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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Jul 18. 2023

꼭 주체적으로만 살아야 할까?

주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

현대사회는 바야흐로 주체성 과잉의 시대다. 책 <모든 것은 빛난다>에 따르면 현대인을 관통하는 허무주의는 전통적인 서사가 무너지고 주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시작된다. 이는 한병철 작가가 쓴  <피로사회>의 진단과도 궤를 같이 한다.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대책 없는 긍정성이 퍼지면서 도리어 좌절감과 피로감을 뻐근하게 안긴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금과옥조로 삼는 현대의 사상적 흐름과는 이격 된 주장이다. 그리고 '주체적인 선택'을 줄기차게 언급했던 나로서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유의지나 주체성 같은 단어를 맹목적으로 긍정해 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치 신이라든지 자본주의라든지 각종 이데올로기라든지 하는 개념들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리라 믿고 투신했던 것처럼.


주체성이 다른 선택지에 비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그 판단의 근거가 행위의 주체자가 가진 내면에서 오기 때문이다. 마치 산지 직송 활어회처럼 가장 선도 관리가 잘 된(?) 상황이다. 다른 사상에 이염되지 않았으니 정당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이 역시도 개인의 주체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 탓에 쉽사리 반박당하고 만다. 개인이란 하나의 빈 그릇과 같다. 그 그릇에 담기는 건 외부에서 들어온 가치관이다. 온전히 스스로 생산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초기 지구가 수많은 혜성 충돌을 통해 각종 무기물이나 물을 받아들인 것처럼. 인간을 이루는 물질이 우주에서 날아온 것처럼. 개인을 형성하는 건 팔 할이 외부세계다.


내면 혹은 자아는 그 외부세계를 담아두는 하나의 그릇일 뿐이다. 그렇다면 주체성은 어디에서 발현되는 걸까? 외부세계를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는 것에서 다. 그래서 개인은 '무엇을 선택할지를 선택'할 수 없다. 다만 주어진 세계 내에서 수동적 선택을 반복할 뿐이다.


물론 누군가는 철저하게 내면에 근거한 행위 준칙을 갖는다. 책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나오는 정신병 환자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오로지 정신병 환자뿐이다.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이 차단되어 있는 데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환청을 듣거나 나체로 병원 안을 질주하는 건 분명 내면에서 우러나온 행위이지만 어쩐지 주체성의 사례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 교수는 인간의 선택이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이라고 말하며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자유의지가 정말로 있는 것인가에 대한 기나긴 논쟁은 차치하자. 그보다는 일상에서 어떤 준칙에 따라 살아갈지를 묻는 게 더 생산적이다.


만약 철저히 개인의 내면만을 따르는 식으로 인생을 헤쳐나간다면 얼마 못 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사실 자신 안에서 나온 목소리는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마땅하다. 내 마음대로 해야 후회가 없다고들 하지만 그건 사실과 거리가 멀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결과에 따라 현재를 판단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


그래서 물어야 한다. 모든 걸 주변에 의탁하라는 말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이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그걸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말이다. 꼭 주변에 있는 지인일 필요도 없다. 책, 강의, 영화 등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한 탐험기를 읊는 존재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예술과 인문학의 '쓸모'는 여기에서 나온다.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 <애드 아스트라>의 주인공처럼 해왕성까지 갈 필요는 없다. 이미 누군가의 상상력, 혹은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한두 권의 책, 한 두 편의 영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작품은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조금씩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모여 지혜가 만들어진다.


묻지 않고 자신의 신념만을 밀어붙이는 사람은 우물 안에 깊이 침잠하게 된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아집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친다. 그러고는 '나는 나로 살았다'며 자기 위로를 하기 바쁘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내가 핸들을 꽉 쥐고 운전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겠지만 그 자동차가 사방팔방 충돌사고를 일으키고 다닌다면 무슨 소용일까?


주체성은 인생을 이끌어가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모든 걸 결정하지 못했다고 해서 못 산 인생도 아니고, 반대로 '내'가 모든 걸 통제했다고 해서 잘 산 인생도 아니다. 모두가 '나'를 외치는 (물론 나조차도 그런 목소리에 힘을 실었지만) 시대, 이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뭣이 중헌 지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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