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보자
퇴사도 하고 이사도 하느라 바쁜 일주일을 보냈다. 이것저것 정리할 것도 산더미다. 그냥 몸만 빠져나올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 예전에도 몇 번이나 사는 지역을 옮겼던 터라 적응하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그래도 매번 아쉬운 부분은 생긴다. 그래도 전에 살던 곳에서는 이게 좋았는데 하면서. 하지만 적어도 후회는 없다. 미련도 없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시간임을 알아서다.
주변에서 물어본다. 퇴사하니까 좋냐고. 만약 좋냐 나쁘냐로 대답해야 한다면 '매우 만족'이라고 대답하련다. 적어도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니 불필요한 스트레스는 없다. 내가 인생에 바라는 건 이토록 대단치 않은 무언가다. 그저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한가로이 하루를 만끽하고 싶다. 지금은 그렇다.
거의 처음으로 아무런 소속 없이 세상 밖으로 나갔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데 아직은 실감이 나질 않는다.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냥 원래 세상이라는 게 나와는 관계없이 그저 흘러갈 뿐이어서일까?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은 중립적이다. 그저 일어난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이 요동치는 건 나 자신이다. 퇴사를 하든 안 하든, 놀든 일하든 지구는 계속 돌아가고 난 그 위에서 숨을 쉰다. 퇴사해도 지구는 돈다.
어떤 대단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사춘기 소년소녀가 조그마한 실수를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것처럼. 사실 타인은 내게 관심이 없다. 대체로 그렇다. 사람은 아무런 소속도, 아무런 업무도 없이 태어난다. 그저 그 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다시금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번에 가입한 실손 보험비를 내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지난 3년간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 회사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그게 아니다. 난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 이런 일밖에 못하는 나에게. 단순히 회사의 네임밸류나 직급 문제가 아니라 자아에 관한 문제다. 난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 일은 내게 맞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나에게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일 자체가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워라밸이 잘 갖춰진 회사라고 해도, 퇴근 이후에 취미를 실컷 즐긴다고 해도 삶이 공허한 이유다. 사실 내가 그랬다. 그런데 단순히 맞는 일을 찾는 과정이라고 하면 너무나도 추상적이다. '너의 내면을 따라라, 꿈을 좇아라'만큼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올바른 말이라도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없다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1. 넓은 경험
2. 깊은 성찰
3. 방향 설정
4. 반복 실행
5. 천직 탐색
넓은 경험 - 난 이런 일을 했다
철학자 칸트는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고도 깊은 통찰에 이르렀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한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위해서도 아니고, 트로피처럼 방에다 진열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다. 경험은 내면에 재료를 쌓는 과정이다. 냉장고에 뭐라도 있어야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경험이 있어야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그리고 최악의) 경험은 사람이다. 나도 그렇지만 누구나 관계에 있어서는 보수적이다. 패러글라이딩이나 인도 요리에는 쉽게 도전하는 이들도 자신과 결이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는 주저한다. 사람은 경험의 총체다. 그래서 타인을 만난다는 건 그 경험의 총체를 일부나마 흡수하는 과정이다. 다양한 연령대, 성별,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들과 교류해야 한다. 일부러 그런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어렵다.
깊은 성찰 - 난 이런 사람이다
경험을 통해 재료를 넣었다면 이제 성찰의 시간이다. 성찰은 사람을 깊어지게 한다. 자신에 대한 생각이든 세상에 대한 생각이든 스스로 판단하여 관념을 형성해야 한다. 작게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가?' 내지는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더 나아가면 나만의 비전이나 목표, 삶의 의미 같은 더 깊숙한 비밀을 캘 수도 있다.
성찰은 산소통을 매고 심해까지 내려가는 것과 같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이지만 내가 나아가는 한 뼘의 거리만큼 밝혀진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 뭐든 받아들이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성찰은 사색과는 달리 표현으로도 이를 수 있다.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해도 좋지만 밖을 거닐어도 좋고, 글을 쓰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도 된다. 표현하는 과정에서 생각은 구체화된다. 표현하려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방향 설정 - 난 이렇게 살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경험과 성찰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목표가 없다면 경험은 유희에, 성찰은 찰나의 공상에 그치고 만다. 나에게 맞는 일이라는 목적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설정해보자. 아주 구체적일 필요는 없다. 방향이란 나의 상황과 시대의 흐름 등 온갖 요소에 의해 바뀌기 마련이다. 다만 큰 그림 정도는 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고 만다.
이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살겠다는 선언. 문장의 형태로 정의할 수 있다면 좋고 키워드로 살펴보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난 '글쓰기, 인생, 고요함, 철학' 등의 키워드를 발견했다. 정확한 길은 모르더라도 방향 정도는 잡아가고 있다. 나침반을 놓고 북쪽으로 향하는 여행자와 같다. 적어도 나만의 방향과 반대되는 길은 걷지 않으련다. 거기엔 내 자리가 없다는 걸 지난 세월 동안 뼈저리게 알았으니까.
반복 실행 - 난 매일 이렇게 실천한다
여기까지는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단계다. 이제 실천해야 한다. 뭐든 하나라도 붙잡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당장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매일 무언가를 쌓아 올려야 한다. 방향만 옳다면 언젠가는 빛을 본다. 설령 가시적인 결과를 내지 못해도 과정을 즐겼다면 됐다. 경험과 성찰을 통해 나에게 맞는 방향만 설정했다면 이 길에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 자체가 성공이니까.
실행은 열정이 아닌 관성으로 끌고 가야 한다. 초심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누구나 그렇다. 열정과 의지력은 분명 멋진 단어지만 계속 곁에 있지는 않다.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루틴을 짜든 장소를 옮기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자신을 너무 믿진 말자.
천직 탐색 - 난 나만의 일을 찾는다
그렇게 하루 이틀 결과물이 쌓이면 일정한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나만의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나에게 맞는 일을 찾으려면 그 일에 나를 한껏 담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사리 대체되고 또 애초에 흥미가 잘 생기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의미를 추구한다. 어딘가에 나를 담아내는 일만큼 의미있는 게 있을까? 하다못해 악명이라도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그게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다.
천직을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매일의 실행을 통해 하나씩 만들어가야 하고, 그 이전에 풍부한 경험과 깊은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시로 방향 점검도 해줘야 하고 흐름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나에게 맞는 일이 뭔지 고민이라면, 조금 더 나다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면 한 번쯤 삶을 바쳐볼 만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삶에는 의미가 생긴다. 그 살아있다는 느낌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