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에 비전이 없다면

소모되지 않고 계속 일하는 방법

by 신거니

책 <인디펜던트 워커>에는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9명의 인터뷰이가 등장한다. 일하는 방식도, 내용도 다르지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1. 일과 삶을 일치시키며 산다.

2. 비전을 가지고 일한다.


각자가 일을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어느 방향으로 갈지 설정하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 흔히 말하는 브랜딩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만 비전은 브랜딩보다도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 특정한 상(像)에 맞는 전략적 노출이 브랜딩이라면, 비전은 조직이 존재하는 의미다.


어떤 조직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매출 증대나 주주 부의 극대화 같은 목표에 두기도 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뭐든 하는 거다. 그런데 그런 목표가 과연 장기적인 시각에서 비전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일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소모된다. 한마디로 갈려나간다. 조직은 양적으로 성장하더라도 내면은 공허하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딱 그렇다. 비전을 일러줄 리더도, 애초에 공유되는 비전도 없다. 오로지 지난 달에 비해 얼마나 매출이 늘었는지, 상사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이행했는지가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목표를 이뤄낸다고 해서 뿌듯하지도 않다. 내년에는 목표 수치만 커질 뿐이니까.


개인에게도 비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을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면 쉽게 지쳐버린다. 번아웃 증후군은 단순히 일이 많아서 오는게 아니라 무의미한 일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일의 강도 자체가 세지 않더라도 쉽게 번아웃이 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취미생활을 가져도 일 자체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버티기 어렵다.






비전이 없으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난 그렇다. 어떤 목표를 이루려면 꾸준해야 하는데 말이다. 조금만 힘들면 엎어지고 탈출을 꿈꾼다. 그런데 그 비전을 어떻게 정의하고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실존주의에서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표현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본질)보다 그저 이유 없이 존재(실존)함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를 가르는 이정표는 '삶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다. 인생 자체에는 이유가 없지만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는 스스로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비전이 등장한다. 개인 단위든 조직 단위든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걸어가면 지치지 않는다. 비전은 단순한 목표와는 달리 설령 이뤄내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의미를 향한 발걸음만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10억을 벌어서 조기 은퇴를 하든, 누워서 월 천만 원을 벌든 비전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돈을 버는 건 나쁜 게 아니다. 다만 목적 없는 돈은 정처 없이 떠돌기 바쁘다. 비싼 명품가방이나 스포츠카를 사도 마찬가지다. 그건 부의 상징물이지 삶의 의미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거기서 오는 충만함은 금방 사라진다.


비전을 찾으려면 충만함이 남긴 흔적을 좇아야 한다. 내가 한껏 채워지는 기분, 그게 충만함이다. 시간이 아깝지 않고 소모되지 않는다. 순간에 몰입하게 되고 자유를 경험한다. 여기서의 자유는 속박이 없는 상태라기보다는 주체성에 대한 감각에 가깝다. 이는 기쁨이나 행복과는 다르다. 기쁘지 않더라도 충만할 수 있다. 행복하진 않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는 있다. <질서 너머>의 저자 조던 피터슨 교수는 행복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 떠나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맞는 고통을 지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충만함의 선을 잇다 보면 비전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비전에는 영영 닿을 수 없다. 비전은 정량화된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전은 하늘에 떠있는 북극성처럼 방향을 잡아준다. 아무리 걷더라도 북극성에는 닿을 수 없지만 그 여정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의미가 서려있으니까.






나의 비전은 뭘까? 만약 지금 일에 비전이 없어서 퇴사를 하는 거라면, 난 무엇에 의미를 두고 일해야 할까? 물론 퇴사를 한 직후에는 푹 쉬며 몸과 마음을 돌보겠지만 언젠가는 업무 전선에 다시 뛰어들어야 한다. 돈도 벌어야 하고 시간도 보내야 하니까.


언제 가장 충만함을 느끼는지 복기해봤다. 고요한 자연에 빠져들 때, 주체성을 발휘해 살아갈 때, 삶에 대한 지적인 대화를 나눌 때,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나로 인해 나아질 때. 키워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간: 고요함, 자연

태도: 자유, 주체성

내용: 인사이트, 지혜

관계: 사랑, 성장


파편화된 충만함을 선으로 이으면 삶의 비전을 나타내는 한 문장이 된다. 조금 억지스럽다면 두세 문장으로 나눠도 좋다.


나만의 비전: 고요한 공간(자연)에서 자유와 주체성을 갖고 사랑하는 이와 인사이트를 나누며 함께 성장하기


비전은 행동을 일으키는 동인이자 자신을 점검하는 체크리스트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자유나 주체성이 없다면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살다 보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지만 다시 중심을 잡을땐 비전을 머릿속에 새기려 한다.


살다 보면 비전도 달라질 수 있다. 충만함을 느끼는 포인트가 변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맞게 항로를 계속 수정해야 한다. 다양한 삶의 경험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이 내게 충만함을 줄지 모르니까. 사람은 누구나 제한적인 환경에서 살아간다. 찬찬히 영역을 넓히면 된다.


비전이 근사한지 근사하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꼭 세상을 바꿀 필요도 없다. 자기에게 맞는 비전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비전을 가지고 일하면 소모되지 않는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막연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비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무의미한 시간은 줄여준다. 난 '비전 있게' 일하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