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면 꼭 떠나야 할까

#퇴사국룰 #세계여행 #산티아고순례길 #제주도한달살기

by 신거니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대부분은 배달의 민족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그걸 의도했다) 난 말하련다. 한국인은 여행의 민족이라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 기억을 더듬어보자. 인천공항은 매년 최고 이용객 수를 갱신한다. 세계 구석구석 한국인이 없는 데가 없다. TV건 유튜브건 여행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우리는 여행을 정말 사랑한다.


한국인의 유별난 여행 사랑은 퇴사라는 키워드와 잘 섞여 들어갔다. 퇴사 후 세계여행, 퇴사 후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퇴사 후 제주도 한달살기를 실천했다. 수많은 경험담과 간증이 이어졌다. 떠나야 한다. 가능한 한 이 한반도와 먼 곳으로. 최소한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제주도로.


퇴사 후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어느 방향으로 향하건 자유다. 그때 철학자 사르트르가 옆에서 속삭인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만 막상 문이 열리면 두려워진다. 적어도 회사에선 이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는데. 어디로 갈지는 확실했는데.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한달살기'를 필두로 한 장기 여행이다. 회사의 'ㅎ'자도 생각나지 않게끔 아예 멀리 떠나버린다. 해외여행을 다니면 꼭 큰 배낭을 메고 다니는 한국인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대륙을 넘나드는 세계 여행자다. 심지어 첫 해외여행을 세계여행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퇴사자 혹은 휴학생이다.


퇴사자의 발길은 산티아고 순례길로도 이어진다. '퇴사하면 산티아로'가 거의 국룰이다. 길 위에서 만난 한국인과 대화를 나눠보면 태반이 퇴사자다. 퇴사를 했다는 불안감을 떨치려고, 뭘 할지 생각을 정리하려고, 예전부터 시간이 나면 오고 싶어서 등 이유는 다양했다. 나도 '퇴사하면 이 길을 다시 걸어야지'라고 생각했다.






퇴사를 결정하고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질문: 그래서 퇴사하고 뭐하지?


'나 퇴사해'라고 조심스레 던진 한마디는 나 자신과 타인의 마음에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파문은 다시 반사되어 돌아온다. '퇴사하고 뭐하려고?'라는 질문으로. 말을 얼버무리는 순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제대로 생각은 해본 거냐, 요즘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데 대책도 없이 나가려고 하냐, 회사는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다 등등등.


손 놓고 당할 수만은 없다. 이때 임시로나마 세울 수 있는 바리케이드가 바로 장기 여행이다. 수많은 간증이 이어지는 데다 퇴사에도 당위성을 부여한다. 여행을 다니며 생각할 시간을 벌어다 준다는 장점도 있다. "나, 제주도로 한달살기 하러 갈 거야."


불신은 부러움으로 바뀐다. 버킷리스트를 한 번이라도 끄적여봤다면 안다. 여행은 그 리스트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다. 물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그 한달살기 이후에 뭐할 거냐고 추궁하면서. 그러면 거기서 생각해보겠다는 모호한 답변으로 마무리. 완벽하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퇴사하고 한달살기를 할 생각이다. 기분 좋게 지도를 뒤졌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애초에 왜 한달살기를 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한달살기를 하려고 퇴사를 하는 건가? 그건 분명 아니다.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게 퇴사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다음으로 던지는 질문: 나는 왜 떠나려는 걸까?


퇴사자에게 '떠남'은 두 가지 뜻을 갖는다.


1. 회사에서 떠남

2. 살던 곳에서 떠남


참 얄궂다. 퇴사를 결정하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질문은 보통 '무엇(What)'이다. 퇴사하고 뭐하지? 퇴사하고 여행이나 갈까? 이직은 어느 회사로 해야 하지? 실은 '왜(Why)'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왜 퇴사를 할까? 나는 왜 굳이 떠나려는 걸까? 아무렴 어떠랴. 나중에라도 이유를 붙일 수 있다면 그 퇴사, 충분히 좋다.


떠남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조금 걸려 넘어지더라도 힘을 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설득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반대로 그저 끌리는 대로만 걷다 보면 쉬이 지치고 만다. 내가 괜히 왜 나와서 이 고생을 하나 싶다. 충동이나 로망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회사에서 겪는 우울감, 스트레스, 가스 라이팅을 동인으로 삼아서도 안된다. 나와도 다음이 없다. 물론 비전도 없고 그저 죽을 듯이 힘들다면 당장 박차고 나와야 하지만.


책 <인생학교 - 일>은 내 일에 던질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을 소개한다. 지금 여기서 일하는 게 맞나 싶을 땐 이 체크리스트를 활용해보자. 직업은 물론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의미가 있는가?

몰입할 수 있는가?

자유로운가?


지금 다니는 직장이 의미도, 몰입하는 시간도, 자유도 없다면? 떠나면 된다. 하나라도 있다면? 고민해보자. 다 있다면? 굳이 떠날 이유가 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다니자. 그런데 아마 꿈속에나 존재하는 회사가 아닐까 싶긴 하다.


원인을 알았다면 이제 해결책을 찾을 차례다. 내가 의미 있어하는 일,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일,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 일이 회사에 없다면? 떠나야 한다. 인생은 포기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세운 기준을 토대로 내 삶을 더 건강하게 이끌어가야 한다. 나의 한달살기 프로젝트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끌려다니지 않고 이끌어가는 삶. 그 삶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