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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26. 2021

퇴사하고 제대로 쉬는 법

오늘도 쉬고, 일하고, 삽니다

Q. 퇴사하고 뭐 할 건데?

A. 일단 좀 쉬려고요.


그렇게 열흘 정도가 흘렀다. 사실 쉼에는 기준이 없다. 얼마나 쉬어야 충분한 걸까? 어떻게 쉬어야 하는 걸까? 뭘 해야 잘 쉬는 걸까? 이런 질문에는 사실 영영 답을 얻을 수 없다. 정답이 없으니까. 일의 형태만큼이나 쉼의 형태도 사람마다 다르다. 단순히 일을 안 하면 쉬는 건가? 회사만 안 나가면 쉬는 건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해야 쉬는 걸까? 알 수 없다.


쉼의 형태를 정의하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어쩌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자 기준을 찾아 헤맨다. 당장 인터넷에 널려있는 게시판만 봐도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또 확인받고자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나 잘 살고 있나? 그럼 어디선가 익명의 누군가가 나의 상황을 판단해준다. 그 역시도 누군가의 판단이 필요한 사람일 텐데도.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쉼 만큼은 아무리 찾아봐도 딱히 정보가 없다. 그건 쉰다는 것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쉼 자체를 죄악시한다. 특히 젊은 나이에 쉬는 건 사회적으로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걸 뜻한다. 산업화 사회 이후 휴식, 장애, 그리고 백수는 죄악을 뜻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휴식은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니까. 그렇기에 잘못된 것이다.


여전히 산업화 사회, 심지어 농경사회의 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한국에서는 유독 이런 인식이 강하다. 조금만 쉬고 있으면 바로 다음 계획을 묻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질타가 날아온다. 당장 먹고사는 데에 문제가 없어도 마찬가지다. 휴식은 오로지 일을 다 마친 어르신에게나 허락되는 특권이다. 그들을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어차피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놔주는 것뿐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소위 기성세대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쉬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노인 세대를 포함해서. 노인 빈곤층이 두텁고, 청년은 도전을 주저한다. 노력이나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옆자리의 친구와 경쟁을 부추기고 이런 레이스는 죽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개인의 실패는 오로지 개인의 탓으로 여겨지고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다. 복지제도가 발달하여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는다지만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제도나 경제적 지원이 따라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의식은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알고 있다. 의식의 변화가 더 어렵다는 걸. 그 어디에서도 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심지어 '생산적으로' 쉬는 방법이라는 자기 계발식 조언이 넘쳐난다. 쉰다는 건 생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 휴식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자. 다들 인생의 마지막 장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만약 휴식이 수단이라면 나올 수 없는 답변이다.


그런데 평생 치열하게 일하다가 모든 걸 놔버리면 그게 올바른 쉼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금세 헛헛해서 다른 일을 알아보거나 시간만 죽이는 식으로 여생을 보낸다. 물론 어떤 삶의 형태든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조금 먼저 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쉼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일과 대립구도로 보는 관점에서 온다. 일을 하지 않는 상태가 곧 휴식이라는 거다. 그래서 인생 2막을 꿈꾸는 이들이 내놓은 답변이 해외여행이나 전원생활이다. 그동안 살던 지역에서 아예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야만 쉴 수 있으니까. 코로나 사태 이전에 매년 최다 이용객수를 갱신하던 인천공항을 생각해보자.


그런데 일과 쉼이 꼭 분리될 이유가 있을까? 쉬다가 일하기도 하고, 일하다가 쉬기도 한다면 쉼이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는 한 방향이 된다. 번아웃이 올 때까지 자신을 착취하다가 방전이 되어 뻗어버리는 건 회사가 바라는 모습이지 나를 대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퇴사를 한 이후 일과 삶과 쉼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딱히 그 사이를 칼같이 구분하지 않는다. 집단을 다루는 데는 명문화된 기준이 유용하지만 개인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간다. 내가 나 자신을 규율해야 한다면 기준을 위한 기준을 세울 필요는 없다. 인생의 충만함과 의미, 그리고 행복을 추구한다면 말이다. 그 자체로 따를만한 가치를 스스로 정하고 거기에 맞춰 삶을 꾸려가면 된다.


그래서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하며 쉴지 함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지쳤다면 조금 더 긴 휴식이 필요할 거고, 일과 병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불안함은 내가 스스로 가지는 감정이면서 타인이 좋아하는 향신료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공포 마케팅이 잘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종 유튜버, 마케팅 회사, 심지어 넷플릭스도 간접적으로 이 전략을 이용한다. 일명 FOMO(Fear of missing out;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서 나만 소외되었다는 두려움) 현상이다. 집단주의 문화도 여기에 한몫했으리라.


그래도 누군가의 조언을 참고하고 싶다면 초점을 잘 맞춰야 한다. 특정한 숫자를 들이대며 공포감을 조성한다면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확률이 많다(ex. "한 달 이상 공백기가 생기면 인생 망한다"). 반대로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너무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말한다면 하나마나한 소리가 된다(ex. "자기가 알아서 잘하면 됩니다"). 관련하여 많은 콘텐츠를 경험하다 보면 점점 자신의 상황에 맞는 시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스스로 기준을 세워 쓸모없는 정보는 거르고 제대로 된 타격점을 때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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