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거니 Jul 08. 2024

삼식이로 살아가는 남편의 자세

어느 여름날의 풍경

찌는 듯한 여름, 조용히 일어나 냉동만두를 찜통에 넣는다. 삼식이 루틴의 포문을 여는 일용할 양식을 영접하기 위함이다. 인덕션 불을 켜고 이번에는 커피콩을 간다. 전동 커피 그라인더가 있었으면 하지만 원하는 제품이 품절이란다. 콩이 갈려나갈 때마다 향긋함이 타닥타닥 튀겨온다. 커피를 한 잔도 못 먹는 입장에서는 그저 향 좋은 디퓨저에 불과하지만, 이 한 잔의 검은 음료가 아내의 심기와 가정의 평안을 지켜줄 것이다.


필터에 가루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진한지 연한지는 감에 맡길 수밖에 없다. 괜히 바리스타가 된 기분이지만, 세상에 커피를 안 마시는 바리스타도 있던가. 사자머리를 한 아내가 걸어 나온다. 얼른 커피를 대령한다. 혈중 카페인 농도가 떨어지면 머리 모양만이 아니라 성정도 사자처럼 와일드해지니까. 아내가 순한 사슴으로 변해가는 동안 뚜껑을 열고 만두를 꺼낸다.


점심에 구워 먹을 목살을 미리 녹여놓는다.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기 위해 고기 식단을 고집한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은 내가 육식주의자라 그렇다. 저탄고지 식단이라고 하려면 냉동실에 넣어둔 만두부터 치웠어야 하는데 말이다. 팬트리에 들어있는 과자("저칼로리야!")라든지, 아이스크림("저당 제품이야!")이라든지, 라면("튀기지 않은 건면이야!")이라든지.... 따지고 보면 끝도 없으니 여기까지. 맞는 말만 하면 진짜 맞는 수가 있다.


약속의 시간 11시가 다가오면 살짝 긴장을 하게 된다. 아내가 처음으로 '배고프다'라는 말을 할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그때 먹을 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스트레스 지수가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가 내 정수리에 정통으로 꽂힐 수 있다. ("또 또 오버한다."라고 말하는 아내의 코멘트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아내가 좋아하는 건 찰옥수수나 닭강정이나 과자 같은, 내 입장에서는 '끼니'가 아닌 '간식'의 영역에 들어가는 녀석들이다. 그러니 슬슬 요리를 시작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


버섯을 잔뜩 썰어서 고기 옆에 흩어놓는다. 옆에서 빼꼼 바라보던 아내는 "버섯 너무 많은 거 아냐?"하고 묻는다. 난 알고 있다. 팬에서 달궈진 버섯은 초심을 잃고 한없이 쪼그라들 것이고, 자신의 흔적만을 조용히 남긴 채 접시 위에 오르리라는 것을. 그리고 아내는 그 장면을 보고 "버섯 너무 적은 거 아냐?"하고 되물을 거라는 걸.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다 말해야 하는 건 아니기에, 그저 괜찮을 거라는 모호한 위로만을 남길 수밖에.


고기 기름 머금은 야채가 좋아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아내는 흡족하게 식사를 마치고 저녁에는 내가 좋아하는 새우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해주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온다. 그리고 위장에 있는 음식을 싹 눌러줘야 한다며 후식을 찾는다. 사람 위장이 정말 그런 구조로 되어있나 고민하는 동안 이미 수박을 꺼내 신나게 썰고 있다. 나도 옆에 찰싹 달라붙어 몇 조각 주워 먹는다. 여름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혹시 걱정되는 건 없어?


아내의 답은 의외로 '네가 삼시세끼 챙겨 먹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난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때가 되면 자야 하는 인간이다. 그 루틴이 깨지면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며 내면의 비명을 지른다. 특히 아침식사를 하지 못하면 위장에 잔뜩 먹구름이 낀 채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메뉴는 무엇이든 좋다. 모 연예인처럼 아침마다 갓 지은 5첩 반상을 차려줘야 하는 건 아니다. 뭐가 없으면 뭐라도 주섬주섬 알아서 해 먹는다.


아내는 아침을 거의 먹지 않고, 대신 모닝커피로 카페인을 충전한다. 남편이 아침밥을 야무지게 챙겨 먹고 누워있을 11시경에 이른 점심을 찾고, 중간중간 탄수화물의 축복을 받은 간식을 즐긴다. 이래저래 나와는 정반대의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혼이란 서로의 시간이 교차되는 사건이다. 특히 의식주 중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는 식사 루틴이 꼬일 때 여러 문제가 터져 나온다. 그래서 현명하게 결혼생활을 헤쳐나간다는 일견 거창한 저 말은 식습관의 박자를 맞춰간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은 분명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그때그때 땡기는 음식도, 세세한 조합도, 조리법도 다르지 않겠는가. 누구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이고 GG를 치지 않는 이상 이 난제를 해결할 일은 없어 보인다. 만약 결혼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면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매 순간 그럴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에겐 누군가에게 맞춰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잠시나마 숨도 참을 수 있는 게 인간인데 왜 그게 안 되겠는가. 중요한 건 균형이다. 딱딱하게 굳지 않게 상대방 쪽으로 기울었다가, 무너지지 않게 내 쪽으로도 기울일 수 있는 유연성. 결혼에 필요한 지혜란 이토록 동적이다. 세상에는 절대 안 되는 것도,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없다. 그저 그렇다고 믿을 뿐이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고, 결과에는 책임이 따르기에, 삼식이로 살고자 한다면 적어도 반 이상의 끼니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난 오늘도 열심히 냉장고를 뒤진다.


이전 08화 연상연하 유아독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