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거니 Apr 22. 2024

[13] 그래도 결혼식을 하기 잘했다

2024.04.22 성장로그

"신랑, 입장!"


지나치고 보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저 한 마디를 들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건 단순히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커다란 과업을 끝냈다는 선언을 넘어, 누군가를 내 삶의 0촌으로 맞아들인다는 그 커다란 결심에 대한 자각이다.


앞으로 걸어 나가며 생각했다. '와, 나 정말 신랑처럼 걷고 있잖아?' 물론 제삼자가 보기에는 어땠을지 알 수 없다. 어쩐지 자신이 없는 걸음이었을지, 아니면 씩씩한 '새신랑'같은 포부가 느껴지는 걸음이었을지는 말이다. 난생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하나하나 아로새기듯 발을 디디고, 또 디뎠다. 그래, 이건 새로운 출발이지.


그렇다면 이 출발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떠올려보았다. 식장을 예약했고, 양복을 맞췄고, 아니 그전에 부모님한테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알렸고, 아니 그전에 여자친구와 함께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랑 결혼할래?"라고 물었고, 난 잠시 그 목소리를 궁글이다가 "그래."라고 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아니, 사실 그전에 소개팅이 있었고, 그 소개팅은 독서모임 동료에게 받았고, 그 독서모임은 또 다른 독서모임 친구에게서 왔고, 그 친구를 만난 것도 우연의 일치였고, 그렇게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 난 버진 로드 위를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책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에는 사랑에 빠질 확률을 묘사하는 기막힌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여성과 담소를 나누다 결국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렇게 될 확률이 얼마나 낮냐는 거다. 우선 같은 시간의 비행기를 타야 하고, 그중에서도 바로 옆에 있는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아야 하고, 그 와중에 서로에게 끌려야 하고, 이런 식이다.


이건 서로의 관계를 특별하게 여기는 하나의 방법이다. 얼마나 우리의 사랑이 말도 안 되는 우연에 기대고 있는지를 가만히 톺아보는 것. 다른 방법으로는 책 『어린 왕자』에 나오는 '너는 세상에 있는 수천만 송이의 장미 가운데에서 나에게 가장 특별한 장미야. 왜냐하면 내가 매일같이 물을 주고 말을 걸고 잎에 쌓인 먼지를 털어주었으니까'가 있다.


개인의 인생에서 결혼은 참 특별한 사건이다. 무언가의 출발을, 또 다른 무언가의 끝을 암시하며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동시에 전혀 다르게 살아오던 두 사람의 결합이기도 하다. 이제 남은 시간을 서로에게 쏟겠다는 선언을 하는,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낭만이다. 그래서 비록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그래도 결혼식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두 번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어째서 그 사람이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다음 문장으로 대신 답하고자 한다.


"나의 지성과 맞으며 나의 행복을 지지하고 내 마음의 친구인 그대를 인생의 반려자로 맞이합니다. 이제부터 동등한 동반자로 춤춰 나갑시다." -  <빨간 머리 앤> 中

매거진의 이전글 [12] 10살짜리 차를 데려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