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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도시 10화

알약

by 안개홍



'치이이익-'


민아의 카페 안.

허연 안개처럼 커피머신 수증기가

밀려와 커피의 따뜻한 향을 돋궜다.


유리문 밖 전단지는 바스락거렸고

현관 금속 손잡이엔 차디찬 쇠 냄새가 스쳤다.

민아의 손끝에 묻은 커피가루만

포근하게 보들거렸다.


"어서오세요~"


카페에 들어온 여자와 두 아이

한 아이의 얼굴이 낮이 익었다.


민아는 즉시 알아봤다.

파마머리에 깊은 검은 눈을 가진.

지난번 현우와 소영과 함께온 은서.


은서 옆에 선 여자는 낯설었다.

검은 니트에 크림색 진, 장식없는 가방.

옅은 화장에 눈에 띄는 악세서리조차 없다.


민아는 오히려 그 무색함이 오래 남았다.

평범한데 눈길을 붙잡는 평범함의 공백.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런 여자였다.


은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내밀었다.


"서연 이모, 나 엄마랑 통화할래."


여자가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은서 잘 있어요?

이번 주는 병원 스케줄이 꽉 차서

세종에 못 내려가는데,

늘 대신 챙겨줘서 고마워요."


소영이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소영아, 은서 내 딸처럼 잘 챙겨.

밥도 먹이고 숙제도 봐주고 있으니까 걱정 마."


은서 엄마 = 소영.

은서를 맡아주는 사람 = 이 여자.


"언니, 정말 고마워요.

나중에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불현듯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번 '은서엄마'를 말했던 그 단골.


평범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공백과 익숙함을 곁들인 이 여자.


바로 서연이었다.


- 서연, 우리카페 단골.

은서를 맡아주는 사람. 소영과 아는사이


그 얼굴에 이제 이름이 붙었다. 서연.


민아는 펜을 들고 노트에

서연이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옆 테이블에서 낮은 대화가 새어 나왔다.

명품백이 의자에 내려앉는 둔탁한 소리,

스테인리스 스푼이 컵 가장자리에 닿아

쨍-하고 번지는 금속의 울림.

학군지 엄마들이 몸을 기울였다.

마치 비밀을 나누는 음모자들처럼.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어는 또렷하게 박혔다.


"요즘 학원 원장들도 죄다 한 원장님 눈치 보잖아..."


"맞아, 건물 네 채 가진 사람인데 누가 거스르겠어.

PTA며 교육청 간담회, 시의원 행사까지…

빠지는 데가 없어. 사실상 여기 실세야 실세."


민아의 손이 잠시 멈췄다.


"우리 애 약도 그분이 처방해 주시는데,

정말 신기해죽겠어.

애가 집중력이 확 달라지더라니까?"


"그래~ 내가 지난번 말했잖아.

새벽까지 공부시키려면 약 없으면 못 버틴다니까."


다른 여자가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그거 들었어...?

어떤 애가 수면제랑 각성제 같이 쓰다가

새벽에 자다가 이를 갈아서

이빨이 다 부러졌다잖아.“

"에이, 그래도 성적은 올랐다며?

요즘 애들 다 그래~ 안 그러면 경쟁에서 밀려."


그때 한 여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


"한태준 원장님 말이야...

정말 실력이 대단해.

우리 애도 거기서 상담받고 완전히 달라졌어.

멘탈케어가 장난 아니라니까."


"그 덕에 박은지 수학학원이

그렇게 잘나가는거 아니겠어?

부부사이니까..팍팍 밀어줄거아니야..."


한태준.


그 이름이 공기 중에 떠오르는 순간,

서연의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쨍그랑—


서연의 손에서 컵이 미끄러졌다.

바닥 타일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카페 전체에 퍼졌다.


"어머, 죄송해요!" 서연이 황급히 일어났다.

은서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모, 괜찮아?"


"괜찮아, 은서야. 이모가 실수했어."


서연은 허둥지둥 컵을 주워 들며

웃음을 흘렸지만,

웃음은 입술 위에서만 맴돌았다.

눈동자는 빛을 피하듯 흔들렸고,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민아는 서연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펜이 다시 움직였다.


- 서연 → 태준 이름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


민아는 이름을 굴리듯 속으로 되뇌었다.


한태준.


박은지 원장의 남편.

청소년 마인드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으뜸중 학부모회 회장.

학군지 노른자 건물 네 채의 건물주.

세종시 지역사회봉사 협회장.


한태준의 병원은 민아 카페 건물 3층.

종종 간호사들의 음료 배달 주문으로

민아는 태준의 대기실을 가 본 적이 있다.

그의 대기실은 병원이 아니라, 고급 라운지였다.


서류 가방을 든 아버지,

명품백을 든 어머니들이 모여

학원정보 및 입시전략을 교환하고

아이들 약 처방에 대한

은밀한 비밀 대화들이 오가는 곳.


태준은 표면적으로는 모르는 척했지만,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용인했다.

아니, 조장했다.


환자는 곧 고객, 고객은 곧 지지 기반.

ADHD 약, 수면제, 각성제.

아이들의 집중력을 켜고 끄는 스위치.


학부모들은 공포와 기대 사이에서

학군지는 전적으로 한태준에게 의존했다.


월세 인상 한마디면 학원이 흔들렸고,

눈길 하나에 강사가 거리를 떠돌았다.

학원비 인상 소식에 학부모는 숨을 죽여야만 했다.


민아는 노트에 다시 썼다.


- 한태준: 의사. 은지남편, 돈, 약, 건물, 정치.

학부모회장. 학군지의 군주





늦은 저녁

유리창 밖 간판들이 불규칙하게 깜박였다.

빨강, 파랑, 노랑. 도시의 맥박처럼.


은서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서연은 가방 속 휴대폰을 꺼냈다.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오늘은 9시 진료. 남편 눈치 채지 않게.]
발신자, 한태준 원장님.


서연의 손목이 떨렸다.

휴대폰이 미끄러질 뻔했다. 숨이 가빠졌다.


'환자니까… 환자니까 괜찮아.'

서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병원을 가는 것도, 늦게 남는 것도

다 당연해 보일거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그러나 손바닥엔 이미 끈적하고

차가운 땀이 번져 있었다.


3층 복도는 고요했다.

낮 동안 학생들이 남긴 발자국과

지우개 가루가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간호사들은 모두 퇴근했고,

불 꺼진 문들이 무덤처럼 줄지어 있었다.

단 하나, 한태준의 진료실만 불이 켜져 있었다.


서연은 복도 끝에서 잠시 망설였다.

아직 돌아갈 수 있었다.

남편에게는 약국에 들렀다고 하면 됐다.

하지만 발걸음은 이미 그 문을 향하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노란 불빛이

서연의 얼굴을 비췄다.

심장은 북처럼 귀 안을 울렸다.


'쿵, 쿵, 쿵.'


서연은 숨을 고르고 문을 밀었다.

금속의 차가움이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끼익—


경첩 소리가 적막한 복도에 울렸다.

마치 비명 같은 소리.


"왔어?"


태준의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에는 친밀함과 권위가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문 닫아."


서연이 뒤를 돌아 문을 닫는 순간,

복도는 완전한 암흑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들린 문이 딸깍 잠기는 소리.

그 소리는 마치 운명의 자물쇠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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