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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07화

호텔

by 안개홍


'끼이이익-'



호텔문이 닫히는 소리가 카펫에 흡수되고,

남은 공기는 은지의 달콤한 향과

벽에 스민 세제냄새.

호텔 특유의 눅진한 먼지냄새로 가득 찼다.


비싼 냄새.


침대 위,

새 시트를 깨문 듯이 팽팽한 하얀색

실날 같은 에어컨의 기계음이

차가운 바람을 자른다.


유리창은 두 겹으로 겹쳐져

도로 밖 소음을 차단하고 있어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야경만

방 안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현우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빛은 비어 있었다.

마치 영혼의 일부를 복도 어딘가에 내려놓고

들어온 사람처럼.


은지는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발목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여 현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미간은 평소처럼 고요했지만,

숨이 닿는 거리쯤에선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은지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오늘, 선을 넘는 말은 가급적 늦게 꺼내야 했다.


현우가 코트 안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툭, 침대 위로 던졌다.


종이가 시트 위에서 짧게 미끄러지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 얇은 파문이 방 안의 정적을 깨고,

은지의 시선이 봉투에 내려앉았다.


얇은 웃음.

만족이라는 이름의 얇은 선.


"결정하셨네요."


은지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손을 뻗었지만 봉투를 바로 열지 않았다.


확인이란, 때로 가장 잔혹한 의식이니까.

확인하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에 턱 하니 이마가 닿을 듯 멈춰 섰다.


저 아래로, 일상은 별 탈 없이 흘러가고 있다.

빨간 신호, 좌회전 깜빡이. 횡단보도 건너는 연인.

평범함은 잔인할 만큼 무심했다.


은지가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종이를 뽑아 들고 한 장을 펼쳤다.


'학교장 추천 전학 신청서'


현우의 서명이 검게 눌려 있었다.

날짜, 직인 자리, 결재 칸.

어디에도 지워지는 잉크는 없었다.


"역시 이걸 택하실 줄 알았어요."


은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교 1등 학생을 건드리지 않고, 우리 준호만."


현우가 돌아섰다.

눈동자에 비친 야경의 불빛이 흩어졌다.


"모두를 위한, 그게 최선입니다."


"현명한 결정이죠."


은지의 말에는 '당신'이 아니라

'우리'라는 주어가 숨어 있었다.


말끝이 아주 가볍게 미소를 끌어올렸다.

함께 책임질 듯 말하는 톤.

공감을 가장한 협박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씁쓸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혀 밑에 엉겨 붙었다.

선택이라는 이름의 강요,

자유의지라는 이름의 조작.


서류는 늘 '절차'를 품고 있지만

절차는 언제든 '결과'를 위해 고안되었다.

교육 현장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방 안에서도.


"이거 처음부터 다 계획된 일입니까?"


현우의 어조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의심이 결론을 만난 사람의 목소리였다.


은지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남편의 계획이에요, 방법을 잘 아니까요.

어떤 선택지를 놓아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미는 게 유리한지..."


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처음부터 조종당한 겁니까?"


"아니에요."


은지가 바로 부정했다.


"선택은 선생님 몫이었죠.

다만... 선택지를 선명하게 보여줬을 뿐."


선명.


선명한 유혹, 선명한 압박, 선명한 책임.

선명하다는 건 곧 미안하다는 뜻과 닿은 건가,

현우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그럼 이 만남도 남편 계획입니까?"


현우는 정면으로 물었다.

이 방의 공기, 묘한 분위기까지

은지 남편의 설계도 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은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눈의 초점이 잠깐 흔들렸다 돌아왔다.


"아뇨. 이건 제 선택이에요. 저를 위한."


"자신을 위해..." 현우가 되물었다.


"어떤 자신을요?"


은지는 창밖을 한 번 스쳐봤다.


"남편의 방식은.... 늘 차갑죠.

늘 잔인하고 계산적이고, 잔여물이 없어요.

저는 다른 방법을 원했어요."


"그래서 저를 이용한 건가요?"


현우 말끝이 날카로워졌다.

날이 서 있다는 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은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빛이 잠깐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미안함과 필요함. 동정과 이용.


모순된 감정들이 서로를 밀어내지도

완전히 끌어안지도 못한 채

은지의 눈동자에 겹겹이 얹혔다.


현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호텔의 공기가 갑자기 두꺼워졌다.

가슴을 누르는 건 공기인지

봉투의 무게인지, 아니면 자신의 선택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볼일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현우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은지가 불렀다.


"현우 씨!"


은지의 부름에 현우 이름이 방 안에 잠깐 울렸다.


은지가 호칭을 부르지 않은 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기록에 남는 건 호칭이 아니라

그날의 날짜와 감정이니까.


현우가 멈췄다.

은지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쳤다.

처음 보는 그녀의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은지는 구두를 벗고 카펫 위를 걸었다.

천천히 느린 걸음이었다.


느리다는 건 상대에게 돌아갈 시간을 주는 것이고

동시에 되돌아가지 못할 이유를 만들기도 했다.


은지는 현우 앞에서 멈췄다.


가슴이 닿을 만큼, 닿지 않을 만큼의

가까운 거리


"오늘, 약속은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속삭임이 현우 귓바퀴 곡선을 타고 들어왔다.

그 말에는 돌이킬 수 없는 종결부가 붙어 있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현우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알고 있다.

은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은지가 말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밖으로 새어 나가는지.

누군가는 결국 말하고, 소문은 모양을 바꾸고

끝내는...."


은지가 말끝을 흐렸다.


"우리 둘 다 끝이에요. 선생님은 교직을, 저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현우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스쳤다.

망설임은 허용의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말로 한 약속은 쉽게 떠나고 깨져요."


은지의 음성이 한 톤 낮아졌다.


"몸으로 새긴 비밀은... 잘 깨지지 않죠.."


조용한 정전.

그 말은 이방에서 유일하게 켜둔 조명이었다.


현우가 반 걸음 물러서자,

은지가 바짝 반 걸음 다가왔다.


"우리가 진짜 공범이 되는 거예요."


은지가 속삭였다.


"서로의 비밀을 완전히 공유하면....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수 없죠."


현우의 심장이 빨라졌다.

두려움인지, 다른 감정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에어컨 소음이 처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기계음이 리듬을 갖기 시작하면

사람의 숨결도 그 리듬을 따라 흐른다.


은지의 한 손이 현우의 목덜미에 오른다.

다른 손이 넥타이를 풀었다.


단추 하나, 두 개. 매듭이 느슨해지자

그 안의 체온이 가볍게 쏟아졌다.


"우린 서로를 공유하고 증명하면 돼요."


은지가 말했다.


증명.


교무실에서 가장 흔하고, 법정에서 잔혹한 말.

비밀을 만드는 건 말일수도 있지만

그 비밀을 지키는 건 함께한 사실.


은지의 입술이 닿자,

현우의 마지막 저항은 물안개처럼 부서졌다.


죄책감과 설렘이 뜨거운 언어로 섞였다.

핑계는 모두 침묵했고

핑계의 자리에 가쁜 호흡이 놓였다.



거친 숨이 방 안을 밀고 들어왔고

현우와 은지의 윤곽선이 요동쳤다.

숨결은 방향을 만들었고

몸은 그 방향을 순수히 따라다녔다.


현우의 허리가 파묻히듯 깊게 들어가자,

은지의 어깨선이 움츠려 조여들었다.

현우의 손끝이 은지의 곡선을 기억했다.


사람의 몸에도 지도가 있다.

지도는 길을 잃게 하기도,

길을 열어주기도.

오늘은 한쪽이 길을 열고

다른 한쪽이 길을 잃는 밤일 것이다.

아니면 길을 잃고 방황할지도 모른다.


멈춰 있던 시간의 축이 다시 돌아간다.

빠르게도 느리게도 아닌. 그 방안의 속도로

두 개의 축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순간,

짧고 얕은 숨이 이따금씩 터졌다.


숨과 숨 사이에 낮은 목소리

부서지는 이불의 마찰음.

가볍게 흔들리는 커튼.

파르르 얇게 떨리는 천장조명.

외부로부터 시간은 밀폐되었고

둘만의 체온으로 호텔방은

심장처럼 뜨겁게 오르고 뛰었다.


허락과 충동. 타협과 요구가

눈빛과 손의 압력으로 오르내렸다.

말없이도 더 명확하고 분명한 대화.


그 리듬에 맞춰 짧게 끊어 터지는

비명처럼 억눌렸다 터진 은지의 교성.

숨이 멎을 듯한 그녀의 신음 사이로


증명, 약속, 비밀, 은밀함, 서명


다급함과 초조함과

설렘과 충동과 쾌락을 닮은 활자들이

파도처럼 두 사람에게 밀려왔다.


침대와 벽 사이에서

이불과 시트 속에서

현우와 은지 사이로

그 파도는 찰싹 부딪쳤다가

다시 안으로 밀려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쿵-


전교 1등 아이의 성적표.

칸마다 만점의 숫자가 가지런히 놓인 종이.

그의 양심을 짓눌렀던 무거운 돌덩이.

교실 형광등의 미세한 깜박임.

전국석차를 보며 짓는 아이의 함박웃음.

그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밀려나갔다.


쿵-


메아리처럼 울리는 교감의 목소리.

"김 부장은 다 좋은데 정무적 감각이 부족해.

굽힐 때는 확실하게 굽히는 게 정답이야."

그 말이 채찍처럼 등 뒤에서 날아와

현우를 더 깊이, 더 강하게 파고들게 했다.


쿵-


학군지 권력자들. 교장, 학원협회장.

장학사. 학부모 대표. 지역구 시의원.


회의실 생수병, 빠르게 출력하는 프린트.

가끔 들리는 '네, 알겠습니다.'

그것은 동의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은지의 곡면 위로 나타났다 산산이 흩어진다.


누군가의 웃음이. 누군가의 무표정이.

누군가의 손목시계가 은지의 허리선에 겹쳤다.

겹치고 흘러내리고 사라졌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때마다 은지의 다리는 뱀처럼 감겼다.


뒤엉킨 현우와 은지의 곡선이

새하얀 매트리스 위에 굽이치면서

호텔 커튼에 비친 그림자가 되어

아래위로 춤을 췄다.


그 불규칙한 리듬에 맞춰서

은지의 팔이 현우의 등 뒤를 감싸 안았다.

현우는 서류에 각인된 자신의 이름이

종이 위에 서서히 선명해지는 장면이 아른거렸다.


압박. 굴복. 그리고 정복.


그것은 단순한 육체의 점령이 아니었다.

공범의 말없는 증거가

쾌락과 뒤섞여 폭발하고 있었다.


현우는 깨달았다.

지금 정복하고 있는 건 단순히 한 여자가 아니다.

은지라는 이름 뒤 권력, 학군지의 질서.


은지의 미간이 떨리고

젖은 입술이 열릴 때마다,

그를 짓눌러 온 권력 구조 전체를

짓밟고 오르는 듯한 환각에 잠겼다.


욕망의 이름으로. 권력의 이름으로.


현우의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침대 헤드가 벽을 두드리면서

둔탁한 북소리로 울려 퍼졌다.


그 묵직한 울림은

서류철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처럼 현우의 귓속을 후벼 팠다.


절정에 다다른 순간,


현우는 은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은지의 확신 어린 시선이 현우에게 닿는다.


전교 1등의 성적표, 교감의 목소리,

권력자들의 얼굴.


그 모든 것이


은지의 황홀한 표정에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현우는 그 잔해 위에서

자신이 권력의 꼭대기에 선 듯한 희열에 휩싸였다.


범죄와 욕망, 선택과 타락.

두 단어가 동시에 봉인된다.


서류에 찍힌 현우의 서명,

침대 위 거친 움직임.

그것은 공범의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종이에 서명했을 때보다 더 무겁게,

현우는 은지에게 묶여 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섹스가 아니었다.

현우가 저지른 선택의 무게.


그 서류의 문장 하나하나가

현우와 은지의 몸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낙인으로 새겨졌다.


고요함.


에어컨 기계음이 다시 또렷이 들린다.

호텔 냄새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커튼은 아주 조금 흔들리고 있다.


‘징-징-징-‘


고요함을 깨는 휴대폰 진동소리.

현우와 은지가 나란히 누워 숨을 고를 때,

테이블 위 놓여진 휴대폰 화면에 뜬 그 이름


발신자. 은서

현우가 가장 사랑하는 딸.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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