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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03화

호수공원

by 안개홍

시간은 오후의 빛을 반쯤 마신 상태였다.

창가에 앉은 현우와 맞은편의 은지.

그리고 카운터 너머 민아.

잔의 열기와 말의 온도가 천천히 맞춰지는 중이었다.


"이상하다니, 뭐가요?"


현우가 물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평온을 흉내 냈지만

시선은 필요한 것보다 길게 머물렀다.


은지가 짧게 웃었다.


"그냥... 혹시 오해받을까 봐서요.

이 동네 사람들이 말이 많잖아요. "


오해.


오해받을 만한 일이 있다는 전제처럼.

그 단어가 둘 사이의 다른 의미를 가졌다.


현우가 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냥 동네 어른들끼리 커피 마시는 건데"


현우는 입으로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주변을 의식했다.


현우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고

눈동자는 창밖과 주변 테이블을

한 번씩 스치고 돌아왔다.


다행히 카페엔 이제 둘 뿐이었다.


민아는 머신을 닦는 척 귀를 기울였다.


대화의 간격, 호흡의 길이.

의자 다리의 미세한 마찰음까지.

노트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맞아요, 그냥 커피 한 잔"


은지가 잔을 내려놓았다.

입술에 남은 거품을

혀끝으로 아주 느리게 지웠다.


그 동작에 현우의 시선이

잠시동안 붙었다가 떨어졌다.


'징~징'


현우의 휴대폰이 작게 떨렸다.

화면을 본 현우의 표정이 굳는다.


"바쁘신가 봐요?"


"네.. 와이프가 좀 늦는다고..."


"많이 외로우시겠어요.."


은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스며든 울림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괜찮아요."


현우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말끝이 살짝 꺾였다


괜찮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으로

짧은 침묵이 테이블 위를 지나갔다.


바깥을 지나가는 교복 무리의 웃음이 들쑥날쑥했다.

세상이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목소리들.


민아는 노트에 적었다.


- 교사와 학원 원장, 흐려진 경계


은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가봐야겠어요.

아이들 학원 끝나는 시간이라."


은지의 말에 현우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이, 은지의 손이 현우의 어깨에 올랐다.

3초. 짧지만 확실한 접촉.

현우는 그 접촉을 피하지 않았다.


은지는 봉투에 시선을 담으며 말했다.

“오늘 밤 안에 답을 주세요.”


같은 말을 더 낮은 톤으로 한 번 더.

은지는 어조를 의도적으로 평평하게 눌렀다.


"다음에 또 뵐게요. 자주요."


자주.


그 말속에 이미 약속이 담겨있다.

민아는 스팀피처를 닦는 척하며

그 한 음절의 무게를 셈했다.


노트에 미세한 압력으로 글자가 박혔다.


- 현우와 은지

‘오늘 밤 안에’, ‘자주’, 학부모 톤 아님.


문이 닫히고도 은지의 향수는

한동안 카페에 오래도록 남았다.


현우는 빈 의자를 한번 보더니

은지가 입술을 닦고 놓고 간 냅킨을

슬쩍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나가자, 종소리가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오후 10시 45분,

민아의 카페.


유리문 자석 표지가

OPEN에서 CLOSED로 뒤집혔다.

얇은 자석이 유리를 톡 하고 친다.

포스기의 전원을 끄고

전원을 순서대로 내리며

민아는 집으로 돌아왔다.


민아의 침대.

창문 틈으로 들어온 가로등 빛이

블라인드 간격을 따라 바닥에 눕는다.


눈을 감을 때마다 봉투가 떠올랐다.

은지의 붉은 립스틱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밤을 파고들었다.


민아는 베개를 두 번 뒤집었다.

덜 뜨거운 면, 곧 뜨거워질 면.

눈을 감으면 봉투의 표면이 눈꺼풀 안쪽에 붙었다.


민아는 봉투를 잊기 위해

잠시 서울의 밤을 생각했다.


오픈스페이스 사무실,

유리 파티션,

차가운 형광등.


“우리 각자 살아보자.”


마지막 남자의 입술에서

떨어진 그 문장은 유리구슬처럼

바닥을 구르다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그날 이후 잠은 민아를 외면했다.

세종으로 이사하며 달력과 도로,

공기와 카페인을 모두 바꿨지만

불면은 우편번호만 바꿔 같은 곳에 도착했다.


오늘은 유난히 두꺼웠다.


현우와 은지의 모습.

하얀 봉투, 손끝의 떨림.

그리고 웃음의 끝에서 미끄러진 단어들.


궁금증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민아는 서랍에서 노트를 다시 꺼냈다.


'봉투엔 뭐가 들었을까.'


돈일까. 시험지일까.

아니면… 유치하지만 연애편지?


스스로 비웃다가도,

낮게 묻어 나온 은지의 웃음을 떠올리면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끌려왔다.


네 칸을 채우고도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민아가 관찰한 건 움직임과 온도뿐,

여전히 내용은 없었다.


어느새 새벽 네시가 넘었다.


민아는 결국 일어섰다.

바람막이를 걸치고

러닝화를 두 번 더 단단히 묶었다.


'띵동— 문이 열립니다.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향이 먼저 밀려들어왔다.


땀의 소금기가 섞인 살아 있는 체온의 잔향

민아는 잠깐 멈춰 섰다.


'이 냄새 대체 어디서 맡은 거지?

분명히 익숙한데..'


냄새를 따라 기억의 문턱까지 갔으나

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새벽,

호수공원


안개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물결 위로 얇은 막이 드리워져

가로등이 물감처럼 호수에 번졌다.


호수는 마치 숨을 삼키듯 조용했고

풀숲에서는 알 수 없는 벌레 울음이

리듬 없이 튀어나왔다.

가로등 불빛이 물 위에 길게 눕고,

물비린내가 금속 난간의 냄새와 합쳐져

새벽만의 색깔을 만들고 있었다.


민아는 숨을 고르고 첫 보폭을 내디뎠다.


"쿵! 쿵!, 탁! 탁!, 후~ 헉! 헉!"


저 멀리 호수 안개 사이로

낯선 남자 실루엣이 보인다.


발자국 소리와 규치적인 호흡과 리듬.


발의 충격이 한 박자 크게,

숨의 분출이 한 박자 길게.


러닝 하는 남자.

몸이 다부진 30대 초반.


러닝셔츠는 땀에 젖어 피부에 붙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흉곽이 선명하게 들렸다.


어깨에서 팔꿈치로 내려가는

남자의 근육의 선은 빛의 방향에 따라

오목과 볼록을 바꿔가며 살아 움직였다.

허벅지 근육은 다음 보폭을 약속하듯

탄성으로 묶여 있었다.


신발이 바닥을 차는 순간마다 진동하듯 떨렸다.

남자 입에서 거친 숨이 빠져나올 때

물안개가 앞쪽으로 밀리는 듯하다.


인기척을 느낀 민아는

반사적으로 가로수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나뭇가지 사이로 남자의 어깨선이 나타난다.


남자는 벤치 앞에서 속도를 줄여

제자리에서 짧게 스텝을 밟았다.


그 남자의 시선이 호수 입구, 공원 주차장 쪽,

나란히 놓인 벤치에 차례로 스쳤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난 뒤,

휴대폰을 들고 남자가 전화를 건다.


"나 지금 러닝 중인데, 오늘은 안 오는 거야?"


그 남자의 부드럽게 눕는 목소리.

한동안 침묵을 지키자

말 대신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대신 들렸다.


"오케이! 토요일. 같은 자리"


맨 마지막 단어를 말할 때

묘하게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민아는 그 표정에 이름을 붙였다.


'예정된 기쁨'


새벽의 얇은 고막에는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이 박혔다.


그 남자가 이번 주 토요일에

누구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예정된 기쁨을 확인한 남자는

아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갯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멀어 저가는 그 남자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나와 같은 라인에 사는 저 남자.

엘리베이터의 그 향의 주인.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토요일에 누구를 만나는 걸까."





오전 7시 무렵,

민아의 카페.


스팀완드에 빈 김을 뿜어 내부의 물기를 날리고,

포타필터를 장착해 더블샷을 추출했다.


에스프레소 표면에 얇은 크레마가 떴다.

잠시동안 커피의 김이 일어

카운터와 테이블 사이를 잠깐 가린다.


오전 일곱 시 이십오 분.


더블샷으로 추출한

첫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생각에 잠긴다.


출근하고 나서도 민아는 한동안

봉투의 기억과 새벽 러너의 말을 되새겼다.


다른 자리, 다른 시간, 다른 냄새.

내가 가진 것은 냄새와 시간과 반복뿐.


민아는 가볍게 숨을 내쉬웠다.

민아는 노트를 펼쳐 오늘의 첫 줄을 적었다.


- 2025년 9월 4일, 07시 25분


민아는 노트에 작은 별표하나를 그리고

그 옆에 아주 작게, 오늘이라고 적었다.


'띠리리링~'


현관의 종소리가 울리며

첫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


민아는 노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인사했다.


"어서 오...."


그때.

바로 그 냄새가 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맡았던 그 원초적인 향,

땀의 소금기, 새벽 공기의 차가움이 섞인 냄새.


민아의 심장이 살짝 뛰었다.

그리고 노트에 적었다.


- 9월 4일, 오전 7시 30분.

- 새벽 호수공원, 엘리베이터와 동일한 냄새.

- 새벽 러너, 같은 아파트 입주민일 확률 99%


그리곤 마지막 줄을 추가했다.


- 토요일 만나는 여자가 누굴까 궁금하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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