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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02화

아메리카노

by 안개홍


세 시 정각.


민아의 카페 시간의 풍경이 따르릉 울린다.

민아는 그가 들어오지 않아도 누군지 안다.

늘 같은 시각, 늘 같은 보폭.


그는 항상 냄새와 함께 왔다.

묵직한 교과서 종이 냄새.

사춘기 아이들의 땀과 섞이 체육관 냄새.

새 시멘트가 마르지 않은 복도 냄새.


민아의 코끝이 그 냄새부터 먼저 기억했다.

종소리보다 정확한 신호.


으뜸중학교 학생부장,

영어 선생 김현우.


그의 이름과 직업을 알게 된 건

단골 학부모 자랑처럼 던진 한마디 때문이다.


"우리 애 담임이 진짜 좋은 분이에요."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경계를 지키는 남자.

학부모들을 경계하는 남자.

우리 가게 커피를 좋아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 남자.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뜨겁게 샷추가해서요."


언제나 같은 말투.

마치 입 안에 하나의 주름처럼 새겨진 말.

변함없는 톤과 간격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말끝에 잔주름처럼 묻은 어조가 낯설었다.


민아는 그라인더 뒤로 현우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안경 너머의 현우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제자리를 찾는다.


이를 얼마나 꽉 물고 있는지,

턱선이 평소보다 단단하고 묵직하다.


팔꿈치까지 걷힌 셔츠 소매 사이로

팔근육이 팔근육이 팽팽히 긴장하고 있다.

주먹이 테이블 밑에서 쥐락펴락 조여졌다 풀렸다.


늘 단정한 표정.

균형 잡힌 질서를 지켜려는 얼굴,

오늘은 그 균형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은 뭔가 있다!'


커피가 추출되는 동안 현우는 창가로 갔다.

창가 모서리 자리. 그가 매번 앉는 자리.


유리창을 등지로 앉으면 빛의 방향이 바뀔 매마다

그림자가 늘어지고 줄어드는 그 자리.


민아는 뜨거운 물을 컵에 흘리며

드리퍼에 에스프레소 투샷을 내렸다.

진하고 구수한 원두 향이 공기를 누른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현우가 가볍게 목례한다.

창틈 넘어 쏟아지는 햇갈이

그의 손목시계를 반사한다.


흠집 난 시계를 자꾸 바라보는 현우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하다.



"징~징~"


휴대폰이 짧게 두 번 진동했다.

현우는 화면을 보더니 짧은 답신을 보낸다.


그 몇 초동안 안경 너머 현우의 눈빛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 오후 세 시. 교사 김현우. 항상 같은 자리.

- 경직된 초조함. 손목시계. 문자 주고 받음.


민아는 또박또박 기록을 덧붙였다.


오래 지켜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차이.

민아는 그 차이를 명확히 알았다.


지난주 우연의 본 현우의 폰 배경화면.

여덟 살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와 한 여인.

김현우는 유부남이었다.


그 문자는 분명 아내에게 보낸 게 아니다.

아내에게 보낼 때의 톤과 지금이 달랐다.

손가락 속도가 다르고 어깨의 긴장이 다르다.


'또각, 또각, 또각'


리듬이 빨랐다. 조금 빨리 걷는 속도.

현우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린다.

그는 알고 있다, 누가 오고 있는지.


문이 열리자,

향수냄새가 물밀듯이 밀려든다.

도발적이면서 유혹적인 냄새.

샤넬인가, 디올인가. 아무튼 비싼 냄새.


커피 향과 섞이니 민아의 머리가 어지러웠다.


박은지가 들어왔다.


오늘 그녀는 평소보다 더 신경 쓴 모습이다.

재킷 안 흰 블라우스는 한 단추 더 풀려 있고

검정 스커트는 무릎 위로 올라 허벅지를 드러낸다.


촘촘한 커피색 스타킹, 새빨간 립스틱.

선명한 그녀의 실루엣이

차분한 카페 분위기와 대조된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은지가 현우 앞에서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한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허스키하지만 촉촉하다.


현우는 모르는 척,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든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현우의 말은 짧지만 시선은 길었다.

은지 얼굴에서 시작해

목선을 훑고 쇄골로 내려와 가슴에 닿았다.

본능적인 시선.


은지도 현우의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되려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들며

굴곡진 몸의 방향을 카운터로 돌린다.


"카푸치노 하나 주세요.

진열장에 있는 치즈 케이크 한 조각도요."


몸에 맞춘 듯 곡선을 드러낸 블라우스와 펜슬 스커트.

풀린 단추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선.

쇄골 사이로 보이는 핑크골드 목걸이.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명품가방.

그리고 도발적인 향수.


날렵한 힐이 가녀린 발목선을 타고 올라오며

은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과 허리, 엉덩이 곡선이 자연스럽게 강조됐다.


신도시 학군지에서 꽤 유명한 인물

학부모 사이에서 '믿을만한 원장'으로 불리고

학원가 네트워크 중심에 서있는 여자.

겉으론 늘 상냥하지만 눈매는 단단한 여자.


학군지의 이슈는 늘 그녀의 입을 통해 퍼졌다.


어느 집 아이 성적이 올랐는지.

그 아이 어떤 학원을 몰래 다니는지.

어느 집안이 이사를 준비하는지.

전교 1등의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는지.


은지의 부드러운 말투로 흘러나오는 순간

사실은 진실이 되고 진실은 곧 소문이 되었다.


"요즘 어떠세요?"


"뭐가요?"


"그냥... 전반적으로요. 집에서나 학교에서"


현우가 잠시 대답을 망설인다.


"똑같죠, 별 다를 게 없어요"


은지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정말요? 저는 요즘 너무 답답해서요.

남편은 맨날 진료 때문에 바쁘고

아이들만 학원에 맡기면 끝이고

저만 늘 혼자인 것 같아요."


혼자.


그 단어가 공기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들의 텅 빈 공간을 채워줄 것 같은 달콤한 말


현우의 얼굴에 묘한 그림자가 스쳤다.

공감 아니면 기회로 받아들이는 건가.

민아는 오늘 무언가 좀 다르다고 느꼈다.


"저도 뭐.... 비슷합니다.

아내는 서울에서 일하느라 주말에만 오고

딸아이는 대화가 없고"


둘의 대화는 표면적으로만 평범했지만

눈빛 아래 흐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묘했다.


"주문하신 카푸치노, 치즈 케이크 나왔습니다."


민아가 테이블로 가져다주자

은지는 고맙다며 미소 짓는다.

그 미소 속에는 계산이 보였다.


거리감 있는 약속된 친절.

중요한 자리에 껴든 불청객에 대한 경계감.

불필요한 대화는 거르고 싶다는 뉘앙스.


민아는 간단히 목례만 하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주위를 살피며 은지가 현우에게 뭔가를 건넨다.

민아는 숨죽여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건... 지난번에 이야기한 자료예요."


하얀 봉투.


비밀처럼 굳게 봉인된 두툼한 봉투.

현우 말고는 이 봉투에 대해 몰랐으면 하는

은지의 눈치. 태도. 표정.


은지의 손끝이 미묘하게 봉투 모서리를 눌렀다.

현우는 봉투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잠깐 동안 겹쳐진 두 사람의 손가락들.


우연인 것 같지만 너무 의도적인 우연.


현우의 표정은 약간 어색하다.

기혼 남성이 다른 여성에게 느끼는 죄책감.


그러나 남성의 본능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자각이 동시에 드러난다.


민아는 노트에 즉시 적었다.


- 박은지, 15:16분 카푸치노 + 치즈케이크, 봉투 전달,

- 현우와 짧은 스킨십, 이상한 기류, 혼자임을 강조


은지는 현우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꼰다.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스커트.

그리고 보이는 은지의 허벅지.


현우의 시선이 그녀의 허벅지로 향하다가

들킨 듯 황급히 커피를 들이킨다.


현우는 조심스레 카페 안을 살폈다.

다른 테이블 손님들, 창밖에 지나치는 사람들.

혹시 학부모 중에 아는 사람이 있을까.

마치 무슨 비밀이 있는 것 처럼.


민아는 노트에 한줄을 추가한다.


- 김현우, 거부와 호응 사이의 갈등

- 은지의 봉투 수령, 유혹에 약함

- 주변 눈치를 살핌.


은지가 낮게 물었다.


"부장님이라면 잘 판단하실거라고 믿어요.

우리...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이상하지 않죠?"


그 말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교사와 학부모 상담.

하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다른 감정,


민아는 알고 있다.

봉투의 무게, 손끝의 떨림.

시선이 머무는 위치와 목소리 톤.

그 모든 것이 말하고 있었다.


민아는 마지막 줄을 기록했다.


- 오늘, 현우와 은지 무언가 시작되었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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