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줘서… 고마워."
지훈이 먼저 입을 떼었다. 말끝이 조금 떨렸다.
소영은 현관에서 신발 끝을 한번 툭 맞추고 들어왔다.
검은 레깅스에 회색 크롭 티셔츠
지훈이 본 소영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 말, 아직도 어색하다."
소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좀 웃기잖아, 내가 뭐 선물처럼 오는 것도 아니고.”
"알면서도 왔잖아.."
"응. 알면서도 오긴 했지."
둘의 시선이 잠깐 얽혔다가, 천천히 풀렸다.
소영은 짧게 숨을 고르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회색 크롭 티셔츠 가장자리에 나온 실밥 하나가
조명에 번들거리며 흔들렸다.
지훈은 엉뚱하게도 그 실밥에 시선이 꽂혔다.
오래 기다린 사람 앞에서는,
쓸모없는 디테일까지 선명해진다.
버스가 오고 가며 내는 굉음이
거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나가자
둘만의 고요가 방에 가라앉았다.
소영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지훈아."
"응."
"오늘 우리말 줄이자. 길어질수록 망설이게 돼."
"알아... 말 안 해도..."
지훈이 응답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훈의 눈빛이 소영의 단발 끝을 훑고,
목선을 따라 내려가 가슴 곡선 위에서 작게 멈췄다.
보는 게 먼저였고, 곧 만지는 일이 자연처럼 뒤따랐다.
서로를 향한 망설임은 개입할 틈이 없었다.
소영의 단발머리가 지훈의 어깨를 간지럽혔다.
불빛에 따라 소영의 몸선은
부풀었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갓 반죽한 밀가루덩어리가
손길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곡선을 드러내듯
소영이의 표면에
지훈은 미세한 흔적들을 남겼다.
지훈이 손을 얹으면 소영은 메모리폼처럼
누를수록 깊게 파였고 놓을수록 빠르게 솟아올랐다.
때마다 발효실에서 막 꺼낸 빵 반죽 같은
달큼한 향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꿀렁이는 반동과 그 부풀음이 그대로
촉각이 되어 자세히 전해졌다.
살아 있는 생물의 꼬리가
손바닥 안에서 재빨리 방향을 바꾸는 느낌,
그렇게 소영은 지훈의 손바닥을 밀어내듯 버텼고
동시에 부드럽게 감싸왔다.
늪지대를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밑의 진창이 몸을 잡아끌듯,
서로의 움직임은 촉촉이 달라붙어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지훈아..."
"응."
"오늘은… 우리 둘만 기억하자."
"그럴게..."
몸이 서로를 기억했다 지워내는 속도로,
호흡이 짧아졌다 길어지고,
길어진 호흡은 다시 짧은 떨림으로 부서졌다.
말은 줄었고, 대신 작은 소리들이 의미를 전했다.
"기억나?"
지훈이 아주 낮게 물었다.
"뭐가."
"운동화 끈"
"아직도 그 얘기야?" 소영이 웃었다.
그런데 웃음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게 네겐 시작이었나 보네."
"내겐… 전부였지."
순간, 장면이 겹쳤다.
낡은 교복. 소매에 박힌 보풀,
겨울 복도의 습기,
엄마가 없는 빈 부엌,
냉장고의 퀴퀴한 냄새.
알코올 냄새가 가득한 아버지,
그의 손버릇.
어두운 방에서 벽지를 바라보며
지훈이 남몰래 숨죽여 울던 밤.
"야, 이 새끼야!"
아버지의 주먹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열여섯 지훈은 벽 모서리에 등을 대고 몸을 움츠렸다.
짜악-
뺨이 화끈거렸다. 귓속이 웽웽거렸다.
"또 울어? 응? 너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 모르냐!"
아버지의 입에서는 소주 냄새가
독한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지훈은 울음을 삼켰다.
울면 더 맞는다는 걸 벌써 알고 있었다.
"밥도 차려놓지 못하고… 이 쓸모없는 새끼가!"
또 다른 주먹이 복부를 강타했다.
지훈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을 기억하며 버텼던 순간들.
반지하 방의 곰팡이 냄새, 깨진 형광등의 깜빡거림,
벽지가 들떠 있는 모서리.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야, 거지새끼 왔다!"
"어우, 씨발 냄새~ 너 씻기는 하냐."
"병신, 점심도 편의점 폐기한 삼각김밥이래."
아이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
지훈은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작아져만 갔다.
그런 지훈에게 나타난 기적.
운동장 한가운데.
쥐어터져 눈이 퉁퉁 부은 지훈을 일으키고
다 끊어진 운동화 끈을 새로 묶어준 소녀.
소영.
소영의 손마디가 지훈의 다리에 닿았다.
차가웠던 지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씨발! 동정하지 마..."
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른, 운동화 끈 사러 가자."
소영은 언제나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었다.
계란말이, MP3, 노트, 참고서, 운동화 끈까지
지훈은 그날 처음 알았다.
세상이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걸.
그 이후로 지도는 방향을 잃지 않았다.
한 방향, 한 좌표, 한 이름.
언제나 최소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통보도 없이 맞이한 이별의 날.
인사도, 쪽지도, 표시도 없이—
골목 끝을 빠져나가던 이삿짐 트럭의 뒷모습처럼
소영은 갑자기 사라졌다.
텅 빈 책상과 회색 가루만 남은 교실.
"소영이는… 어디 갔어요?" 지훈은 두려웠다.
"아빠 직장 때문에 급하게 이사를 갔다더라.
연락처도 남기지 못했다고 하네."
담임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 지훈은 미친 듯이 걸었다.
학교 뒤 은행나무 길을. 한 바퀴, 또 한 바퀴.
언젠가, 어떻게든, 다시— 주문처럼 되뇌며.
버티는 법을 그때 배웠다.
원망 대신, 목표를 키웠다.
성공하겠다. 반드시 부자가 되어,
반드시 찾아내겠다. 그리고 함께 있겠다.
새벽 5시 신문배달.
방과 후 편의점 알바.
집에 와서는 새벽 2시까지 공부.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전교 1등을 했다.
장학금을 받았다.
시간은 그를 밀어 올렸다.
서울대 졸업장, 창업, 투자, 잡지기사.
스튜디오의 건조한 조명 아래에서
붓으로 그은 듯한 미소. 잘 나가는 AI 스타트업 대표.
패널석의 박수, TV 속 프레임에 놓인 자신의 얼굴.
지훈은 늘 그자리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지훈은 끝날 때마다 늘 같은 상상을 했다.
'소영아. 네가 이걸 본다면 날 알아볼까?'
지훈은 사방팔방, 수단을 가리지 않고
소영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며 뛰어다녔고
그리고 어느 날, 도착한 사진.
밝게 웃는 소영.
옆의 남편, 현우.
그 사이에 선, 소영을 꼭 닮은 은서.
지훈은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그럼에도 괜찮아. 네가 어디 있든. 널 보러 갈 거야.
지훈은 스스로 놀랄 만큼 담담했다.
그 담담함은, 오래된 결심과 닮아 있었다.
우연을 가장해, 지훈은 신도시 세종으로 이사했다.
사업지를 옮겼고 발자국이 발자국을 밟듯 가까워졌다.
불륜남이어도 상관없다. 상간남도 괜찮다.
죄책감보다 늘 앞서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안정감.
먼저 간 엄마에게서 느꼈던 그 느낌.
짧은 순간만이라도
그녀와 같은 방에서 같은 공기를 나누고,
같은 온도를 감각하는 일, 그 자체로.
지훈에게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소영이가 이혼하길. 그리고 자신에게 와주길.
지훈은 오래도록 희망했고 바라왔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소영과의 지금의 관계도 단절될까 봐.
엄마를 잃었던 그때처럼
인사도 없이 소영이 떠나던 그날처럼
공허함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운동화 끈을 묶어주던 그때처럼,
지훈은 소영과 풀리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소영은 라운드넥 목선을 정리하며 말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고 고마워."
"둘 다 받을게." 소영이 웃었다.
"하지만 다음은… 나도 쉽게 못 와."
"알아."
"그러니까… 오늘을 오래 기억해."
"오래도록 기억할게."
문이 닫혔다,
시간이 다시 느려진다. 공기가 바짝 식었다.
지훈은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라서… 그래서 더 잔인해.'
그 말은 벽을 맞고 돌아와 더 작은 소리가 되었다.
그는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공허함이 소리 없이 다시 다가왔다.
"의뢰인님, 지금 확인했습니다.
네, 방금 최소영이 오지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 예. 알겠습니다. 사진은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
깨끗이 비워낸 공백 위로,
건조한 남성의 목소리가 얹힌다.
감정을 제거한 목소리.
[사진 2장이 도착했습니다]
첫 번째—현관 앞, 문턱을 넘는 두 사람의 뒷모습.
두 번째—지훈 집, 불이 꺼지는 모습
화면을 바라보던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 멈췄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