑아내는 캐치 프레이즈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럼 어떻게 '느리게' 살 수 있을까? 결국은 두 가지다.
메타인지와 감각
메타인지는 '뭘 아는지를 아는 능력'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며 전체 지도 안에서의 위치를 찾아낸다. 무언가에 휩쓸리는 기분이 들 때, 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게 내게 필요한지, 원하긴 하는 건지 구분할 수 있으니까.
여기에 더해 현실을 충실하게 감각하기로 했다. 감각체계는 익숙한 것에 무뎌지고, 더 큰 자극을 찾아 헤맨다. 새로운 것에 눈에 휘리릭 돌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각은 현재에 머문다. 한번 휘발된 감각은 기억의 형태로 보관될 뿐, 미래에 있진 않다.
느리다는 건 결국 메타인지와 감각을 한껏 발휘하며 사는 삶이다. 때로는 넌지시, 때로는 파묻혀서.
게으르게, 느리게 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