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아빠!"
잠시 머뭇거리다 현우가 전화를 받았다.
어린 은서의 목소리가 통통 튀듯 번졌다.
소영은 은서 옆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휴대폰 화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휴대폰 상단 알림 창에
23:40의 숫자, 고정된 이름 하나.
오지훈
"아빠 언제 와?"
은서의 졸린 목소리.
수화기 너머 현우의 목소리가
'아빠가 금방 갈게'라며 말끝은 다정했지만
호흡은 가벼운 비상처럼 흔들렸다.
소영은 은서를 보고 씽긋 웃으며
은서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아빠 오실 거야!
얼른 자자~ 우리 공주님~"
은서의 방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소영의 핸드폰에선
지훈의 이름이 계속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삑—삑—삑—삑.”
현관 전자음이 네 번, 일정한 박자로 울렸다.
문이 열리자 현우가 들어왔다.
집안 공기는 곧장 삶의 냄새를 풀어냈다.
개어 놓지 않은 빨래에서 스며 나온 눅눅한 습기
싱크대 위 쌓인 그릇에서 나는 음식물 잔향,
바닥 모서리 뭉친 먼지에서 피어오른 마른 흙내.
그런데 그 틈을 파고든 건, 낯선 잔향.
세탁 냄새, 눅진한 카펫 냄새
평소 현우 몸에서 나지 않던 냄새.
소영은 아주 잠깐 코끝을 스쳤다가
그 냄새를 다시 확인하려다, 스스로 시선을 돌렸다.
'괜히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어.'
그 한마디가 입안에서 부서지듯 흘렀다.
“많이 늦었네.”
“집안일이 이렇게 남아 있으면, 부담이 커.”
소영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오늘 상담이 길어졌어."
현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짧게 대꾸했다.
짧은 변명이었지만,
어조 한 귀퉁이에 조심스러운 긴장이 붙었다.
소영은 굳이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서로의 하루에 때로는 설명을 삼키는 것을,
'부부'라고 배웠다.
은서 방 문틈에서 얕은 숨이 흘렀다.
“은서, 방금 전에 잠들었어.”
소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싱크대에서 쏴-하고 떨어진 물줄기가
스테인리스 표면에 닿아 고독을 깬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냐고만 묻고 싶었어.”
소영이 말했다.
“응. 좀 바빴어, 상담 좀 하느라...”
현우가 짧게 답했다.
대화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은 채 흘렀다.
"아무리 바빠도, 은서는 좀 잘 챙겨야지."
소영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도 힘들어.
당신은 서울에서 바쁘다는 핑계만 대잖아.
근무 끝나면 전화도 잘 안 받고.
당신이야말로 은서랑 나 안중에도 없는 거 아냐?"
평소답지 않게 현우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소영은 한 박자 쉬고 목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해, 은서 깨겠어.”
소영은 현우의 셔츠에서
아주 얇은 다른 향이 섞여 있는 걸 감지했다.
자주 맡던 생활세제와 파우더 냄새,
그 뒤에 아주 희미한 다른 톤.
'내가 예민한걸까...'
답답한 마음에 소영은 거실 불을 켰다.
빨래 그림자가 눅눅해 보였고
바닥에 앉은 하얀 먼지들이 점처럼 도드라졌다.
소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숨 막혀...'
병동에서 병간호에 지친 가족이 내뱉던
한숨 섞인 그 말.
불평과 설명 사이의 어중간한 말.
소영은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꺼냈다.
굽이 낮은 플랫슈즈.
습관적으로 소영은 신발장 위에 올려둔
핸드크림을 짰다.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손등에 올려진 크림에서
저온의 라벤더 향이 올라왔다.
소영은 새끼손가락에만 한번 더 문질렀다.
얇게 눌린 보라색 네일이 번쩍 빛났다.
"너무 늦지는 마."
현우의 말 끝에서
소영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현관 센서등이 한 박자 늦게 꺼졌다.
'웅-'하는 전자음이 소영의 발꿈치에 남았다.
으뜸마을 밤의 바깥은 냄새가 많았다.
잔디에 얹힌 물기에서 나는 초록 냄새,
금방 닦아낸 보도블록에서 나는 습한 돌 냄새,
놀이터 고무바닥에서 올라오는 타이어 냄새.
소영은 줄지어 선 가로등 아래를 지나며
발소리를 낮게 굴렸다.
1001동 표지판이 조용히 빛났다.
두 동 사이의 거리는 길지 않았지만,
공기 결은 확연히 달랐다.
1003동은 생활의 숨, 1001동은 약속의 숨.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의 뒤집힌 면에서
풋풋한 냄새가 솟았다.
그 냄새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와 달리,
살아 있는 것들이 내는 냄새였다.
소영은 숨을 한 번 더 들이켰다.
오늘의 숨을 들이켰다.
흰 커튼 뒤 빈 병실 침대
얼마남지 않은 생명의 빠른 체온 소실
싸늘하게 굳은 발뒤꿈치의 색 변화
의사가 사망을 선언할 때
방 안 공기에서 지워지는 아주 미세한 떨림
소영은 그 감각들을 너무 많이, 자주 겪었다.
그래서 교대근무가 끝나면
몸은 방향을 스스로 정했다.
데이팅앱, 오픈채팅, 빠른 약속, 빠른 이별.
터치 한 번으로 몸을 섞고,
메시지 한 줄로 흔적을 지웠다.
그제서야, 소영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호텔, 원룸, 차 안. 회사원, 대학생, 외국인.
이름은 금방 지워졌지만 냄새는 오래 남았다.
땀의 소금, 샴푸의 감귤, 가죽시트의 차가움,
손등에 내려앉은 뜨거운 숨.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냥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직업의 지식은,
오늘을 더 숨차게 살라는 몸의 명령이 되었다.
삶은 유한하다는 문장은 병동에서 배웠고,
지금 살아라는 문장은 밤마다 몸이 가르쳤다.
소영은 그 두 문장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매번 남자를 선택했다.
1001동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내부 로비는 깔끔했고,
바닥의 대리석은 밤 조도에 맞춰 은은하게 빛을 뿜었다.
이 동은 한 층에 두 세대뿐이라
층수 표시의 붉은 숫자는 느리게,
정확하게 바뀌었다.
소영은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손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새끼손가락의 보라색 네일.
라벤더 핸드크림을 한 번 더,
손목 맥이 뛰는 자리에 둥글게 문질렀다.
1301호.
숫자 네 개가 검은 배경 위에서 또렷했다.
도어록의 원형 링은 초록빛으로
아주 천천히 숨을 쉬듯 깜박였다.
소영은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먼저 세 번 노크했다.
“똑—똑—똑.”
과거의 약속처럼, 현재의 암호처럼.
안쪽에서 체인 고리가 풀리는 ‘짤각’ 소리,
잠금장치가 돌 때 나는 ‘턱’ 소리가 연달아 났다.
소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주 약한 철맛이 혀끝에 번졌다.
병원 냄새와 집안 냄새는 뒤로 밀고,
라벤더와 자신의 피 냄새가 교차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때로 이런 아주 작은 맛에서 일어났다.
침이 목구멍에서 한 번 걸렸다가,
아주 매끈하게 내려갔다.
문틈이 열리며 먼저 어둠이,
그 다음 어깨선이, 그리고 얼굴이 나왔다.
지훈이었다.
운동 직후가 남긴 미세한 땀 냄새
방 안에서 묵은 커피의 구수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훈은 낮고 짧게 말했다. “왔구나.”
소영은 눈을 마주 잡고 한 박자 쉬어,
“늦었지?”라고 말했다.
지훈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제시간.”
말보다 먼저 손길이 다가왔다.
소영 어깨에 얹힌 손은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방 안 공기는 복도보다 따뜻했고
냄새는 더 개인적이었다.
지훈의 숨결이
소영의 목덜미 가까이서 부딪히는 순간,
아주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내가 살아 있는 밤으로 할래.”
그 말은 선언이라기 보다는 자유에 가까웠다.
현관문이 부드럽게 닫히며
경첩에서 얇은 마찰 냄새가 났다.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던 형광빛이
틈새로 잠깐 흔들리다 완전히 사라졌다.
지훈의 집 냄새가 소영의 심장박동과 속도를 맞춘다.
으뜸마을 1003동에서는
현우의 숨이 단정한 어둠을 쌓을 것이고
여기 1001동에서는
두 사람의 숨이 달을 새겨 놓을 것이었다.
소영의 휴대폰 배경화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삶은 유한하다—일터에서 배웠고,
지금 살아라—날마다 몸이 가르쳤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