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퇴사했어

아직도 뭐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좋다

by 신거니

3년이라는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퇴사는 금방 끝나버렸다. 만남에는 지난한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이별은 찰나의 순간이면 충분하다.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허무하다. 그동안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사이도 이토록 쉽게 끝나버린다. 그저 한쪽에서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유효기간이 다했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미련을 갖지 않으려 한다.


아침에 부사장 면담을 간단하게 마쳤다. 끝나고 나서 뭐 할 거냐는 질문에 우선은 쉬겠다고 했다. 사실이다. 다음 갈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몸과 마음을 좀 추스르고 싶다. 아직도 옆구리를 가끔 간질이는 대상포진도 없애야 하고 쫓기듯이 살아왔던 내면도 돌아봐야 한다. 그렇게 퇴사 서류에 서로가 사인하는 것으로 공식적인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이게 이렇게 쉬운 거였구나.


이제 그동안 신세를 진 이들에게 인사를 건넬 차례다. 굳이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건 언젠가 어디서든 만날 수 있음을 알고 있어서다. 어쨌든 회사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건 마지막이니 애틋하다. 미리 준비한 로또 복권을 한 장씩 돌리며 작별을 했다(나름 희망의 씨앗을 심고 나왔다. 아니면 퇴사의 씨앗이거나). 사람은 제각기 정말 다르다. 나가서 뭐할 거냐고 걱정하는 분도 있고 ("아니, 내가 개인적으로 걱정돼서 그래. 뭐라도 준비해놓고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참고로 별로 안 친한 분이다) 어디서든 잘할 테니 응원한다는 분도 있다.


그리고 동기들. 동기들이 없었다면 지난 3년의 세월이나마 버틸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힘든 일이나 부당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부리나케 달려와 같이 한 목소리로 욕해주던 친구들. 또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좋아해 주던 친구들. 어느 곳에 가든 제 편을 들어줄 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지옥이라도 견뎌낼 수 있다. 내가 떠나면 이제 누구랑 회사 욕을 하냐며 서운해하는 동기들의 마음만큼 더 충만하게 살아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지간히 욕을 많이 하긴 했다.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정리한다. 평소에도 물건을 거의 안 두는 터라 금방 끝난다. 버릴 건 버리고 가져갈 건 가방에 챙겨 넣는다. 관계도, 물건도, 소속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렇게 보면 온전한 '내 것'이라는 게 얼마나 되나 싶다. 영원할 것 같다가도 손가락 사이로 쉽사리 흘러가버리는데.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현재에 매몰되어 순간의 영원함을 믿는다. 그렇게 쉽게 착각한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짐을 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갈 시간이다.


팀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회사 동료가 배웅해주겠다며 같이 따라온다. 외로울뻔했는데 고맙다. 퇴사를 한다고 해서 거대한 현수막이 붙거나 꽃가루가 화려하게 날리진 않는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의 일상은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삶은 전적으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시간은 흐른다. 내가 있든 없든. 그러니 나만의 인생을 사는데 주력해야 한다. 어차피 세상은 알아주지 않으니까. 나 역시도 다른 이의 인생에는 아무래도 관심이 덜하다. 세상이 그런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는 걸 기억한다면 조금 차분하게 삶을 관조할 수 있다. 마음이 편안하다.


회사 밖으로 나오니 쌀쌀한 공기와 미지근한 햇빛이 나를 맞이한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자 숨을 크게 들이쉰다. 찬 바람과 미세먼지가 내 안으로 스며든다. 세상은 똑같다. 다만 내 마음이 조금은 달라졌다. 다시 돌아왔다. 원래 있었던 곳으로. 지난 3년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난 무엇을 위해 살았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지금은 그냥 만끽하는 걸로 충분하다. 수고했고, 푹 쉬어.


집에다 짐을 던져넣고 다시 나왔다. 호텔에서 나름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다. 고생했던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랄까. 조금 뻔한 감은 있지만 집에서는 온전히 쉴 수 없다. 게다가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자취방이니 더더욱. 호텔방에 혼자 누워 게으른 시간을 즐긴다. 스파클링 와인을 한병 갖다 놓고 궁상을 떤다. 고요한 가운데 여러 감정이 휘몰아친다. 세상의 잡음이 사라지면 내면이 오디오를 채우기 마련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고급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호텔은 고급스럽다. 왜 그럴까 찬찬히 돌이켜보니 답은 은은함에 있다. 은은하다고 다 고급스러운 건 아니지만 고급스러운 건 은은하다. 노골적이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하다못해 조명도 천천히 켜지고 조도도 세지 않다. 어디선가 디퓨저 향이 은근히 나는데 거북스럽지 않다. 큰 통창은 얇은 커튼으로 가려져있다. 밖이 보이면서, 또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의 고급스러움은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아무리 좋은 향수를 뿌리고 멋진 차를 몰아도 언행이 저속하면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보면 난 사실 고급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격이 높은 이가 되고 싶다. '급'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매겨진다. 상품은 Low End와 High End로, 호텔은 몇 성급 호텔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맛집엔 평점이 매겨지고 자격증에도 급수가 있다. '격'은 이보다 더 본질적이면서 주관적이다. 격은 한 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세월을 두고 조금씩 배어 나온다. 말투, 행동, 인사이트, 신념, 취향을 통해서.






다음날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는다. 누가 차려준 아침밥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약간의 샐러드와 토스트, 주스 한잔만으로도 아침은 온전해진다. 회사를 다닐 때는 가능한 한 빨리 음식을 입에 털어 넣고 출근길에 오르기 바빴다. 아침을 거르지 않는 나로서는 은근히 괴로운 시간이었다. 이제는 매일 아침을 주말처럼 보낼 수 있으니 자신을 조금 더 아껴주기로 하자. 평일이라 그런지 중년부부가 많다. 젊은 커플보다도 저들의 여유가 부럽다(그렇다고 커플이 부럽지 않다는 건 아니다).


체크아웃을 하고 예전에 졸업한 대학교에 들렀다. 비대면 수업 때문인지 방학인 건지 (이제는 대학교 일정에 대한 감각이 없다) 캠퍼스는 텅텅 비어있다. 학교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올라가기 힘든 곳을 어떻게 4년이나 다녔는지 싶다. 그만큼 다리는 튼튼해졌겠지.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학교를 내려다본다. 실은 내 대학시절을 내려다본다. 그때도 지금처럼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그럼에도 순간순간을 어떻게든 살아냈다.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많았던 시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려나. 그래도 그때보단 조금 더 여유 있는 눈빛으로 과거를 쓸어내린다.


그때의 난 회사원이 될 줄 알았을까. 그리고 3년 후 퇴사를 해서 다시 캠퍼스를 찾을 줄 알고 있었을까. 미래의 난 지금의 나를 보고 어떤 말을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지금의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현재뿐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도 없는 거라고. 있는 건 오직 지금의 나뿐이고 과거와 미래는 마음속에만 있는 거라고.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내면에만 존재한다. 거기에 관심을 두면 온갖 미련과 집착이 내 안을 채워간다. 그렇게 괴로움이 시작된다.


사실 현재에만 집중한다고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살아낼 수 있는 건 현재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기억해내야 한다는 말이다. 힘을 풀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순간순간을 살아가면 된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삶이 언제는 쉬웠던가.


저녁 약속 전까지 시간이 남아 영화도 한편 보고 서점도 들렀다. 여기에 스타벅스에 앉아 유기농 말차 라떼도 한잔 걸치니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온전히 내 손으로 끌고 가는 시간. 데드라인도, 상사도, 이상한 규칙이나 의전도 없다. 사실 그런 건 원래 없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의무일 따름이다. 그 의무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 건 그만큼 내게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쨌든 나의 책임이다. 괴롭다면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난 답을 찾고 싶었고 회사를 나왔다.


친구들을 만나 전시회장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빈센트 반 고흐의 일대기와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감상하는 전시다. 예술은 과학이나 철학보다 더 직관적으로 내면을 이해시키는 작업이다. 때로는 파편적으로, 때로는 총체적으로 어떤 심상이 다가온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를지라도. 내면은 이리저리 요동친다. 누구보다 그림을 사랑했지만 한편으로는 괴로워했던 반 고흐의 감정이 나에게 와닿는다.


웅장한 음악과 화려한 색감보다 감탄스러운 건 그가 가진 시선이었다. 예술가는 한층 더 깊고 섬세한 시각으로 세상을 훑는다. 예술가의 내면과 작품을 거쳐 세상은 다시 해석되고 표현된다. 붓터치 하나하나에 어떤 마음을 담았을지. 그런 생각을 하니 새삼 왜 반 고흐가 그토록 유명한지 이해가 된다. 예술은 내면의 총량을 담아내는 매개체가 된다. 이제는 모든 걸 끝내고 싶다는 그의 절규가 유독 와닿는다.






하루가 이렇게 끝났다.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어쩌면 나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퇴사를 한다고 선언한 지 반년, 그 시간에 내가 서있다. 여전히 불안한 채로, 여전히 흔들리는 채로,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퇴사를 했다고 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묻는다. 퇴사하니까 좋냐고. 만약 좋다, 안 좋다로 대답해야 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좋다. 퇴사를 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퇴사를 할 수 있는 나여서 좋고, 퇴사 후에 펼쳐질 여러 가능성도 너무 기대된다.


<퇴사하러 갑니다> 매거진은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물론 앞으로도 퇴사와 관련된 글은 계속 쓸 생각이다. 퇴사 후에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초점이 맞춰질 듯하다. 이 매거진에서 가장 첫 번째로 쓴 글의 한 문단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면, 혹은 이미 실행했다면 그 앞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삶에 스며듦. 그건 삶만으로 내 안을 충만하게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외부세계에서 자신의 갈증을 푼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왜 이리 허무한 걸까?' 회사를 다니면서도 수없이 답해야 했던, 대개는 애써 무시하며 덮어야 했던 의문. 내가 퇴사를 하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충만함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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