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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28. 2021

백수는 달콤하다

그래도 일을 하고 싶다

백수의 뒹굴거리는 등짝을 본 일이 있는가. 그 등짝에는 적당한 게으름과 돈을 벌지 않는다는 주홍글씨가 아로새겨져 있다. 동시에 핸드폰에 반사되는 눈가에는 약간의 무료함과 불안함이 서려있다.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이고, 뭔가를 해도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뿐이다. 그 외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여타의 직장인 혹은 사업자와 동일하다. 그들 역시 돈이 항상 넉넉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백수와 비(非) 백수를 가르는 건 시간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백수에게는 자유가 있다. 그 자유가 시한부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방에서 백수를 압박해온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부모님, 잘 나가는 선후배나 친구, 그리고 무엇보다 돈. 침대와 한 몸이 되면서도 안다. 돈이 없으면 이 생활도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사람은 어쨌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그래서 '부자가 되는 법', '패시브 인컴으로 월 1000만 원 버는 법'같은 영상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마치 내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는 기분이다. 기분뿐이지만 때로는 그걸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백수는 어쨌든 달콤하다. 눈을 치켜뜨며 날 불러대는 상사도, 납득할 수 없는 조직의 논리도, 세상 망할 듯 다급하게 걸려오는 업무전화도 없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주창한 아타락시아에 가깝다. 아타락시아는 마음의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심의 상태다. 다만 완전한 평정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내면 한 구석에서 부정적인 신호가 지속적으로 쏘아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돈의 문제도 아니다. 돈 많은 백수를 다들 꿈꾸지만 그들 역시 무료하다. (물론 되어본 적은 없다)


사실 백수는 딱 직장인만큼 불안하고 또 직장인만큼 행복하다. 회사에 들어갔다고 불행하지 않고 회사에서 나왔다고 행복하지 않다. 사람은 그냥 사람이고 나는 그냥 나다. 백수와 회사원 사이에는 실개천 하나가 흐른다.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저쪽에서는 돈이 벌리고 있고, 이편에서는 그럴 가능성만 한껏 안고 살아간다. 만년 벤치 신세인 후보선수처럼.


생각해보면 직장인이어도 불안하고 쪼들리는 건 마찬가지다. 언제 팀이 옮겨질지, 언제 승진할지, 계속 여기 남아있을 수 있는지, 하루아침에 회사가 문을 닫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한다. 이제는 좀 쉬고 싶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회사 업무도 내려놓고 싶다. 근로소득으로는 자산 가격의 상승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암울한 얘기도 들려오는데 경쟁력을 쌓기는 어렵다. 회사 업무만으로도 쓰러질 것 같다. 백수 친구를 보며 적어도 난 돈을 벌고 있다는 위안을 얻으면서도 부럽기도 하다. 저 친구는 코인이나 주식으로 대박을 친 걸까? (대개 아니다)


직장인에게는 시간이 없고, 백수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이 없다. 모든 걸 얻을 수는 없다. 한 가지를 내려놓아야 다른 한 가지를 손에 쥘 수 있다. 물론 가끔 둘 다 얻어내는 생태계 교란종이 있다. 모든 건 확률의 문제다. 만약 그런 행운을 얻었다면 감사할 일이겠지만 대개는 그러지 못한다. 내가 무언가를 내려놓든 손에 쥐든 난 똑같은 사람이다. 그 자체로 갑자기 변화하지는 않는다. 직장인이었을 때도, 백수인 지금도 난 나다. 먹고 자고 뒹굴고 일하고 운동하고 절망하고 기뻐하는.


백수의 시간은 매일이 주말 같다는 말이 있다. 사실 틀렸다. 백수에게는 주말도, 평일도 의미가 없다. 오히려 평일이 더 낫다. 은행을 비롯한 각종 관공서가 활짝 문을 열기도 하고, 사람도 적으며, 막차 시간도 더 길다. 직장인 친구와 약속을 잡는 게 아니라면 주말이 되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하루하루가 동일한 시간으로 주어진다. 어떻게 시간을 구성해 살아가든 나의 몫이다. 그래서 일정한 루틴을 정하지 않으면 한없이 늘어진다. 흔히 생각하는 방구석 히키코모리가 되지 않으려면 몸을 일으켜야 한다. 꼭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몸을 움직이면 불안감도 덜어진다. 상황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그렇다. 가만히 앉아 나의 암울한 미래상에 대해 상상을 이어가다 보면 끝이 없다. 그 머나먼 우울감의 세계로 떠나기 전에 정신을 흩어놓아야 한다. 운동을 하든 집안일을 하든 친구를 만나든 뭐든 간에. 움직이면 확실히 덜하다. 그것조차 귀찮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한 번쯤 시도할만하다. 불안감 때문에 괴로운 건 나니까.


장기적으로는 일을 해야 한다. 꼭 회사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사실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회사를 못 다닌다. 그 누구도. 일은 돈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효용성이나 자존감, 삶의 안정성 및 자아실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직장을 다녔던 예전에도, 백수로 살아가는 지금도 내 최대 관심사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내 일을 할 수 있을까? 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아무리 취미활동을 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도 허전하다. 아예 일을 안 하는 백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성취라도 한다는 감각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꼭 경제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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