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낙관론자냐 비관론자냐 묻는다면 확실히 난 후자에 가깝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일이 풀릴 것이라는 대책 없는 희망도 가지고 있으니 한 스푼의 낙천성도 함께 가지고 사는 셈이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라며 찡그린 미간 사이에서 고통스레 창작물이 피어난다는 건 창작과 창의가 가진 아이러니다. 인생을 아무런 문제 없이 그저 즐기는 이들에게 창작이란 실밥 하나에 위태롭게 매달린 단추와도 같다. 살다 보면 자연스레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고, 아예 잡아서 뜯어내기도 한다.
물론 '날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날 강하게 만든다'며 고통에 대한 무한 긍정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니체가 말했던 초인에게나 가능한 경지인 데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더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창작자에게 고통이란 독이 든 성배와 같다. 들이킬수록 성스러운 창의성과 함께 독소도 쌓이게 된다. 하지만 고통에서 문제의식과 갈등과 논리와 공감이 배어 나오므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삶에 있어 고통이란 기본값이니 그걸 잘 승화하는 과정에서 창작이란 필연적 과정을 겪는다고 볼 수 있겠다. 아니, 실은 이조차도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쯤은. 많은 이들이 자신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회건만 창작이 보편적인 욕구인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저 고통에만 기대어 무언가를 빚어내고 싶지는 않다. 고통이란 너무 쉽사리 공감을 얻어버리며 이는 소위 말하는 '게으른' 창작물이라는 결과를 내놓으니까. 고통 그 자체로는 (그 고통에 대한 연민과는 별개로) 부족하다. 잔인하지만 창작자라면 그 위에 자신만의 상념을 얹어야 한다.
유독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에세이 형식의 글을 주로 발행하는 입장에서는 타당한 평가이다. 다만 꼭 내 창작물에 '내'가 있어야 할까? 내 고통과 감정과 아픔을 날것 그래도 써 내려간다면 거기엔 자기 위로 이상의 의미가 있는 걸까?
사실 난 '나'보다 '내 생각'이 더 전면에 드러났으면 한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는 개별자다. 그래서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특수성을 얻곤 한다. 그걸 탓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자주 써먹는 방법이니까. 다만 '나'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건, 그리고 만들어야 하는 건 '창작가'로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통과의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