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좀 지나갈게요
전 회사 동기와 맥주 한잔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공교롭게도 퇴근시간의 강남역이다. 남다른 지하철 줄이 나를 반긴다. 색깔도 비슷한 패딩 부대가 가득하다. 어쩌면 저렇게 머리색도 비슷할까.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게 바로 대도시의 바이브인가 싶다. 어찌어찌 짜부가 되어 간신히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는다. 그동안 착실하게 지켜온 사회적 거리두기 따위 의미가 없어지는 곳.
만원 지하철에서 저 멀리 있는 전광판만 바라본다.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사람이 가득하다. 하필이면 무선 이어폰도 두고 나왔다. 손을 꺼내 핸드폰을 들여다보기도 여의치 않다. 머릿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목석처럼 버틴다. 어차피 나도 딱 나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덩어리의 일부가 아니던가. 이럴 땐 차라리 마스크가 있어 다행이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 발소리, 패딩이 몸을 스치는 소리가 가득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경주마처럼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 살짝 취기가 오른 나로서는 그 광경이 신기하기만 하다. 평소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말이다. 저들은 분명 오늘도 힘든 하루를 끝낸 직장인이면서, 면접 때는 회사를 다 끌고 갈 것처럼 당차게 주장하던 사람이었겠지.
이방인의 눈길로 보면 신기한 장면이다. 그 속에 있을 때는 알지 못한다. 나와서야 보이는 게 있기 마련이다. 조직 내부의 부조리도 그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하물며 뚜벅뚜벅 거칠게 전진하는 패딩의 물결이야 그저 일상의 풍경에 불과하겠지. 그걸 낯선 눈길로 바라보는 내가 이상한 게지.
저렇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이들은 다시 짐을 챙겨 헬스장으로, 필라테스 학원으로, 또는 핸드폰 화면 앞으로 달려가겠지. 지친 몸과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서. 일주일 중 가장 힘든 목요일이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미래에 대한 옅은 불안감을 안고서. 사실은 내가 그랬다. 아직도 하루가 더 남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다. 금요일만 버티면 황금 같은 주말이 찾아오니까.
똑같은 패딩 속 서로 다른 생각과 욕망이 움튼다. 에어팟으로는 뭘 듣고 있을까? 팟캐스트? 음악? 유튜브 강연? 아니면 그저 노이즈 캔슬링이 필요했던 걸까? 지하철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모두의 마음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 수많이 얽힌 화살표 한 무더기 가운데 내가 서있다. 나조차도 어찌할 바 모르는 내면을 주섬주섬 품에 안고서.
'다음 역은 00, 00역입니다.' 아, 저 좀 지나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