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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06화

봉투

by 안개홍


일요일 10:18분, 민아의 카페 '시간'


박은지가 다가온다.

민아는 카운터 뒤에서 숨을 죽였다.


은지가 현우 가족 테이블로 걸어가는

그 발걸음이 평소와 달랐다.


더 천천히, 더 의도적으로.

마치 무대 위를 걷는 배우처럼.


현우가 은지를 발견하는 순간,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커피 컵을 든 손이 살짝 떨렸다.

민아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머, 소영 씨!"

은지의 목소리가 밝게 울렸다.

현우 아내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는 은지.


소영이 고개를 들어 은지를 바라봤다.

"아, 원장님. 안녕하세요. 여기서 만나네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필라테스 수업 그만둔 이후 처음이네요."


"맞아요. 그때가 언제였죠? 작년 가을이었나..."


현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아내가 은지와 원장과 학부모가 아닌

생소한 공간에서 서로 아는 사이였다니,

현우는 처음 알았다.

그 사실이 현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소영 씨, 은서가 이렇게 컸구나."

은지가 은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게 현우네 테이블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


민아는 노트에 재빠르게 적었다.


- 은지 접근. 현우 아내. 이름 소영. 필라테스 인연.


"소영 씨,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오시는 거 정말 힘드시겠어요."

"괜찮아요. 이제 뭐 익숙해요"

소영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현우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와이프가 고생 많이 해요."


"현우 선생님이 자주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내분 자랑을~"

은지가 현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현우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언제 아내 자랑을 했나?


은지의 묘한 시선이

'우리만의 시간'을 암시하고 있다.


그 시선 속에서

현우는 어젯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소영은 그 대화를 들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이 자신 자랑을 했다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언제 은지가 남편을 만났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소영도 지훈과의 만남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고 남편을 의심할 여유가 없다.


은서는 테이블에 놓은 포크를 만지작 거리다

엄마를 힐끗 바라봤다.

어젯밤 늦게 깬 기억이 스쳐간 듯,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원장님도 밤늦게 집에 오고 나가나요?"

어른들 대화 사이로 파고든 은서의 질문에

공기가 묘하게 흔들렸다.


"은서야..."

현우가 당황스럽게 말을 막으려 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 순간,

은서는 덧붙였다.


"어른들은 원래 밤에 바쁜건가요?“


아이의 순진한 관찰.

그 관찰이 테이블 위를 얼어붙게 만든다.

소영은 은서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말을 막으려 했지만,

테이블 위 숨이 잠깐 멈췄다.


"아~ 그랬구나.

은서가 밤에 아빠 엄마가 없어서 무서웠구나!

어른들은 가끔 밤에 일을 하기도 해~“

은지가 현우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선생님, 많이 바쁘시죠? 요즘 상담도 자주 하시고..."

'상담'이라는 말에 특별한 강조가 있었다.

현우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그게... 학교 일이 많아서..."

현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도 자주 상담하니까 잘 알죠."

은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자주'라는 단어에 이중적 의미가 담겼다.


소영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도 요즘 마음이 불안정하고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다.


민아는 펜을 더 세게 쥐었다.

은지의 말투, 현우의 반응.

모든 것이 평소와 달랐다.


- 은지와 현우, 어젯밤 만난 것 같다. 추측. 봉투의 비밀이 풀렸나?

- 당황하는 소영. 지훈과 만남 23:40분 어젯밤.


현우의 머릿속에 지난밤이 되살아났다.




어젯밤. 토요일 저녁, 7시 32분

현우의 집, 으뜸마을 1003동 904호


아파트 거실은 방금 꺼낸 전등처럼 어둡다.

현우의 손에 든 것은 하얀 봉투 하나.


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봉투 모서리를 더듬었다.

미세하게 접힌 종이의 산과 골이 만져졌다.

촉감만으로도 그가 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을지 말지,

손끝에서 투표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거실의 벽시계가 1분을 밀어냈다.

거실 창문 사이로 좁은 빛이 흘러서

정중앙에 위치한 가족사진에 비춘다.


은서는 오늘도 행복하게 웃고 있다.

현우와 소영이 웃고 있는 그 가운데서.


현우 휴대폰 화면에는

소영의 마지막 문자가 고정돼 있었다.


'퇴근 조금 길어질 듯. 새벽에 내려갈게.'


서울 대학병원.

소영은 늘 늦는다고 했고,

오늘도 늦는다고 했다.


현우는 봉투를 식탁 위로 옮겼다.

앉으면 더 약해질 것 같아 서서,

칼날 대신 손톱으로 봉합선을 천천히 찢었다.


종이가 낮게 울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네 장.


첫 번째,

전학 관련 교장 추천서 초안.

추천 사유 칸에는

‘가정 형편 및 교육 환경 개선’ 이라는 단어가

이미 타이핑돼 있었다.


은지 아들의 전학 관련 서류.

같은 생활권 내 전학 금지 규정을 우회하는 방법.

현우가 학생부장으로서 서류를 조작해야 할 부분들.

명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빈칸 채우는 작업.

현우의 사인이 들어갈 자리엔

누군가 치수를 잰 듯 정갈한 여백이 남아 있었다.


두 번째,

학폭 사실확인 경위서.


현재 으뜸중 전교 1등인 학생을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아

전학을 보내자는 철저한 계획.


현우는 제목만 읽어도 속이 뒤집혔다.

대상 학생 칸은 비워져 있는데,

누군가의 얼굴만 현우의 머릿속에서 또렷했다.


아래쪽 포스트잇에는

‘전교 1등, 체육 시간 사건 프레임’이라고 적혀 있다.


서술 예시가 붙어 있었다.

‘… 떠밀렸다’ ‘… 반복적 괴롭힘’

‘… 학부모 민원 고조 예상’.

탄환처럼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문장 끝마다 점이 무겁게 박혔다.

이걸 제출하는 순간,

누군가의 인생이 꺾일 것이다.

현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세 번째,

얇은 호텔 메모지.


손가락만 한 종이의 상단에

작고 예쁜 여자의 글씨가 묵직하게 적혀있다.


9월 6일 (토), 21:30

엠베서더 호텔, 1203호실


그리고 볼펜으로 덧댄 짧은 문장.

'중요한 선택.'


네 번째,

은지의 짧은 손 편지.


'부장님, 아이 문제로 시작하지만.

제 마음이 더 불안하고 초조한 건 사실이에요.

선생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우리, 같은 편이 되면 서로를 지킬 수 있어요."


손끝이 식었다.

같은 편. 편을 나누는 순간,

교사는 사라진다. 현우는 아빠이기도 했다.


교사이면서 아버지인 사람은

가장 먼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잠깐, 믿음이 흔들렸다.


현우는 경위서를 맨 아래부터 읽었다.

어떤 물건도 윗부분부터 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결론이 보이면 머리가 멈췄다.


하단에는 ‘학폭위 개최 권고’가 있다.

권고. 제법 온화했지만 칼날같은 말.

‘권고’는 ‘압박’의 다른 말이었다.


그렇다.


은지의 아들

으뜸중학교 전교 2등

그리고 피해자는 으뜸중학교 전교 1등

현우가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 준

한부모 가족의 아이


부족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늘 밝고 교우관계가 좋았던 아이.

형편은 여유롭지 않았던 아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를 잘해 의사가 되어

엄마를 호강시켜 주겠다고

학원 하나 안 다니고 새벽 2시까지

오롯이 혼자서 버티던 아이.


은지와 은지 아들에게

그 아이는 걸림돌이었다.


자사고 입학 학교장 추천서

은지가 그토록 갈망했던 종이 한 장.


학군지에서 의사 사모로 누리던 혜택

은지의 피조물은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만이 답이었다.


걸림돌을 치우고 싶었던 거다.

재력과 학력,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한없이 약하고 부족한 아이를

집어던지고 싶었던 거다.


높은 확률로 으뜸중학교를 비롯해

학군지 안 권력과 세력들

그들의 합작과 지원으로

이 시나리오가 태어난 거다.


현우는 은지의 철저한 계획과

어른들의 폭력이 무섭고 두려웠다.


“부장님, 오늘 밤 안에 답, 들려주세요.”


낮의 카페,

흰 잔 가장자리에 입술이 닿던 그 순간,

은지의 목소리가 물 위로 떠올랐다.


3초, 어깨에 얹힌 손. 봉투 모서리의 압력.

유혹은 말로 시작해, 접촉으로 완성된다.


현우는 그 메커니즘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식탁에 서 있다.


식탁 반대편 의자에 걸린

은서의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 포켓에 분홍색 머리끈이 삐져나와 있다.

은서의 숙제장에는

받침이 틀린 ㅅ이 널려 있다.


그 ㅅ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

그 자리는 한 번 비면 끝난다.


반대로 교사의 자리도 그러하다.

한 번 엎으면, 다시 곧지 않았다.


현우는 펜을 들었다.

잉크심이 종이를 간질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명을 한다는 건, 결정을 하겠다는 뜻.


은지가 준 봉투 안 서류 중 하나.

펜촉이 종이를 미세하게 깎아냈다.

현우의 이름이 검게 눌렸다.


표정이 없어야 했다.

표정이 들어가면 기계가 멈춘다.


끝.


사람은 가끔 이런 흠을 만든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흠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현우는 다리가 풀린 듯

축 처진 어깨로 털썩 의자에 앉는다.


펜을 내려놓았을 때,

손바닥에 잉크가 가느다란 검은 선으로 묻어 있다.

흔적은 늘 그가 닦지 못한 곳에 남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호텔 메모지.

오늘 밤, 9시 30분.


현우는 휴대폰에 엄지를 얹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밤은 말없이 흘러야 한다.

말이 끼어들면 누군가 깨어나고,

깨어난 누군가는 질문을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오는 동안

현우의 심장은 속도를 쪼갰다.


'웅웅- 하는 엘리베이터 기계음'

현우의 심장박동을 더 증폭시킨다.


지하주차장에 내려가자,

가지런히 정렬한 차 안에는

누군가가 현우를 감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


맞은편 차의 유리창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어색한 남자, 교사였던 남자.

은서의 아빠, 소영의 남편.

으뜸중학교 학생부장.

올해 교육청 추천 최고의 선생님.

개천에서 용 나듯 아이를 케어한 참스승


오늘 밤 이후엔 무엇으로 불려야 할까.


도로는 깔끔했고,

내비게이션은 생각보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엠베서더 호텔 조명은 마치

'비밀은 감추겠다'라고 말하는 듯 은은했다.

1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카펫은 현우의 발을 낮게 끌어당겼다.


1203호.

문 앞에서 현우는 손등을 세웠다.


문 손잡이 위

출입카드 태그조명이

은밀한 비밀을 감지한 듯

초록색으로 반복해서 깜빡인다.


'똑똑...'


노크 소리 두 번.

안쪽에서 나는 카펫 끌리는 소리.

노크 소리에 바로 반응하는 인기척.

잠깐, 그리고 열린다.


"오셨네요."

은지는 기분 좋을 때보다 더 조용히 웃고 있다.


은지는 기분 좋은 사람의 수다 대신,

계획이 맞아떨어진 사람의 침묵을 갖고 있었다.


현우는 그 차이를 배운 지 오래였다.


"들어오세요."


어두컴컴한 호텔방


모든 비밀을 감추는 호텔의 조명도

결코 그녀의 굴곡은 가릴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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