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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도시 12화

펜트하우스

by 안개홍



"여보, 이시간까지 진료보는거야?"



은지의 낮은 음성이

적막한 진료실을 깨웠다.


늦은 시간 진료실을 방문한 누군가는

바로 태준의 아내, 박은지였다.


은지는 진료실 안에

어색한 표정을 한 태준과

온 몸에 두려움이 가득한 서연을

번갈아가며 천천히 살펴보았다.


"벌써 시간이, 오늘은 늦었네요.

다음부터는 이시간에 진료 안봐드리니까.

이른시간으로 예약 잡아서 오세요."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일회용 장갑처럼 값싼 친절.

포장지 같이 가벼운 태준의 미소.


그 정면에는

공포에 질려 있는 서연의 모습.


눈썹 사이에 얇게 끼어든 주름.

광대 밑으로 굳어진 얼굴 근육.

두려움을 감추려 꽉 쥔 주먹.


손등에 솟은 새파란 힘줄.

가시나무처럼 떨리는 손가락.

힘없이 가늘게 축처진 어깨.


문틈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듯

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나갔다.

그 모든 표정과 분위기가 함께 도망치듯이.


은지는 느꼈다.

방금까지 이 방을 가득 채운건

서연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그 두려움은 회색빛이었다.


숨을 참고, 소리를 죽이고,

존재를 지우려는 그런 회색의 두려움.


은지는 그 색깔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오랫동안 그 색깔 속에서 살았으니까.






으뜸마을 1005동 꼭대기

펜트하우스, 은지의 집.


현관문을 열자 대리석 바닥이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거실 위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우유처럼 은은한 빛을 흘렸다.

이탈리아 수제 가죽소파에 앉은

태준의 넥타이 매듭은

마치 목을 죄는 올가미처럼 단단해보였다.


"왜 하필 그 여자야..?"


은지의 멈춘 호흡이

다시 움직이듯 말을 꺼냈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태준은 매끈한 움직임으로

소파에 깊이 등을 기대고 대답했다.


"그 여자 남편, 복지부 사무관이야."


차가운 계산기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요즘 보건복지부에서 약물 과다처방 건으로

감사가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우리 병원이 표적인 것 같아.

불 붙기 전에 선을 대놓는거지."


태준은 보이지 않는 계획을

머릿 속에 그려든 듯 눈을 감았다.


"만약 이번 일이 터진다면...

그동안 돈 처먹인 시의원 날라가지,

열심히 공들인 지자체 정신건강센터 위탁 건,

그것도 같이 날려먹는거야.

그게 정부 보조금이 얼마짜린데,

당신도 잘 알잖아?"

이게 다 병원을 지키는 길이야."


숫자와 직함으로 짜인 이름들이

펜트하우스 거실에 차가운 그물을 쳤다.


장식장에 진열된 크리스탈 잔들이

이 도시의 권력자 이름표처럼 반짝거렸다.


은지는 그 그물 안에 갇혀서

잔뜩 움츠린 서연 얼굴을 떠올렸다.


은지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늦췄다.


"그래서 그 여자를 이용하겠다고?

그 여자는 내 학원 학부모야.

이동네 소문은 순식간에 바람처럼 퍼진다니까.

그 뒷감당, 당신 어떻게 하려고 그래."

서연씨 입에서 단 한마디만 흘러도

당신 병원도, 내 학원도 다 망하는거야."

태준은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 내렸다.

반쯤 웃는 입꼬리.

이미 계산을 끝난 사람의 표정이었다.


"후...걱정마,

그 여자는 그럴 깜냥이 못되니까."


태준은 작게 이어 말했다.


"이 도시는 모두 거래로 움직이거든

내가 주도하는 거래 안에서."


태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게 거래였고,

모든 관계가 이해관계였다.


이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도,

벽면의 붙어있는 명화들도,

그 안에서 사람은 부품에 불과했다.


잠깐의 정적 후 태준이 고개를 들어

은지를 정면으로 겨눴다.


"아참, 준호 문제는?"


은지의 목젓이 툭—하고 흔들렸다.


머릿속에 현우의 목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

이름을 부르던 입모양. 그날 밤.

책장 그림자 사이 놓아둔 숨소리.


"우리 준호를 으뜸중에서 전학시키..."


은지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태준의 이마 근육이 반사처럼 수축했다.


"왜!!!!

잘난 우리 준호가 으뜸중을 버린다고?

교장, 장학사, 시의원, 학부모회, 학원협회장까지

내가 다 구워 삶으려고

그간 거기에 처바른 돈이 얼만데,

다시 새롭게 판을 짜라고?

당신, 진짜 미쳤어?!!"


태준 주먹이 테이블을 '쾅—'하고 내리쳤다.


"준호, 의사 만드는데 들어간 돈이 얼만데!"


밀고, 찍고, 누르고, 바꾸고.

태준의 분노가 펜트하우스 높은 천장의 공기를

점점 조여 압축하고 있었다.


은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 하나를 짓밟아서 얻는 균형이라면

그건 균형이 아니잖아.“


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학군지는 정글이야!

돈 없고 힘 없는 애들은 밟히는게 자연질서야.

전교 1등? 참나! 한부모 가족이라며.

명분은 얼마든지 만들면 돼."


태준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보이지 않는

문장과 계획들을 그리는 듯 했다.

조서의 문장들

회의록의 문장들.

학부모위원들의 발언들.


"PTA 소집하고 안건 상정으로 여론 몰고

학폭위에 회부하면 끝!

내뜻이 그러면 그렇게 되는거야."


태준의 말에 은지는

자신이 누구와 결혼했는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그냥 하면 되는거다.


힘의 논리는 늘 간단했다.

그 순간, 은지의 머릿 속에

전교 1등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이 우리 학원에 와.

돈이 없어서 청소라도 하겠다고..."


은지의 말끝이 떨렸다.


"그래서, 뭐?"


태준의 눈빛이 건조하게 반짝였다.


"당신이 걔 담임이야?

당신이 자선사업가야?

돈 없고 가난한 애들이

나중에 수틀리면

얼마나 악랄하게 변하는지 알아?

배은망덕이 그놈들 본성이라고."


태준이 은지를 차갑게 훑어봤다.


"아— 그래, 당신도 한 때는 가난했었지,

그래서 그 본성이 아직 살아있는건가?

왜 자꾸 쓸데없이 편을 들지?"


태준의 말은 낙염처럼 말라 있었고

그래서 더 잘 베었다.

그 모진 말이 은지의 가슴을 후벼팠다.


은지는 자신의 오래 전 겨울을 생각했다.

한부모 가정에서,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과 꿈의 모양을 바꾸던 시절.


태준과 결혼 전, 모진 시부모의 반대.

'의사가문'이라는 말로 쓰인 노골적인 멸시.

부모 없이 커서 배움이 부족하다는 편견.


은지는 태준 집안에 들어가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모조리 잘라내야 했다.

그 덕에 오랫동안 연결되었던

가족들과 친척들과 연락도 끊었다.


새롭게 태어나야 했고 그들의 급에 맞게

말투부터 취미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은지는 성공을 사랑했고 출세를 갈망했다.

오랫동안 태준의 뜻이 자신의 생활이었고

그의 요구가 곧 자신의 루틴이었다.






그 날 저녁 9시 58분,

은지의 수학학원.


"원장님 돈은 없지만,

제가 아침 저녁으로 청소 꼭 할께요.

제발 부탁이에요.

학원만 다니게 해주시면..."

떨리던 목소리로 사정하던 모습이 선명했다.

은지도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그 다음날 새벽에도 전교 1등 아이는 찾아왔다.

열심히 홀로 늦게까지 학원 복도 바닥을 쓸고 닦았다.


젖은 수건처럼 축축한 머리카락.

성기게 묶인 신발끈.

밑단이 모두 해져 떨어진 더러운 교복.

삐뚤어진 매듭처럼 가쁜 숨.


그러던 어느 날.

할 수 없이 은지는

그 아이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너, 한번만 기회를 주는거야.

어디가서 무료로 수업한다고 말하지마."

"네, 원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은지는 아이의 공책을 넘겼다.

글씨는 단정했다.

문장 사이 여백이 매우 좁았다.


가난한 아이들의 공책은 대체로 곧았다.

종이를 아끼고, 실수를 아끼느라.

종이 위에 조심스럽고 명확한 단어와 선들.


은지는 그때 알았다.

이 아이 담임이 현우라는 것을


전교 1등 아이가 가져온

학습지, 문제집.

일기장마다 빼곡한 수기 답변.


매일 매일 한장씩,

아이를 응원하는 현우의 글이었다.


첫 번째 댓글: '오늘도 수고했어.'

두 번째 댓글: '이 부분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때?'

세 번째 댓글: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난방처럼 은근한 온기가 페이지마다 번져 있었다.

은지는 페이지를 넘기며 깨달았다.


이 댓글들에는 조건이 없다.

성적이 좋아서, 돈을 주어서,

뭔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저 한 아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건네는 따뜻함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은 그런 무조건적인 따뜻함을

얼만큼 잊고 살았던 걸까.


그날 이후—

은지는 그 아이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뒤적였다.


한부모 가정의 딸로

겨울의 끝자락 같은 청춘을 보낸 그 시절.

그 시절 그 서러움이 몰려왔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어떤 교사가 자신의 돈까지 써가며

불우한 제자를 돕는 걸까?


그런데 아이가 가져온 일기장 속

현우의 글들을 읽으며

은지는 점점 다른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어른이 있구나.'


그때부터였나보다.

은지는 현우가 궁금해졌고 서서히 흠모했다.


불륜이라는 이름이 붙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살아있는 쪽으로, 가까운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그 감각을

은지는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여보, 그런 뜻이 아니라..."


"아, 됐고! 내일 당장 교장한테 전화해!

내일 모레 학부모회 연다고,

준호 전학은 바로 취소하고

그 대신 전교 1등, 학교폭력 근절 그거.

이번에 제대로 논의하겠다고!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제대로 전달해."

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태준의 차가운 얼굴이

마치 올가미처럼 자신을 조이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은지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현우의 그 따뜻함,

전교 1등 아이의 진실함.


그것이 진짜였다면, 지금 이 순간은 가짜였다.

은지는 처음으로 태준의 그림자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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