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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Oct 13. 2024

직장이 수단이 되려면 일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언제 떠나야 하는지를 알고 떠나는 직장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A 주임은 평소 회사를 나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직장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는 평소에 자기 계발서나 관련 유튜브 영상의 열혈 시청자다. 주말이 되거나 퇴근을 하고 나면 침대에 누워 재생목록을 뒤적이는 게 취미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경제적 자유'나 '파이프라인' 같은 단어다. 사실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없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할 따름이다.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심금을 울리는 동기부여 영상을 보다 보면 두근거린다. 아직 방향이 잡히지 않았을 뿐이라고 스스로 되뇐다.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언제까지 직장인으로 살아야 할까, '내 일'을 발견할 수는 있는 걸까, 하면서. 평소 구독하던 자기 계발 유튜버가 고가의 세미나를 개최한다고 한다.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신청버튼을 누르고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단번에 지불한다. 평소에는 커피값도 아까워 탕비실에서 죽치고 있는데 말이다.

다른 동료에게는 비밀로 한다. 전에 비슷한 말을 꺼냈다가 왜 그런데다 돈을 낭비하냐며 핀잔을 들었으니까.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애매함이다. 아예 이렇게 큰돈을 쓰면 뭐라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다시 출근할 시간이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저 수단'인 직장으로 향한다. 언제쯤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한숨이 짙다.


'직장은 수단'이라는 명제에는 이제 어느 정도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웬만해서 애사심이나 충성심 같은 단어로 자신과 일터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그보다는 자신에게서 비롯한 동기가 더 강하게 자리한다. 설령 그것이 경제적인 이유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직장이 그저 하나의 수단이라는 말에는 쉬이 납득할 수 있다. 다만 '수단'이라는 단어가 항상 '목적'을 수반한다는 사실에는 대개 주목하지 않는다.


수단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다. 목적이 없다면 수단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만약 '직장이 수단'이 되려면, '일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직장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로만 저 표현을 활용한다면, 처음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빙글빙글 맴돌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아주 불만족한 채로.


퇴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정작 회사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건, 역설적으로 일터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세우지 못한 의도가 쉬이 직장 그 자체로 치환되어 버리는 탓이다. 이는 주체적으로 설정한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탈출구 없는 논리의 무한루프를 만든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직장에 다니는 한 그는 충실히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거니까. 사례의 A 주임이 본질을 짚지 못하고 계속 겉도는 건 이 때문이다.


자기 계발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 고가의 세미나를 신청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수단일 이러한 행동들이 마치 목적처럼 자리한다는 것, 그리고 의존적인 중독성을 자아낸다는 데 있다. 이는 일의 목적을 진지하게 묻지 않은 결과물이다. 여기서의 물음은 단편적인 '예, 아니요'를 넘어 마치 철학자와 같은 집요한 탐구를 전제로 한다.


그래야 일의 목적에 맞는 일의 형태, 요소가 알맞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하다못해 이 '지긋지긋한' 직장을 언제 떠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가 막연하게나마 밝혀진다. 그렇지 않고 결과를 먼저 정해두면 '난 3년 안에 여기를 나간다'라는 일견 확실해 보이는 다짐도 지키기 어려운 무언가가 된다. 왜 2년도, 4년도 아닌 3년일까? 일전에 무한도전에서 정준하 씨가 했던 말을 빌어, '2년은 너무 짧은 것 같고, 4년은 너무 긴 것 같아서요'라서?


물론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이유도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첫 직장에서 3년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3개의 팀에서 각각 1년씩 버티자고 다짐했다) 별 의도는 없었다. 그저 그게 알맞아 보였으니까. 다만 내가 왜 회사를 다니는지는 항상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 '왜'라는 질문이 회사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다음, 그다음 발자국이 어디에 찍혀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한숨이 나올 즈음, 내가 여기 왜 있는지 떠올리려고 한다. 일상에 치이다 보면 막연해지고 뭉툭해지는 일의 목적을 글로써 날카롭게 다듬으려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직장이 목적'이라고 부르짖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그렇게 놓아버리게 될까 봐. 직장은 수단이다. 직장은 수단이다. 직장은,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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