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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Jan 27. 2022

사랑이란 대체 뭘까

보여주거나 혹은 말해주거나

사랑이란 뭘까?


이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 사랑을 보여주기.

둘, 사랑을 말해주기.


이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렇지 않을까.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사랑과 말로서 읊조리는 사랑.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보이는 사랑은 묘사의 형태를 띠고, 말해주는 사랑은 설명의 형태를 띤다. 전자가 주관적으로 인식되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사랑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목표로 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건 단연 사랑 보여주기(Showing)이다. 사랑을 묘사하는 수많은 문학작품과 음악, 그리고 연애편지를 보라. 최근에는 사랑 말해주기(Telling)가 주목받고 있다. 사랑을 말하는 이들은 주장한다. 사랑 역시도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설명할 수 있는 감정 내지는 관념이라고. 정확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모호한 감정의 파편에 저마다 맞는 태그를 달아줘야 한다고.


사랑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에 대한 거부감을 차치하고라도, 과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지금까지는 꽤나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얼마 전 읽었던 책도 그랬다. 저자는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실 사랑이라기 보단 연애감정에 가까웠지만) 객관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은 어떠해야 하는지,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세세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당장 유튜브만 틀어봐도 사랑에 대해 보여주기(Showing)보단 말해주길(Telling) 원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쉽사리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조언을 듣고 싶어 한다. 연인이 마음이 식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재회는 가능한 건지 등 사랑과 관련하여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한다. 그리고 영상 속 조언자들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사랑은 이러해야 한다, 저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수많은 연애 혹은 사랑 상담을 해주며 쌓은 노하우를 토대로 아예 자신만의 공식을 만든 이도 있다. 앞서 언급한 연애 서적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사랑을 말해주는(Telling) 이들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사랑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내면은 변덕스럽다. 자신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어떠한 감정의 발현으로 인해 객관적인 설명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다만 아무런 기준도 없다면 사랑을 이어가는 건 고행에 가까워진다. 무조건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에는 엄연히 공식이 존재한다. 더구나 연인이 '나를 왜 사랑하는 건데?'라고 했을 때 넌지시 건넬 답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랑을 말하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다.


이는 마치 행동주의의 접근방식과 유사하다. 행동주의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를 행동에 대한 관찰로서 알아낼 수 있다는 심리 이론이다. 특히 유아나 동물처럼 내면을 스스로 표현하기 어려운 존재를 연구할 때 자주 쓰인다. 행동주의 이론에 따르면 심리란 자극(Stimulus; S)과 반응(Response; R) 사이의 관계다. 즉, 다음의 공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심리 = S -> R


S도 R도 객관적인 측정 도구를 통해 관찰할 수 있는 영역이다. 특정한 자극을 주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면 내면의 흐름도 읽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특정한 자극 S*를 주었더니 일관된 반응 R*이 나왔다면? 해당 자극은 특정 심리적 반응과 인과관계, 혹은 상관관계가 있다. 그 관계 다발을 지속적으로 찾아내고 축적할 수 있다면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물론 행동주의 심리학은 앞서 언급한 사랑을 말해주는(Telling) 이들과 같은 한계점에 봉착한다. 같은 자극을 주었음에도 다르게 행동하는 이상점(Outlier)에 대해서는 설명이 불가하다. 설령 통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취급할 만큼 소수의 케이스라고 해도 말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에게는 곤란한 일이다. 반례와 통계를 통해 엄밀히 증명되어야 하는 사회과학의 특성상 그냥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까지는 유효한 어떤 공식을 발견했더라도 언젠가는 특정한 반례를 통해 반박당할 수 있다. 물론 그때마다 자신의 이론을 수정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식'이라는 형태를 통해 심리를 설명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사랑에 대한 설명(Telling)이 무의미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이론이 언제든 폐기될 수 있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쓸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사랑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선 이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겠다고.






그럼 사랑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수용이란 무엇인가? 사실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사랑을 언급하는 이들의 목표는 하나다.


목표: 사랑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이르는 것.


불명확하고 피상적인 내용을 나열하는 사람조차도 결국은 자신만의 방법을 통해 사랑의 정수에 닿고자 한다. 그게 공식의 형태를 띠든 소설의 형태를 띠든 말이다. 그런 시도가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적당히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하기란 힘든 일이다.


적어도 사랑에 관한 한 '정확함'은 말해줌(Telling)보다는 보여줌(Showing)에서 발견할 공산이 크다. 노래만 봐도 그렇다. 노래의 소재는 보통 사랑이다. 오죽하면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은 노래 영상에 항상 '흔해빠진 사랑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네요'라는 댓글이 달릴까.


그렇다면 사랑은 왜 노래의 소재로 쓰이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사랑이 지닌 특수성과 보편성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랑은 보통 개별적인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 내지는 관계다. 한 사람 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감정의 변주가 가능한데, 사랑은 적어도 둘 이상의 내면세계가 개입된다. 이는 거의 은하의 충돌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사랑(나르시시즘)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서술할 수 있는 반면, 연인이나 가족 간의 사랑은 꽤나 복잡한 설명을 요구한다.


사랑은 보편적이다. 누구나 사랑을 원하고, 또 하고 있으니까. 앞서 언급한 사랑 말해줌(Telling)은 사랑의 보편성에 주목한다. 그래야만 한다. 객관이란 오로지 보편성에 대한 명료한 설명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니까.


반면 사랑을 보여주려는(Showing) 이들은 사랑의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에 더 집중한다. 만약 객관적인 사랑의 기준을 정해놓고 상대방이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이해와 수용은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개인 혹은 개별 사랑이 가진 특수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객관적인 설명이 가진 한계를 넘어 사랑의 정수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살펴보자. 사강의 탁월한 심리 묘사만큼이나 주목할 점은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에 있다.


책에는 폴, 로제, 시몽이라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은 폴을 중심으로 로제, 시몽이 보여주는 여러 사랑의 형태, 그리고 내면세계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폴은 전남편과 이혼한 뒤 로제와 교제하고 있다. 로제는 폴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런 로제의 심리는 폴의 아파트에서 지내면서도 정부(情婦)를 찾아가는 그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진정한 사랑은 폴이다. 그래서 일탈이 끝나면 어김없이 폴과 시간을 보낸다.


이런 상황에서 폴에게 접근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시몽이다. 시몽은 젊고 (폴보다 14살이 어리다) 유능하며 열정적이다. 로제가 폴을 고독감에 빠뜨렸다면, 시몽의 행동은 흔히 말하는 '사랑'의 형태에 더 가깝다. 항상 폴을 배려하고 진심을 다한다. 로제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폴 역시 이런 시몽에게 끌리게 되고, 결국 그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이르러 폴은 자신을 외롭게 했던 로제에게 돌아간다. 로제가 폴을 사랑하는 만큼 폴 역시 로제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몽은 요즘으로 치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10가지 방법'을 실천한 사람이다. 반면 로제는 '믿고 걸러야 할 유형의 남자'다. 사강은 이 찜찜한 결말을 통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사강은 사랑이 한두 문장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얘기하고자 한 게 아닐까? 폴에게 있어 로제는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하게 된 사람'이고, 시몽은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이다. '사랑할 수 있다/없다'는 앞서 언급한 객관적 보편성에 관한 서술이다. 반면 폴의 선택은 주관적 특수성이 발현된 모습이다.


사랑의 관점에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걸 따질 수 있을까? 굳이 문학작품을 뒤적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숱하게 보아온 사례가 아닌가? 물론 나름의 이유를 통해 그 수많은 사랑의 형태를 일일이 논증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다만 논증에 집착하면 흔히 말하는 '정상성의 함정'에 빠질 개연성이 크다. 사랑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형태의 사랑은 그 자체로서 인정받아야 할까? 설령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해도? 적어도 프랑수아즈 사강은 그렇게 믿었다. 이 작가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강이 말한 자기 파괴의 권리란 마약이나 자살, 자신을 좀먹는 사랑에도 적용된다. 사강에게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보편성이 얼마나 쉽사리 정상성을 강요하고, 금기라는 형태로 개인의 특수성을 억눌러왔는지.


그럼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나는 연애도, 근친상간도, 가학적인 사랑도 인정되어야 하나?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모든 스펙트럼의 사랑을 인정한다면 윤리적 상대주의의 딜레마와 만나게 되진 않을까?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사례들도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의 모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질문을 던지며 나아가는 것이다. 보여주든 말해주든 언젠가는 정확한 사랑의 정수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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