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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01화

프롤로그

신도시

by 안개홍


“난 단지 적었을 뿐이야.

누가 언제 왔는지,

어떤 음료를 좋아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저 단골 손님들의 작은 습관 같은 것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기록들이 모두 연결되더라.

사소한 메모들이 엮여

누군가의 비밀이 되고,

결국엔…


처음엔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아니 정말 몰랐어.

내 노트 한 장이

이 도시를 이렇게 흔들어 버릴줄은.“


- 이 이야기는, 그 무너짐의 기록이다.




서울은 늘 켜져 있었다.


전광판, 야근하는 사무실 불빛,

엘리베이터 층수를 알리는 붉은 숫자.


도심의 술집 네온사인, 지하철 정거장의 푯말까지

밤이 다가와도 절대 꺼지지 않은 도시의 눈동자들.


민아는 그 숨 막히는 눈동자 사이를 걸으며

벅찬 숨을 몰아 쉬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때마다

코로 스며드는 타인의 체취.


골목을 도는 순간 라면집의 기름 냄새,

술집 근처의 담배 냄새.


서울의 눈동자가 내뿜은 빛과 향에 취해

민아의 머리와 코끝을 어지럽혔다.


핸드폰의 알림음은 끊이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 피드백.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얇은 칼날 같은 침묵

그 침목 속에서 민아는 멀쩡한 표정으로 버텼다.


스타트업에서는 속도가 미덕이었다.

'빠르게 실패하고 더 빠르게 개선하자'

이상한 구호가 벽마다 붙어 있는 곳.


민아는 그 말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알았다.


속도는 슬픔조차 빠르게 덮었다.

주변에 누군가가 번아웃으로 쓰러지면

팀은 금세 빈자리를 메웠다.


함박웃음으로 팀 런치 사진을 찍고

해시태그를 달고 헤어지고

같은 날 저녁, 회식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새로운 사람의 환영회를 SNS에 업로드했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메일을 쏟아내고,

밤새 기획안을 갈아엎었다.


코드 리뷰를 빠르게 처리하고,

슬라이드를 보기 좋게 정리했다.


투자 미팅에서 말을 아끼며 밤이 되면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


그녀의 몸은 점점 더 가벼워졌고,

마음은 이상하게 더 무거웠다.


잠도 얇아졌다.

새벽 세시에도 가만히 누워있으면

천장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혁신이라는 이름의 허기 속에서

민아는 점점 말라갔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

연인의 얼굴이 일이 되는 순간.


같은 팀 남자는

민아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도

업무 알람을 확인했다.


"미안한데, 방금 메시지 업무라서 잠깐만..."


그의 눈은 민아가 아닌

업무 대화가 오고 가며 깜빡이는 핸드폰 화면이었다.

그의 말은 정중했고 논리는 온전했다.


마치 스타트업 프로젝트 리뷰 보고처럼.

이별에도 이유가 나열되고

개선해야 할 점이 민아에게 공유되었다.


민아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은 필요하지 않았고 이미 끝난 것들에게

변명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 날 새벽에도 민아는 퇴근하지 못한 채

건물 옥상에서 서울을 바라봤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서울의 숨은 뜨거웠다.


민아는 그 순간 난생처음으로 도망을 생각했다.

달아나야만 산다는 단순하고

야만적인 진실을 직감해 버렸다.


신도시, 세종.


물길이 도심을 사로잡고 호수공원으로 모였고

아파트 단지는 바둑판 돌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민아는 손가락 끝으로 그 도시의 윤곽을 따라 그었다.


낯선 곳이라 좋았다.

누군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

그녀의 실패가 소문이 되지 않는 곳.

그녀의 슬픔이 누군가의 회식 안주가 되지 않는 곳.

야만적인 눈동자와 체취가 그녀를 감시하지 않는 곳.


민아는 모아둔 퇴직금과 위약금을 정리하고

작은 짐을 꾸렸다.

고속도로의 하얀 차선이

저 멀리 구부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서울의 눈동자는 점점 멀어져 갔다.

눈을 떠보니 창밖에는 낯선 도시의 새벽이 서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도 좀 떨어진 상가건물.

1층 구석 코너자리.


유리창 두면이 모두 내다보이는 자리를 계약했다.

민아는 카페 이름을 '시간'이라고 정했다.


촌스럽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지만

민아는 그 촌스러움이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서 가장 잊고 살았던 시간을 감각하는 능력.

기다림이 주는 온도, 천천히 식는 잔.

그 여유로움이 자신과 잘 어울린다고 믿었다.


테이블 여섯 개, 빚내서 들인 커피 머신

꾸준한 매출관리가 먹고사는데 중요하기에

민아는 단골 관리에 공을 들였다.


"아메리카노, 샷 추가, 설탕 X"

"카페라테,시럽 반 펌프, 오전 10:30분 유모차"


취향과 시간, 반복되는 자리.

단골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에게 작은 호의와

특혜를 주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커피 머신 증기 위로 손님 얼굴이

잠시 흐릿해지고 또렷해질 때

손님들은 저마다 표정을 과장 없이 내보였다.

민아는 그것을 적기 시작했다.


손의 움직임, 컵을 받는 버릇.

잔을 입에 대기 전 멈추는 시간.

눈이 어디에 오래 머무는지.

창밖을 볼 때 어깨가 내려가는지.


기록은 서서히 관찰이 되었고

관찰은 다시 단골들의 증거와 사건이 되어갔다.


탄력 있는 고무줄이 쫙 당겨 덮개로 이뤄진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공책.


민아는 그 증거에 이름을 붙였다.

말끔하고 중립적인 단어 하나, '단골노트'


단골들의 습관이 사건이 되는

그 순간을 민아는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기록이 사람 관계를 구성하고 고정하는 방식.


그러나

민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 도시가 그녀를 쉬게 하러 불러들인 게 아니라

보게 하러 불러들였다는 것을


그녀의 작고 검은 노트가

언젠가 이 도심의 숨을 찢을 칼날이 되리라는 것을.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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