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로 출퇴근하는 삶

이게 나를 대하는 올바른 방식일까

by 신거니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회사 앞으로 집을 옮겼다. 일주일 정도 지옥철로 출퇴근을 해보니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가뜩이나 회사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든데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또 회사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금방 빈방을 구할 수 있었다.


가끔 서울에서 약속이 있을 때면 지하철을 타고 간다. 나도, 친구도 직장인인지라 퇴근시간에 맞춰 지옥철을 타게 된다. 회사 업무를 마치고 놀러 가는 길인데도 금방 지쳤다. 나와 몸을 맞대고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심정이겠지. 그렇게 답답함을 꾹꾹 누르고 문이 열리면 그제야 숨을 돌린다. 인파에 휩쓸려 환승통로나 출구를 찾아 돌진한다.


그 흐름을 보고 있자면 질서 정연한 생산기계가 떠오른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사람이 옮겨지고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회사를 굴리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돌고 돈다. 지하철역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는 다리 아픈 이를 위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더 빠르게 움직이라는 사회의 지시이기도 하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에스컬레이터 한쪽 켠에는 더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다. 보기만 해도 숨이 찬다.


사실 나도 그중 하나다. 평소에는 느릿느릿 걷다가도 유독 이 거대한 지하공간에서는 마음이 급해진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의 뛰듯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돌진한다. 앞에서 누군가 조금만 걸리적거리면 짜증이 난다. 뒤에서 다른 사람이 재촉을 해도 화가 난다. 미국의 코미디언 조지 칼린은 이런 말을 했다. '고속도로에서 앞의 차가 느리게 가면 답답하고, 빠르게 가면 미친놈이다' 딱 그 경우다.


비단 지옥철만의 문제는 아니다. 회사 사무실에서도, 심지어 퇴근해서도 내 마음은 한없이 좁아진다. 위에서 닦달을 하니 조급해지고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평정심을 잃는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친절한 사람보다는 까탈스럽고 남을 착취하는 직원이 더 진급을 잘한다고 한다. CEO와 사이코패스가 거의 유사한 심리학적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연신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나를 대하는 온당한 방식일까? 적어도 이런 환경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회사 동료분은 상사가 부르는 메신저 알람만 떠도 심장이 떨리고 밤에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정작 그 상사도 몸이 안 좋아 수시로 병원을 다닌다. 견디지 못하면 회사 밖으로 나간다. 그 빈자리는 금세 다른 사람으로 채워진다. 그렇게 모든 게 돌고 돈다.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거라고,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순 있겠다. 삶은 고통이고 저마다 매일을 버티며 살아낸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 힘듦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조직이나 회사가 나의 고통을 무관심하게 바라본다면 나라도 나를 챙겨야 한다. 이 세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상상력이 없으면 삶이 비참해진다. 내 등 뒤에 커다란 가시가 박혀있어도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한다. 절뚝거리고 비틀거리면서 원래 인생이 이런 거라고 되뇔 뿐이다. 현실에 발을 붙이더라도 생각은 그 너머에 닿아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세상을 기반으로 살아간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 어떤가. 그 안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삶이다. 다만 현실이 괴롭고 힘들다면 담장 너머의 세상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꼭 모든 걸 직접 경험할 필요는 없다. 책이나 강연, 유튜브 영상에서도 얼마든지 양질의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이는 비단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함이 아니다. 내 세상이 한없이 좁으면 다른 이를 품을 수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결국 믿음과 상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난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이러할 거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렇게 믿을 뿐이다. 믿음과 상상력이 한정되어 있으면 독선으로 흐르기 쉽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으니까.


'회사를 안 다니면 뭐하려고? 할거 없잖아.' 이런 말을 들으면 말문이 막힌다. 반박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이는 마치 야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왜 9회말 2아웃 역전 만루홈런이 짜릿한지 설명하는 것과 같다.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하거나, 엄청 좋은 거라는 식의 추상적인 대답을 하거나.


필요하다면 정성을 들여 공감대를 쌓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침묵하거나 그냥 얼버무리고 만다. 관계에 쓸 수 있는 에너지도, 시간도 한정되어 있으니까. 사람에 쉽게 지치는 나를 위한 배려랄까.


나를 돌봐야 할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내가 나의 부모가 되는 것. 그게 나를 대하는 온전한 방식이다. 나 역시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이를 위해선 뭐든지 해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익숙함에 젖어 자신을 챙기지 못했을 때 반드시 표가 난다. 몸이든 마음이든 비명을 지른다. 이마저도 꾹꾹 눌러 담다간 쓰러져버린다.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처럼 계속 사람을 세워두면 기절하듯이.


몸과 마음의 신호를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보다 중요하면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다. 나를 해쳐가면서까지 붙드는 그 현실이 그토록 중요할까. 왜 항상 나 자신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걸까. 아무런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이젠 나를 챙기겠어'라고 하면 갑자기 득달같이 달려든다. 왜 너만 생각하냐고, 우선은 참고 인내하라고,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거기서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면 나는 한참 뒤로 밀린다. 그리고 똑같은 일상이 다시 시작된다.


나를 챙기려면 '싸가지'가 없어야 한다. 생떼를 부리고 이를 갈고 고개를 쳐들어야 한다. 세상은 고분고분한 사람도 존중해줄 만큼 너그럽지 않다. 안타깝게도 그렇다. 나 역시 싫은 소리는 잘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그 장소를 떠난다. 아무도 없는 자연이 묘하게 반가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낯선 여행지에서 도리어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날을 세울 수 없다면, 날을 세울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자. 그곳에서는 제발 나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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