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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Jan 19. 2022

말 안 듣는 좋은 아들

네? 잘 안 들리는데요?

만약 취업을 안 했거나, 대학을 아직 안 갔거나, 결혼을 아직 안 했거나, 연인이 없거나, 연인이 있거나, 자식을 낳지 않았거나, 낳았더라도 3명 미만이거나, 연봉이 1억 미만이거나, 자기 명의로 된 집이 없거나, 자식을 서울에 있는 유수 대학에 보내지 않았거나, 지난 명절보다 1kg 이상 살이 붙었거나, 사업을 하거나, 혹은 살아 숨 쉬고 있다면 가족과 친척의 잔소리를 견뎌내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자.


아직 결혼 생각도 없고, 회사를 당차게 때려치우고 나왔다면? 너무나도 좋은 먹잇감이다. 마치 나처럼. 주변 친척이나 가족이 극성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항상 얘기가 나오는 법이다.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조심해야 한다. 운전을 하고 있거나, 같이 식사를 하거나, 여기 와서 과일이랑 떡 좀 먹어라 했을 때 순진하게 자리를 펴고 앉는 경우라든지.


운전을 하면서 가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그런다. "다시 회사 들어갈 생각은 없냐? 자기 일 하는 게 쉬운 게 아냐. 회사에서 나오는 월급만큼 버는 게 쉬운 게 아니라고." 아차, 이야기의 방향을 회사 쪽으로 몰고 가면 안 됐었는데. 거의 다 도착해서 그 말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한참 잔소리를 들을 뻔했다. 물론 난 귓등으로도 안 듣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니까.


사실 잔소리가 쏟아지는 시점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넌 왜 리스크를 지고 도전하지 않니?"라던가, "4차 산업혁명시대에 너만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퍼스널 브랜딩을 해야 하지 않겠니?"라며 잔소리를 하는 친척이나 부모님은 없다. 그냥 없다. 그러다 한국식 인생 플랜에서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뒤통수가 따갑다.


아무리 퇴사가 대세라지만 부모님이 속해 있는 기성세대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해도 내 자식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게 부모님의 마음이다. 친척은 부모님과 남 사이의 중간 마인드로 잔소리를 하는 게고. 명절에나 한 번씩 보는 거라면 그동안 적립된 잔소리 포인트를 한 번에 정산하는 게 국룰이다. 남이라기엔 가깝고, 가족이라기엔 머니까.


그래서 잔소리의 레퍼토리는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여기 좀 앉아봐라, 그래 요즘 스타트업에 다닌다고? 거기 연봉이 얼마지? 앞으로의 인생 계획은 있니? 만나는 사람은 있고?' 최근 퇴사를 했고 아직 결혼을 약속한 정혼자도 없으니 사실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요전에는 일부러 친척이 오시는 날 약속을 잡았다. 친구와 실컷 놀다가 저녁 즈음해서 슬쩍 들어가 방으로 피신한다. 혼자서 모든 잔소리를 견뎌내는 건 무리다.


그럼 언제쯤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될까? 연애를 하면 결혼 얘기가 나오고, 결혼을 하면 자식 얘기가 나오고, 자식을 낳으면 다둥이 가정 얘기가 나온다. 진학, 취업, 사업, 노후 대책에도 똑같은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여기에 일일이 대응할 수 있을까? 물론 알고 있다. 다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니, 정말 그럴까? 나를 위한다지만 실은 본인을 위해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다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그런 마음이 섞여있지 않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조카든 사촌동생이든 나와는 다른 또 하나의 사람이다.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남의 얘기는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


하다못해 교환학생을 갈 때도 그랬다.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했더니 가지 말라고 해서 지원을 했다. 갈 거면 미국으로 가라고 해서 독일을 택했다. 기어이 독일에서 갈 거면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로 가라고 해서 중소도시에 있는 작은 대학교를 택했다. 일부러 반대로 한 게 아니라 처음의 결정을 따랐을 뿐이다. 교환학생 시점을 맞추기 위해 휴학을 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행을 다녔다.


가까운 이가 명백하게 엇나가고 있다면 옆에서 충고를 해주는 게 맞다. 그게 아니라면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그 사람을 위한 길이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답정너'식으로 조언을 구한다. 필요하면 알아서 찾아온다. 섣불리 훈수 둘 것도 없다. 본인 인생인데 자기가 제일 답답하지 않을까.


항상 '착한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참 싫었다. 착한 아들, 착한 학생, 착한 회사원이라는 꼬리표는 번거롭기만 하다. 착하다는 단어 이면에 있는 '반항하지 않고 순종적인'이라는 뉘앙스를 읽은 뒤로는 일부러 반대로 행동할 때도 있다. 나다움을 착함으로 덮지 말자. 나다우려면 예의 바르게 싸가지가 없어야 하고, 상당히 고집스러워야 한다. 난 선한 사람이 되고 싶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한걸음 물러서면 내 삶은 끝도 한도 없이 뒤로 밀린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 죽기 전의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죽기 전에 '부모님 하라는 대로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서 정년까지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다가 뭐 할지도 모르고 은퇴를 맞이할걸'이라고 되뇌는 사람은 없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사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명확하다.


같이 일하던 다른 업체 담당자분이 사고를 당해 뇌사상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업무나 실적 관련해서 직접 통화도 했었는데 충격이었다. 담당자는 금방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언제 문을 두드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언젠가는'이라는 막연한 감정을 안고 살아갈 뿐이다. 필연적으로 맞이할 마지막 순간에 난 어떻게 살아온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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