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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04화

엘리베이터

by 안개홍

토요일 07시 30분


민아는 즉시 알아챘다.

메모해 둔 그대로였다.


호수공원에서 새벽마다 보던 러너.

엘리베이터에 스친 낯선 향의 주인.

그리고 지금 눈앞의 손님.


모든 퍼즐이 하나로 맞춰졌다.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했다.


오.지.훈.


생과일 주스를 좋아하는 단골.

으뜸마을 1001동 13층 주민.


"생과일주스 하나요.”


지훈은 숨을 고른 듯 차분하게 말했다.


운동복 위에 후드집업을 걸쳤지만,
목덜미에는 아직 땀이 맺혀 있었다.


방금 운동을 마친 체온의 열기가

곧바로 민아에게 전달되었다.


민아는 오렌지를 반으로 갈랐다.

칼끝이 과육을 누비며 들어갈 때마다

노란 즙이 튀어 손등을 적셨다.


믹서가 돌아가며

얼음과 과육을 으깨는 소리가


민아의 귀에서는 심장 박동과 섞여서

하나의 리듬이 되었다.


지훈은 단지 내 유명인이다.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단지 봉사활동 담당자.


나란히 선 엘리베이터에서

"몇 층 사세요?"하고 먼저 묻는 친절한 남자.


인근 공인중개사 여대표가

'우리 딸을 소개해주고 싶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그 청년.


지하 주차장에서

우연히 마주쳐 인사도 했던 것 같다.


스타트업 대표. 직원은 15명 남짓.

투자자 미팅 때문에

늘 늦은 오전에 나타나는 남자.


이제야 모든 게 하나로 이어진다.

민아는 조용히 노트를 펼쳤다.


- 오지훈. 1001동 주민, 새벽 러너.

- 그리고 토요일 여자와의 약속 (?)


"주문하신 생과일주스 나왔습니다."


민아가 주스를 건네자

지훈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가 컵을 건네는 찰나,

지훈의 핸드폰이 짧게 떨렸다.


짧은 진동,

기다린 듯 즉시 받는 손길.


"어, 나야. 이제 세종 도착한 거야?"


지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워졌다.

평소 아파트에서 보던 거와 달리

더욱 다정하다.


민아는 즉시 노트를 열어 적었다.


- 누군가 통화. 세종 도착. 친밀한 목소리


호수공원에서 들었던 '예정된 기쁨'의 주인공일까?


"낮에는 안되더라도 저녁에는 괜찮잖아.

오늘은 널 꼭 봤으면 해."


문장의 끝마다 아주 가느다란 애원.


조금 전까지 호수를 가르던 근육의 탄성이

지금은 목소리 끝에 대롱 매달려 있다.


"난 하루 종일 너만 기다렸다니까?

내가 거기로 갈게, 그럼 되잖아"


혼잣말인지, 설득인지

구분하지 어려운 속삭임이 지속된다.


지훈의 미간이 한 번 움츠렸다가

이내 풀리면서 화색이 돈다.


"오늘.. 그럼 우리 집에서 보는 거다?"

23:40분쯤?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


민아의 귀가 쩌렁 울렸다.


호수공원에서 예고된 그 토요일의 약속

바로, 오늘이었다.


민아는 자신의 아파트 동호수를 떠올렸다.

오지훈은 13층이니까,

아 맞다. 1001동 1301호.


민아의 볼펜심이 종이를 파고든다.


- 23:40분 자택 약속 확정. 1001동 1301호.


바로 그때.

지훈의 한 마디가 민아의 숨을 가로막았다.


"그럼 남편은 어떻게 하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커피머신의 보일러가 한번 깊게 숨을 쉰다.


민아는 숨을 고르고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이 대화를 가려주길 바라면서


유부녀.


단어 하나가 가슴 안쪽에 박힌다.

민아는 쿵쾅거리는 그 단어를 노트에 옮겼다.


- 오지훈 토요일 만남상대가 유부녀(?)


봉투가 떠올랐다.

현우와 은지가 주고받던 흰 봉투.


이 도시의 비밀은 모두 민아 공간에서

민아가 기록한 노트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민아의 손끝이 떨렸다.


‘설마 이건 불륜인가?

지훈의 내연녀는 유부녀? 아닐 거야. 설마….'


지훈의 내연녀가 궁금한 나머지,

민아는 몇 번이나 주문을 틀렸다.


"민아 씨, 오늘 어디 아파? 왜 그래?"


단골 아주머니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다가 이내 흩어진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다.

호수공원 러너. 스타트업 대표.

봉사력 넘치고 친절한 이웃.

그가 왜. 무엇이 아쉬워서. 유부녀를 만날까.


민아는 스스로 다그친다.

'추측일 뿐이야.'


방금 전의 지훈의 음성.

'남편'으로 시작해 말끝을 누르던 그 숨결.

추측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아는 다짐했다, 오늘 밤. 확인한다.

궁금증이 갈증처럼 목을 조이는 밤이 오기 전에

스스로 마실 물을 찾아보기로.




저녁 11시 15분,

으뜸마을 1001동 현관 로비.


현관 로비는 유난히 조용했다.


자동현관문 위에 달린 초록 불빛이

일정한 템포로 깜박이며 숨을 쉰다.


민아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반복했다.

손바닥의 열이 식었다 데워졌다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로비를 가로지르는 발자국 소리.


4층 중학생이 배낭을 끌고 지나가고

8층 노부부가 서로의 팔을 잡아주며

퇴근하듯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다시 고요해졌다.


오늘은 꼭 파헤치고 싶었다.

지훈이 누구를 만나는지.

그 여자가 정말 유부녀인지.


만약 유부녀라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라면.

내가 아는 단골이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

여자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커졌다.


'띡띡띡띡, 드르륵'


현관문 자동개폐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 사이 어둠에서 한 여자가 들어온다.


검은 레깅스가 허벅지와 종아리를 감아

두툼하고 매끈한 엉덩이까지 완벽한 선을 그린다.


회색 크롭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가슴 라인.

헬렌 카민스키 모자에 검은 선글라스.


큰 선글라스 아래 작은 얼굴.

필라테스 강사처럼 관리된 몸매.


여자의 단발머리가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모든 것이 숨김을 위해 고안한 복장인데

아이러니 하게 몸은 숨겨지지 않는다.


운동으로 관리된 몸.

선명하게 잡힌 윤곽 라인.


민아는 단번에 알았다.

이 여자는 으뜸마을 1001동 주민이 아니다.


긴장한 숨결이 좁은 공간에 뒤섞였다.

민아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뛴다.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자는 민아를 힐끗 보고는

반 발자국 물러나 고개를 낮춘다.

목소리는 작고 평평했다.


"응, 은서야 깼어?

왜 일어났어 우리 애기,

다시 누워 엄마 금방 들어갈게.

엄마 잠깐 친구 만나러 왔어. "


민아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녀는 유부녀였고 한 아이의 엄마.

가장 높은 확률로 지훈의 내연녀.


민아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으로 이동했다.


가느다란 손목으로 이어진 그녀의 손.

짧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톱.


그런데 단 하나.

새끼손가락의 보라색 네일.

그것이 작은 공간에서 도드라졌다.


노트에 적듯

민아는 속으로 단서를 적었다.

- 유부녀, 아이이름 은서. 지훈의 내연녀,

- 새끼손가락에 보라색 네일을 함.


민아의 눈초리를 의식한 듯

여자가 모자를 더 푹 눌러쓴다.

목선이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여자는 핸드크림을 꺼내

소량을 짜고 손가락 마디에 꼼꼼히 문댄다.


건조함을 달래는 동작이라기보단

무언가를 지우는 제스처처럼 보였다.


'띵- 1층입니다. 올라갑니다."


엘리베이터 도착음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사람은 민아와 그녀. 딱 두 명.


버튼 패널 앞에서 그 여자가 먼저 손을 뻗는다.

가녀리고 하얀 그녀의 손이 13을 누른다.

민아도 엉겁결에 15층을 누른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13층.

1302호 민아의 단골 새댁이 사는 곳.

1301호는 오지훈.


확신이 거의 직감의 속도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은서의 엄마이자 유부녀

지훈의 내연녀.


엘리베이터가 오르기 시작한다.

1층, 2층, 3층... 숫자가 조용히 바뀐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숨결이 섞인다.

여자의 단발이 목덜미에 살짝 달라붙었다

이내 떨어진다.


민아가 곁눈질로 본 여자의 옆얼굴.

작고 담백하고 하얗고 예쁘다.

도톰한 그녀의 입술이 반쯤 열렸다.


민아는 눈을 감았다.

궁금증이 갈증처럼 목을 죄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아니면 영영 모른다.


4층.

5층.

6층.


여자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그녀는 메시지를 하나 확인하더니

엄지로 화면을 톡톡 두드린다.

새끼손가락의 네일이 다시 한번 번뜩였다.

마치 작은 별처럼.


민아의 머릿속에서 낯의 장면이

연쇄적으로 재생됐다.

가운터 앞에 선 지훈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오늘 11시 40분.

남편은... 어떻게 하고'


7층.

8층.

9층.


여자가 팔짱을 기었다 풀었다 반복한다.

손목의 작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바늘자국처럼 얇은 상처.

민아는 그게 무엇일지 즉시 떠올려봤다.


10층.

11층.


민아는 입술을 적셨다.


'지금이다!'


12층.

13층.


'땡~'

벨리 울렸다.

문이 열리기 전 민아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여자가 멈칫했다.

선글라스 뒤로 시선이 흔들리는 것 같다.


경계, 초조, 발각의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잠깐의 방어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1301호와 1302호의 갈림길.


현관등이 켜져 있다.

누군가 문 안쪽에 있는 느낌이었다.


민아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여자의 발끝이 먼저 움직인다.


왼쪽. 1301호 방향.


여자가 모자챙을 더 눌렀다.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빠르게 내린다.


"죄송해요. 다와서요..."


여자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아주 낮게 한마디를 하고 사라진다.


문 안쪽에서

현관문 전자도어록이

삑- 하고 열리는 소리가 겹친다.


'문이 닫힙니다. 쿵-"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민아는 한참 엘리베이터에 멍하니 있다가

불현듯 갑자기 어떤 기억이 떠오른다.


‘은서엄마,

카페 단골에게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누구였더라.'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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