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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도시 14화

부속품

by 안개홍



서울,

시티타워호텔 12층 회의실

오후 1시 30분


유리벽 너머 서울의 전경이 아득히 번쩍거렸다.

대조된 듯 호텔 형광등 빛은 바짝 말라있다.


보건복지부가 주관하고

전국 거점 대학병원이 참여하는

'거점대학병원 혁신협의체' 제2차 회의.


이름표를 단 국장과 실장,

각 대학병원 원장, 기획실장이 앞줄을 채웠다.

우석은 뒤쪽 보조석에 앉아서 보고서를 훑었다.


보고서 작성부터 패널 자료 정리

현장 준비까지 늘 우석의 몫이었으나

회의가 끝나면 그 공은 윗선의 입에 걸릴 것이다.

"홍 사무관, 이번 자료도 아주 깔끔해."


과장이 지나가며 툭 던졌다.


우석은 익숙한 듯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급자의 짧은 칭찬이 스쳤다.

그의 손을 거쳐간 실적은

이미 과장의 실적이 될 것이다.

속에서 허무가 쓴맛처럼 올라왔다.


복지부 과장이 단상에 올랐고

장관의 축사 진행에 이어

정책 추진 현황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기계처럼 호텔 행사장을 채웠다.


발표자가 교체되었다.

복지부 과장이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다.


"서울 OO대학병원 응급실에 계신

최소영 간호사님께서 응급실 과밀화,

환자 안전관리 실태와 인력배치 현황에 대해

간략히 현장의 목소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단 위에 선 소영은

네이비 블라우스를 입고

종이 뭉치를 꼭 쥔 채 단정히 서 있었다.


응급실 과밀화 문제와

병원 간호인력 부족사태를 보여주는

그래프가 화면 위로 오고 갈 때마다

소영은 짧은 호흡을 고르며 문장을 이어갔다.

긴장된 듯했지만 목소리는 또렸했다.


발표는 십 분 남짓으로 끝났지만

회의는 정시에 끝나지 않았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는

늘 정해진 시간에 끝나는 법이 없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사람들은 서로 명함을 내밀었고

그 사이 우석과 소영도 서로 눈이 마주쳤다.


"최소영 간호사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우석 사무관님."


우석의 짧고 건조한 말에

소영은 순간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아침부터 세종에서 서울 오시려면 힘드셨겠어요."

"업무인데요 뭘, 괜찮습니다."

"저도 세종시 살아서, 잘 알아요."

"아~간호사님도 세종에 사셨군요, 반갑습니다."


우석과 소영은 어색함을 지우고자

표면적이고 보편적인 두어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것뿐이었다.






서울, 밤 10시. 우석의 호텔방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양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우석은 침대에 누워 손에 쥔 휴대폰을 내다봤다.


호텔 방 안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고요함과 허탈함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깔렸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 재방송이 흘렀고

우석은 소리를 꺼버린 채 생각에 잠겼다.


'사무관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지.'


비행정고시 출신, 보건복지부 5급 사무관.

인정받는 일벌레. 장관 보고서 전담인력.

떠오르는 복지부 샛별.


출세를 위해 달려온 세월.

가정 일은 제쳐두고 업무에만 몰두했다.

새벽 12시가 되어도 청사를 지켰고

남들이 모두 퇴근할 때도 지켰다.

늦은 밤. 과장과 국장이 거하게 마시고 취해

사무실에 들어와도

우석은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상급자의 말 한마디가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매달려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칭찬 한 줄이면 좋았다.


외벌이 인생. 박봉 급여에도

출세를 위해,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

회사에 충성하면 다 되는 줄 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홍사무관, 아쉽게 됐네.

아니, 이번에 최사무관이 지방으로 발령 나잖아.

애도 한 명 생겼고... 이사도 가야 되는데

이번 승진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이해하게.

내일까지 장관님 보고니까.

보고서 문제없이 잘 준비해 주고.

나 먼저 가볼게."


상급자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승진자와 부서원을 데리고 우루르 사무실을 나갔다.


우석은 이번 해 승진에서도 밀렸다.

벌써 두 번째.

이번에도 승진대상자 명단에

홍우석의 이름은 없었다.


'지금까지 난 뭘 한 거지.'

출세를 위해 달려왔지만

거울 속 얼굴은 지친 부속품에 불과했다.

무료했다. 이 공허함을 채울 방법이 없었다.


우석은 휴대폰을 열었다.

오픈채팅방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 방장여자, 자유로운 대화 추구.'


자유로운 대화

우석은 그 말에 시선이 멈췄다.

가볍게 인사를 남기자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대화는 생각보다 술술 이어졌고

짧은 대화 속에서

우석은 묘하게 마음이 동요했다.

그녀의 말투는 단정했지만, 뭔가 허전함이 묻어있다.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우석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껍데기만 있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익명성이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었다.

신세 한탄하다가, 공허를 나누다가

웃음 섞인 문장도 주고받았다.

밤 동안 대화는 길어졌고

마침내 휴대폰 화면에는 한 문장이 화면에 떴다.


[대화가 재밌네요, 우리 만날까요?]


우석의 손가락이 잠시 떨렸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요. 오늘 가능하세요?]

[지금요? 음..... 좋아요!]

[제가 묵는 호텔에 근사한 바가 있던데.]

[아, 거기 저번에 가봤어요. 1시간 후 거기로 갈게요.]

[네, 그러시죠.]


우석은 가볍게 갑작스레 찾아온

그 일탈에서 오랜만에 떨림을 느꼈다.


달빛을 닮은 조명이

호텔 바 테이블마다 부드럽게 번졌다.

재즈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흘렀다.


우석은 창가 구석 2인석에 앉아

유리컵을 만지작 거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네이비 블라우스에 스카프를 맨 여자가

주변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우석의 눈이 즉시 멈췄다.

조명 앞에서 얼굴이 더 가까워지자

확신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저기 혹시... 홍사무관님?"

"최소영 간호사님! 아니 어떻게 여길.."

아, 그럼 그 오늘만 방장님이... 최간호사님..?"

"하하, 이거! 진짜 재밌는데요?"

소영이 당황한 듯 살짝 놀라며 말했다.


아까 낮에 연단 위에서 봤던 얼굴.

발표를 마치고 인사를 주고받던 눈빛.


우석이 오픈채팅에서 만난 여자는

다름 아닌 최소영 간호사였다.






같은 날 밤 10시.

세종, 엠버서더 호텔 1001호


호텔 방 안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된 비밀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벽처럼 답답했다.

현우는 그 벽 너머로 은지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소파 끝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지난번 호텔 분위기와 전혀 달랐다.

하얀 침대 시트는 새것처럼 팽팽했지만

드리워진 그림자는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현우와 은지의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처럼.


현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매듭이 느슨해지자 숨통이 트이는 듯했지만

이내 분노로 거칠게 숨 쉬었다.


눈동자에는 패배감, 분노.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동시에 어렸다.


"약속했잖아!"

현우의 목소리는 갈라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웠다.


"준호만 전학 보내면 해결된다고 말했잖아!"


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얽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실타래가 엉켜 있는 느낌.

은지 머릿속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지난번 우연히 태준의 서재에서 본 사진이 떠올랐다.

현우의 아내,

소영이 낯선 남자와 함께 집에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그 사실을 태준이 알고 있다는 것도.


'말해야 할까, 지금.'


은지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현우가 이렇게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아내의 외도까지 알려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지만 태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가까운 날에.

잔혹한 순간에 그 사실을 꺼내 현우를 괴롭힐 것이다.


은지는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가을비에 젖은 나뭇잎처럼

투명하고 연약했다.


"내 뜻이 아니야."

은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남편이 그렇게 정한 거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말하면서도 은지는 생각했다.

'말해야 할 사실이 또 있어. 당신의 부인 이야기..."


현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금세 비명으로 변할 것 같았다.


"당신은 도대체 뭐야?

내 앞에서는 같은 편인 척하고

결국 그 인간 의도대로 하는 건 대체 뭔데?"


은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순간 은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현우 씨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고도 내가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나와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은지는 눈빛을 곧게 세우고 말했다.

눈에는 이전에 볼 수 없던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탁자 위 종이컵을 흔들었다.

컵 안의 물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마치 은지의 마음처럼 불안정하게.


"당신만 태준에게 당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나도 그리고 준호도 당신도 묶여 있어"


'그리고 당신 아내도...'

은지는 이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똑바로 설명해 봐."

현우는 은지를 다그쳤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현우는 당장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오늘 내가 강당에서 어떻게 짓밟히고 무너졌는지ㅡ

당신은 아마 절대 모를 거야."


순간 은지는 현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알아, 나도."

그 말속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다.


'당신은 이렇게 충분히 아픈데,

내가 어떻게 더 아픈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오늘 더 이상 내가 어떻게ㅡ

더 큰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겠어.'


은지는 말을 이어갔다.


"현우 씨, 태준을 조심해야 해.

당신과 당신 주변... 내 남편이 뭔가를 알고 있어."

은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현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혼란스러움에서 불안으로

불안에서 두려움으로 번져갔다.


"뭐라고? 자세히 좀 말해봐." 현우가 말했다.


은지의 마음속에 폭풍이 일었다,

서재에서 본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영의 웃는 얼굴,

낯선 남자와 함께 집에 들어가는 모습.

차마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여기 호텔에 같이 있다는 걸.

당신 남편도 알고 있다는 말이야?"


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확신할 수 없었다.

태준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

은지가 현우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위험하고 금지된 것,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들.


은지는 초조한 듯 생각에 잠겼다.

'이게 다.. 남편이 계획한 것일지도 몰라.'





같은 날 밤 10시 25분.

태준의 서재.


"의뢰인님, 전화 통화 가능하신가요?

최소영이 어떤 남자랑 같은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남자 신원 파악 결과,

남자는 보건복지부 홍우석 사무관으로 확인됩니다."


사설탐정이 보내온 사진 뭉치 위로

태준은 말없이 전화기를 끊었다.


통화 종료음이 '뚜뚜'하고 울릴 때마다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됐다."

태준은 짧게 말하고 펜트하우스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 불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서연을 옥죄일 필요도 없겠군."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우석을 직접 잡았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이거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재미있게 흘러가겠어."


태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새로운 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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