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은 분리될 수 있을까
이상하다. 난 분명히 워라밸이 유일한 복지인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들까. 집도 회사 바로 앞에 있어서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그만인 것을. 회사 정문에서 집까지 오는 시간보다 내 자리에서 정문으로 나오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정도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침대로 무너져버린다. 전자파 샤워를 하루 종일 하고 내내 마음을 졸여서일까. 적어도 한 시간은 누워있어야 한다. 그렇게 저녁잠을 자고 나면 불쾌한 감정이 밀려온다. 낮잠이나 밤잠처럼 상쾌하지가 않다. 뭔가 찌든 피로감이 밀려온다. 주섬주섬 저녁을 챙겨 먹고 내 삶을 챙긴다. 글을 쓰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헬스장에서 열심히 쇳덩이를 들어 올린다.
워라밸하면 보통 퇴근 후, 혹은 주말에 '진짜 삶'을 살아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생산적인 취미활동도 하고 부업도 하고 인생 2막도 착실하게 준비한다. 회사에서 보낸 시간은 마치 내 삶이 아니라는 듯,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듯. 인생은 여기에 있다. 회사가 아니라.
회사에서 지난 3년간 버텨본 결과 그런 식의 삶도 오래가진 못한다. 나처럼 일이 삶에서 중요하다면 더더욱. 회사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스트레스가 조금씩 몸과 마음에 쌓인다. 퇴근 후에 폴 댄스를 하거나 독서모임을 한다면 조금 나아지긴 하지만 그때뿐이다.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는데 바닥만 열심히 청소하는 격이다. 일 자체를 삶으로 끌어오지 못한다면 방법이 없다. 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요즘은 '워라블'(Work-Life Blending)이라는 단어가 화제다.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섞는 게 더 낫다는 거다. 일 역시 삶의 중요한 부분인데 이를 부정하면 건강하게 살기 어렵다. 이제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퇴근하느냐가 아니라, 퇴근 전까지 어떤 일을 하느냐다.
소위 멸사봉공의 마인드로 회사에 맹목적으로 충성했던 지난날과는 다르다. 6시에 칼퇴해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워라밸과도 궤를 달리한다. 책 <프리워커스>는 '일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일하는 방식을 정하고 나답게 끌고 가는 것. 그게 이 책이 말하는 워라블의 정의다.
아무리 워라밸에 진심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도 마음이 헛헛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저히 내 삶과 섞을 수 없는 업무환경과 사내 문화. 애사심은커녕 한 줌의 소속감도 생기지 않는다. 동기들과 회사 뒷담화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한두 번이다. 아무리 베일 듯이 칼퇴를 해도 그 이전까지는 붙들려있어야 하는 곳이다. 그것도 가장 생기가 도는 아침부터 저녁 전까지.
퇴근하면 잠시 휴식을 얻지만 다음날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다가온다. 월요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월요일은 죄가 없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죄인이라면 죄인일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거라며 책임을 미루는 것도, 대안을 찾아 나서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든 책임만 진다면 누가 뭐라 할 수도 없다.
3년 동안 회사에서 일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일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일은 적어도 내겐 단순한 밥벌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가능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연결된다. 8시간 동안 좀비처럼 일하다가 퇴근과 동시에 해방되듯 박차고 나가는 삶. 이건 내가 바라는 일의 모습이 아니다. 몇 시간을 일하든 충만함을 느끼고 싶고, 적어도 무의미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진 않다.
책 <삶으로서의 일>은 의미 있는 일터의 조건으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목적
2. 개인적 성장
3. 소속감
4. 리더십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금의 직장에서 위의 조건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내고 있는 셈이다. 사실 내가 그렇다. 나에게도 회사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나 하나 나가는 것쯤 회사 입장에서는 아무 일도 아니다. 빈자리는 다시 채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수많은 '나'가 퇴사를 결심한다면 문제는 다른 국면을 맞는다.
회사는 점점 목적의식도,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도, 소속감도 없는 이들로 채워진다. 그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기계 같은 직원만 양산된다. 이들 중에서도 분명 관리자와 리더가 나온다. 좋은 리더십의 부재는 또 다른 악순환의 시작이다. 퇴사 릴레이는 이어지고 이는 회사의 퍼포먼스에도 영향을 미친다.
조직 단위에서 일에 의미를 주려는 노력이 없다면 나라도 부여해야 한다. 무의미한 일을 억지로 참고 견디라는 말이 아니다. 찾아 나서야 한다. 만들어야 한다. 나만의 소명의식을. 일과 삶의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