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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05화

퍼즐

by 안개홍


일요일 오전 10:07


카페의 OPEN 표지가 유리문 안쪽에서 빛을 갈랐다.

스팀완드가 짧게 숨을 내쉬고

첫 샷의 크레마가 잔 위로 차오른다.


민아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입천장에 쓴맛을 눌렀다.


지난 며칠을 한 번에 삼킨 듯

불면은 맛을 둔하게 만든다.


민아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감정의 끝이 항상 닳아 있듯.


오늘은, 어떤 결론에 닿아야 한다.


이름을 알아야 한다.

이름이 붙는 순간,

사물은 비로소 명확해지니까.


피곤해서 정신이 몽롱했지만

노트 펼치고 그 위에 선을 긋고,

이름을 가지처럼 뻗어 적었다.


오늘 날짜 위로,

지난 며칠의 잔향이 겹겹이 붙었다.


- 김현우 : 으뜸중 학생부장, 은지 봉투. 은지와 불륜?

- 박은지 : 학원원장, 현우 봉투 전달, 의도된 접촉?

- 오지훈 : 러너, 23:40 자택 약속, 상대 유부녀

- 은서엄마 : 새끼손톱 보라색, 오지훈 내연녀


그 아래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빈칸 하나가 있었다.

- ( ) : 은서엄마를 언급한 단골은 누구?

은서엄마.


민아는 펜 끝을 노트에 둔 채 기억을 더듬었다.

그 단어는 최근 이틀 동안 여러 번 카운터를 스쳐 갔다.


“은서 엄마가요—”,

“은서 엄마는 아침엔 커피를—”


분명 내 단골 중 누군가가

자연스레 꺼냈던 호칭.


어떤 날의 아메리카노였고

어떤 시간의 수다였으며

어떤 표정의 농담이었는데

누가 그 말을 했는지만 비어있었다.


마치 완성 직전의 퍼즐에서

단 한 조각을 찾지 못해

전체 그림이 흐릿해지는 것처럼.


이름 하나가 빠지자

모즌 기록이 미세허게 흔들거렸다.

민아는 노트의 모서리를 엄지로 비볐다.


그 다음은.

하얀 봉투.

단어 하나의 무게가 마음을 누른다.


시험지 유출? 돈? 아니면....

비밀 만남을 위한 은밀한 암호?


분명 현우의 눈빛은 부정과 호응 사이.

은지의 손끝은 현우의 어깨와 봉투 모서리.


그 장면이 밤마다 반복재생됐다.

그 장면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질문으로 엉켜있었다.


현우와 은지, 그리고 봉투

아슬아슬한 스킨십

은지의 '오늘 밤 안에' 어조


지훈과 은서 엄마.

지훈의 "23시 40분" 낮고 설레는 목소리.

그리고 은서엄마랑 친한

이름이 없는 단골


두 개의 선이 따로 구르다가

같은 원으로 겹쳐지는 기분이다.

머리가 지끈거리자 민아는 노트를 덮었다.


오픈 준비를 하며 스팀완드가 빈 김을 뿜자

하얀 연무가 카운터 앞을 잠깐 덮었다.


그 가늘고 뜨거운 막이 걷히면

오늘도 누군가의 표정이 또렷해질 것이다.


민아는 보고, 듣고, 또 적을 것이다.

몰래 그들의 흔적들을 수집할 것이다.




주말 오전의 느슨함이 카페를 채웠다.

창 너머 유모차 바퀴가 한번 지나가고

강아지 줄을 감싼 손이 한번 더 지나갔다.


의자 다리의 긁히는 소리,

우유 스팀의 치직거림.


아이스크림 쇼케이스를 열 때 나는

얇은 흡착음까지.


일요일의 소리는 평일보다 둥글었다.


‘띠리리링—’ 풍경이 울린다.


"어서 오세...."

민아는 출입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세 사람.

김현우,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한 아이.


현우의 표정은 평소의 단정함이 묻어있다.

옆의 아내는 좁고 곧은 어깨.

탄성이 느껴지는 허리선과 라인..

단정하면서도 묘하게 시선을 붙잡는다.


현우 아내의 낮은 굽의 로퍼가

바닥에 조용한 리듬을 찍는다.


표정은 무심에 가까운데

오히려 무심이 눈길을 끌었다.


"편한 자리 앉아. 오전이라 덜 붐벼"

현우가 말했다.


오전을 강조하는 습관적 말투.

현우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 새벽에 끝내고 내려오길 잘했네.

라운딩 있으면 못 왔지."


현우 아내가 말하자 현우가 웃는다.


"그치, 인계도 빨리 끝냈다며?"


"응, 응급콜도 없었고"


민아는 현우와 현우아내의 그 짧은 대화에서

언급된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라운딩, 인계, 응급콜.


현우 아내가 직업을 말하지 않아도

민아는 그녀의 직업을 알아챌 수 있었다.


서울에서 주말마다 내려오는 여자.


주말, 늦는다, 현우의 입에서 나온

그 조각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민아의 노트한 줄이 조용히 채워졌다.


- 현우아내 직업, 서울 대학병원 간호사.


“주문 도와드릴게요.”


민아가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현우가 익숙한 듯 고개를 들었다.


“아메리카노 뜨겁게, 샷 추가요.”


여자는 메뉴판을 짧게 훑더니,


“라테, 우유 적게요.

아이는… 락토핏 초코우유 가능할까요?”


현우가 웃었다.


“앨러지 때문에 우유 많이는 못 먹어서요.”


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를 데우는 동안

민아는 시선을 잠깐 테이블로 던졌다.

세 사람의 거리가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부부의 어깨는 닿을 듯 말 듯,

아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즐겁게 장난치고 있었다.


사진으로 찍어도 ‘가족’이라는 제목이

전혀 흔들리지 않을 프레임.


그럼에도,


현우와 은지가 주고받은 봉투가

데자뷔처럼 떠올라

민아의 속이 미세하게 뒤집혔다.


‘치지익—’ 스팀 소리.


민아는 라테의 거품을 얇게 눌러 결을 정리했다.

컵을 쟁반에 올릴 때 손끝이 떨렸다.


오늘은 무엇을 보게 될까?


그 떨림이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주문한 음료를 테이블에 놓는 순간.
현우의 아내의 손이 먼저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그 손이 민아의 시야 중앙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조용히. 정확하게. 멈췄다.


- 가녀린 손목.

- 다섯 손가락.

- 정갈하게 깎인 손톱.

- 과장 없는 길이.

- 거의 투명한 윤기.

- 새끼 손톱.

.

.

.

- 보라색 네일.


민아는 순간적인 현기증에 어지러웠다.

몸 안의 어딘가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새끼손톱.

지난밤 엘리베이터에서 본.

보라색 네일.


민아의 심장이 출렁거리며

한 박자 늦게 크게 내려앉았다.


김현우 아내는.

바로, 오지훈의 내연녀.


그녀가 쟁반을 받고 테이블로 돌아갔다.

민아는 카운터에 선 채 천턴히 호흡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처럼 도달한 결론일까?


뇌가 먼저 결론을 내리며

몸을 끌고 가는 기묘한 감각.


가슴에서 올라오는 맥박이 민아의 귓속을 쳤다.


“천천히 마셔. 뜨거워.”


여자가 아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은서야, 컵 잡을 때 조심.”


은서.


이름이, 칼날처럼 정확하게 꽂혔다.
보라색의 끝에서 이름의 시작이 또렷해졌다.


민아는 눈을 감았다 떴다.


현우-은서-은서엄마
그리고 어젯밤의 지훈.


민아는 눈을 깜빡였고,

세상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테이블 모서리,

여자의 단발이 스치는 각도,
목덜미에서 시작해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선.


눈에 들어온 그여자의 모든 것이 묘하게 또렷했다.


오지훈의 내연녀. 김현우의 아내.
그리고 은서의 엄마.


어젯밤 조각들. 호수공원의 안개.

엘리베이터의 잔향이 모두 한 점으로 수렴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쟁반 가장자리를 잡고 있던 오른손의 힘이 빠졌다.

스테인리스가 쿠르릉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민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어지러움이

또 한 번 파도처럼 민아를 타고 지나갔다.


민아는 우연하게 그들의 비밀과 관계를 알아버렸다.


이 얽힘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봉투였나. 아니면, 향이었나.


아니면, 엄마가 아이 이름을 부르는

그 아주 사소한 한 음절이었나.


민아는 고정된 카운터를 붙잡고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손님들은

민아의 미세한 동요를 알아채지 못했다.


"사장님, 물티슈 한 장 더 있을까요?"


현우의 아내 목소리가 카운터로 닿았다.

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현우 아내의 손을 쳐다봤다.


민아는 그녀의 손을 보며

하룻밤 전 엘리베이터를 떠올렸다.


그녀는 모자를 눌러썼고, 선글라스를 내렸다.

은서가 잠에서 깨어 전화를 받았고,

13층 오지훈의 집을 눌렀다.


그 모든 장면이 지금 내 앞에서

보라색 네일과 은서 이름과 한 덩어리가 되었다.


민아는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종이 위에 작고 또렷하게 적었다.


- 현우의 아내 = 지훈의 내연녀. 이건 사실이다.


펜 끝이 종이를 살짝 파고들며 잉크가 굵어졌다.

민아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민아는 은서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치 액자 프레임에 갖힌 가족사진

그 주연들의 엉킨 비밀 속에서

은서는 또 행복할 수 있을까?'


현우의 아내의 비밀.

그 다음은?


다음은 봉투다. 현우와 은지의 봉투.

민아는 알아야만 했다.


돈, 시험지, 아니면 날짜와 장소가 적힌 고백편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더욱 민아를 앞으로 밀었다.


‘띠리리링—’


문이 다시 열린다. 누군가 들어온다.
공기가 한 톤 높아졌다. 밝고 기름진 향.

민아는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


“은서 안녕~”

카페 안을 통통 튀는 목소리가 채웠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현우의 딸 은서가 반갑게 그 여자를 쳐다본다.


현관을 보자 순간적으로 표정을 정리하는 현우.

그 찰나의 순간,

그녀에게 향하는 현우 아내의 눈길.


민아의 심장은 한 박자 더 빨라졌다.


민아는 숨을 멈추고 노트를 다시 펼쳤다.

펜을 쥔 손이 부러질 듯 힘을 먹었다.


아주 작은 글씨로 노트에 붙였다.

오늘의 마지막 줄을.


- 일요일, 오전 10:10분. 현우와 현우아내, 은서.


그리고


- 학원원장 박은지 등장.


'또각, 또각, 또각'


은지의 발걸음이 현우네 가족으로 향했다.


민아는 펜을 놓지 못했다.

손끝에서 땀이 났다.


이제 모든 퍼즐 조각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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