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거니 Dec 24. 2021

평일. 아침. 산책. 소리.

회사를 다닐 때는 누리지 못했던

평일 아침, 밥을 챙겨 먹고 근처 호수로 산책을 나간다. 사실상 백수의 특권이다. 직장인이나 학생은 설령 시간이 있더라도 아침 산책을 하지 않는다. 시간의 밀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빈 시간이란 일과 학업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야 하는 소중한 무언가다. 한가로이 걸음을 옮길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남는 게 시간인지라 사치를 한번 부려본다.


산책로엔 사람이 거의 없다. 적어도 내 나이 또래는 아무도 없다. 딱 한 명이 조깅을 뛰러 나왔는데 아마 대학생이지 않나 싶다. 한가롭다. 출근길에 나서는 자동차의 분주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다. 눈이 올 모양인지 바람이 차면서 포근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었다. 하지만 세진 않아서 별로 춥진 않다. 아침에 정신을 깨우기에는 딱 적당하다.


호수에 물닭 몇 마리가 둥둥 떠있다. 그 조용한 경로를 따라 파동이 그려진다. 파동은 이리저리 흔들리다 자기들끼리 만난다. 그렇게 흩어진다. 물닭 한 마리가 연신 날갯짓을 하며 물 위를 달려 나간다. 발자국이 새겨진다. 물 튀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가 있어서인지 아주 작게. 평소에는 절대 듣지 못하던 소리다. 물닭의 발소리라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숲 쪽으로 가니 다른 새들이 눈에 띈다. 정확히는 귀에 들려온다. 새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터라 까치나 비둘기 정도만 알아본다. 어떤 새는 정신없이 나무를 쪼고 있는데 딱따구리는 분명 아니다. 그렇게 속도가 빠르지 않다. 마치 나무를 다듬듯 분주하다. 벌레를 잡아먹으려나, 아니면 제 집을 만드는 걸까. 한동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본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특별하다. 이런 시간조차 왜 평소에는 누리지 못하는 걸까.


잠시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다. 호수는 일부분이 얼어있다. 호숫가에 앉아 귀를 기울이면 분명 얼음이 생겨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까. 아주 천천히. 그런 이상한 상상도 해본다. 벤치의 차가운 기운이 몸을 타고 올라온다. 느낀다는 건 이토록 시간이 필요하다. 그럴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한 이들은 모든 걸 해치우기 바쁘다. 음식도, 풍경도, 그리고 자신의 인생마저도. 시간을 내기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아이러니. 그 많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집에 돌아오는 길, 고양이가 색상별로 앉아 날 쳐다본다. 고등어, 치즈, 그리고 검은색 고양이다. 여유로운 눈으로 햇빛을 즐기고 있다. 다가가서 팡팡을 해드리는 게 예의이건만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때론 내버려 두는 게 가장 큰 사랑일 때가 있다. 게다가 난 고양이 알레르기도 있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와도 시간이 많이 남는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누워 책을 펼친다. 많은 철학자들 역시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칸트는 항상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해서 동네 주민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하고, 스피노자 역시 걷는 행위의 힘을 알았다. 가만히 앉아서는 도통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두 발로 어디든 가야 한다. 특정한 목적지가 없어도, 그저 그렇게.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해도 지구 안 망하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