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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인간 Nov 27. 2020

참착한 부동산

서민의 꿈이 되어버린 아파트 

2020년 11월의 마지막 주의 금요일. 저녁 5시만 넘어도 스산해지는 밤공기 때문인지 몸을 움츠려 드는 계절이다. 칼날처럼 매서워지는 바람만큼 집값은 폭등해서 서민의 꿈이 되어버렸다. 아파트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는 잣대의 날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서로가 서로에게 비교대상이 되는 시대가 다가왔다.


일찌감치 나는 엄마 덕분에 부동산에 눈을 떴다. 고작 월급쟁이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우리가족이 먹고 살기가 빠듯했다. 근로소득 외에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고는 투자밖에 없었고 엄마는 내가 10살 남짓한 나이부터 부동산 갭 투자를 시작하셨다. 우리 가족은 남의 집에 얹혀 전세를 살았고 엄마가 산 집에는 또다시 누군가의 가족이 얹혀살았다. 


당시의 어린 나는 '자가'와 '전세'의 개념조차 없었다. 내 친구들도 그러했다. 오늘날 아이들이 귀동냥으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네 집 몇 평이야?' '전세야?'라는 기가 막힐 말을 함부로 내뱉지도 않았다. 모두가 국위선양을 위해 연소득 1만 달러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살던 1980년대를 거치고 이제야 좀 살만한 1990년대를 지날 시점이었다. 


먼지와 모래가 날리는 공사장을 엄마손을 붙잡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허허벌판에 각종 공사장비들만 덩그러니 놓인 곳을 보며 엄마는 부푼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남부럽지 않은 내 집에서 내식구와 함께 즐겁고 행복한 날을 보낼 시절이 올 것이다. 그때가 온다면 남의 집에서 사는 서러움도 잊고 계약만료일에 굽신거려야 하는 그 번거로움도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내게 전하셨다.



2013년 1월 그해 겨울. 난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의 청년이 되었고 곧이어 취업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얻은 직장은 세종시에 위치한 정부부처 계약직 공무원이었다. 첫 출근날이 기억난다. 당시 세종시는 교통버스 1대도 다니질 않았기에 정년퇴직하신 아버지의 차를 얻어 타고 갔다. 차가 달리는 곳이 도로인지 나대지 인지도 모르게 하얗게 눈이 내렸던 날. 차에 탄 아버지와 엄마와 난 사방에 아무것도 없던 공허한 세종시를 바라보았다. 횡량한 그곳에 덩그러니 놓인 정부청사가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인터넷으로 열심히 '세종시'를 찾아보고 계셨다. 인터넷도 할 줄 모르던 양반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아파트 분양 사무소 연락처를 종이에 열심히 적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더니 엄마는 말을 이어갔다.


"청사가 저렇게 크고 땅이 저렇게 넓으면 개발범위에 엄청 크겠다. 나중에는 아파트와 상가도 들어서겠지"

"아들아, 세종시는 곧 엄청나게 커질 것 같아. 엄마의 예감이 그래. 세종시에 투자하자." 


출근날도 아닌데 우리 가족은 주말에 다시 세종시를 찾아갔다. 첫 마을과 임시 건물에 놓인 복덕방과 모델하우스를 드나들며 엄마는 세종시에 새로 장만할 집을 골랐다. 그동안 대전에서 우리 집 없이 살던 설움을 모아서 만든 귀중한 종잣돈을 하나둘씩 풀어 세종시 아파트에 투자하셨다. 



2013년 12월. 값진 첫 사회생활은 계약기간 만료와 동시에 대전의 공공기관 정규직 합격소식과 함께 끝났다. 엄마는 여전히 대전에서 세종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며 모델하우스를 드나들었다.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하던 세종시. 연일 뉴스에서는 세종시를 유령도시로 표현했고 정부는 세종시 미분양 아파트를 분양시키고자 5년 양도세 면제 조건과 같은 파격적인 혜택을 주었다. 아파트 분양사무실에서는 동, 호수를 골라주며 분양계약을 권고했다. 인적이 드문 모델하우스에 방문한 사람은 엄마를 포함하여 달랑 12명이었다.  



2016년 1월. 어느새 계약한 아파트가 완공되고 엄마를 따라 난 세종시 아파트에 첫 방문을 했다. 듬성듬성 불이 켜진 미분양 아파트를 지키던 경비 아저씨가 조용히 걸어 나와 우리 모자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유령도시에 뭐하러 왔슈, 오늘도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구먼." 


그 해에 난 결혼을 했고 세종시에 새로운 신혼집을 전세로 얻었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난 청약 통장에 돈을 모았고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부동산을 다니며 아파트 시세를 점검했다. 그리고 부동산 공부를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종시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고 아내는 음악학원을 개원했다. 우리 부부가 세종에 온 지 1년째 되는 날에 뉴스에서는 이런 보도가 흘러나왔다.


'세종시 분양 경쟁률 30:1 역대 최고, 분양 1순위 마감 성공' 


엄마가 조용히 들어갔던 인적이 드문 모델하우스에는 어느새 타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세종시 아파트 청약을 신청하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다음 해 나는 신혼부부 청약에 당첨되었고 부모님과 동생도 세종시로 터를 옮겼다.



2020년 11월. 그로부터 7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종시는 천지개벽하듯 변했고 엄마의 자산은 몰라보게 크게 불었다. 엄마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세종은 어느새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도시가 되어있었고 엄마의 통장잔고는 몇십 배가 불어나 있었다. 엄마는 어느새 억만장자가 되었다. 엄마 덕분에 변변치 않은 월급으로 근근이 살던 우리 집은 남의 집에 살던 설움도 잊고 때 되면 누리고 싶을 때 누리지 못했던 그 고달픔도 던져버렸다.


난 아직도 첫 마을에 있던 작디작은 부동산. '참착한 부동산'이 있던 곳을 드나들 때면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차가 없어 대전에서 세종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던 엄마의 값진 걸음걸이가 생각나고 젊은 사람이 돈도 없이 부동산에 드나든다며 핀잔을 주던 아줌마가 생각난다. 우리 가족이 부자가 될 수 있도록 좋은 물건을 소개해주시던 소장님의 얼굴이 생각나고 아내의 학원 부지였던 그 횡량한 땅을 찾아 가보던 날들이 생각난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세종시 아파트는 가족들의 꿈이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그 아파트는 유령도시였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미분양 아파트였다.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던 엄마도 분명 그 당시 두려웠을 것이다. 

모진 풍파와 어려움을 이겨가며 값지게 모아둔 종잣돈을 섣불리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그 종잣돈과 지금의 결과를 얻기 위해 엄마가 남몰래 희생했던 시간들은 충분히 보상받아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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