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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도시 15화

의뢰인

by 안개홍


"이런 우연이라니, 정말 신기해요."


소영의 목소리가 재즈바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와인처럼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떨림이 묻어있었고,

낯선 만남이 가져오는 설렘을

애써 감추려 했지만 그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러게요. 세상이 참 좁네요."

우석은 멋쩍은 듯 웃으며 목을 살짝 기울였다.

그의 웃음 뒤로 당황과 기대가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재즈바를 채우는 피아노 선율이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부드럽게 감쌌다.

소영은 손에 든 와인잔을 천천히 돌렸다.

레드 와인이 잔의 유리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지금 이 순간처럼—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와인 잔 너머로 보이는 우석의 얼굴은

낮에 회의장에서 딱딱한 사무관과 전혀 달랐다.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있었고,

눈빛은 사회적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숨김없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익명 채팅방을 채웠던 그 가벼운 농담들.

낯선 아이디 뒤에 숨어있던 그 사람이

결국 같은 회의장을 스쳐 지나갔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운명적으로 느껴졌다.


우석은 지금까지 성공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허무함과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영 역시 병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그리고 가정을 지키는 역할 속에서

점점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가며

깊은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허무함과 공허함은

와인처럼 부드럽게 흘러들어

이 작은 공간을 채웠고,

누구보다도 빠르고 가깝게 서로를 끌어당겼다.


"힘들어요, 요즘."


소영의 목소리가 와인에 젖어 울렸다.

그 짧은 말속에 담긴 무게가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병원 일이요?"

"그것도 있고... 그냥 모든 것들이 다."


모든 것들이.


그 말속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우석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 역시 같은 말의 무게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저도 승진에서 밀렸어요. 벌써 두 번째네요."

우석은 솔직하게 자신의 실패를 털어놓았다.

현실에서는 쉽게 내뱉기 힘든 말이었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왜인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출세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소영이 조용히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요?

늘 최고를 향해 달려왔는데,

막상 그 자리에 도착하니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텅 빈 공간에 저 혼자만 덩그러니 있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공중에서 마주쳤다.

말없이 오가는 눈빛 속에

당신을 이해한다는 깊은 공감과

우리는 같은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스며들었다.


오늘 밤.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상대를.

우석과 소영은 본능적으로,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소영은 더 이상 이 긴장된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숨을 고르고 말했다.


"방에서... 더 편하게 이야기할까요?"


현실을 잠시 잊고 이 밤의 익명 속으로

완전히 잠수하고 싶다는 욕망을 꿀꺽 삼키며,

우석은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띠리리릭—철컥'


호텔 문이 닫히는 순간,

방 안의 공기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복도의 미세한 소음조차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두 사람의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이 밀폐된 공간을 채웠다.


흐트러진 호흡 속에서

불필요한 질문들은 모두 벗겨졌다.

한 번쯤 서로의 이름을 불러볼 법도 했지만,

끝내 부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익명성은 깨지고 차가운 현실이 시작된다.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미루기 위해

두 사람은 침묵을 암묵적인 합의처럼 지켜나갔다.


남은 건 단순한 몸짓과 단순한 온도뿐.

그 단순함이 오히려

이 침묵의 밤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소영의 두 손이 우석의 목에

살며시 걸렸다가 다시 풀렸다.

호흡이 가빠질수록 천장의 조명은

더욱 느리게 흔들렸고,

벽에 비친 그림자는

겹겹이 포개져 검은 천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 그림자 아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다른 모양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소영의 다리가 우석의 허리에

부드럽게 닿을 때마다

우석의 등 근육이 얇고 섬세하게 떨었다.


우석은 왼손으로

소영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고,

오른손으로는 그녀 허리의 부드러운 곡률을

천천히 재며 꽉 움켜잡았다.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멈출 때마다

가쁜 숨과 뜨거운 온기가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귓불을 스치는 숨소리가

규칙적이면서도 따뜻하게 전해졌다.


애처롭고도 간절한 소영의 시선들을.

우석은 그 순간들을 영원히 붙잡고 싶었지만,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할까 봐,

감히 멈추지 않았다.


우석의 이마에 맺힌 투명한 땀방울이

소영의 입술과 눈가에 하나씩

뚝뚝 찍히며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그 작은 반짝임은

절박함과 쾌락, 황홀함을 모두 닮아 있었고,

오늘 밤만큼은 그 모든 허무함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것만 같았다.


화려한 것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남은 건—

붙잡는 손, 받아주는 허리, 마주한 복근,

안쪽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수축뿐이었다.


우석은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늘 가슴을 조여오던 그 긴장이

어깨에서 손끝으로 흘러나갔고,

손끝에서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뜨거움이

한동안 이불속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묻고 싶은 질문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유효하지 않았다.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서로에게 건네졌으니까.


창문 밖 도시의 수많은 불빛들이

별처럼 미세하게 깜빡였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딱 그만큼의 평온이 허락된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석이 눈을 떴을 때 소영은 이미 떠난 뒤였다.

베개 자리만 남은 침대에서

우석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천천히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랫동안 굳어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어느새 공허함은 사라지고

설렘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 못 잔 잠을 푹 잔 것처럼 가벼웠다.


공허함과 허무함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완전히 다른 삶을 선사해 줄 새로운 존재.

우석은 소영이야말로 자신의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이틀 후, 오후 4시
오지훈 대표 사무실.


택배가 도착했다.

발신자 이름은 없고,

두툼한 갈색 봉투만이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지훈은 봉투를 뜯기 전 잠시 망설였다.


봉투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오로지 지훈의 이름만

검은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 있을 뿐이었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자

여러 장의 선명한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1. 소영이 낯선 남자와 재즈바에서 대화하는 사진]
[2. 그 남자와 함께 호텔 방에 들어가는 사진]


지훈의 심장이 순간 완전히 멈춰버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아주 자세히 들여다봤다.


깔끔하고 평범한 낯선 얼굴.

자신이 아는 모든 남자들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떠올려봤지만, 그 안에 이 남자는 없었다.


사진 뒷면에는 손으로 쓴 메모가 붙어있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전화번호 : 010-XXXX-XXXX]


지훈은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이거나

음모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사진 속 소영의 얼굴은

너무나 선명하고 생생했다.

지훈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장면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메모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손이 너무 떨려서

번호를 제대로 누르는 것조차 힘들었다.

벨소리가 두어 번 울리더니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사진을... 보내주신 분인가요?"

"오지훈 씨, 많이 놀라셨죠?"

"어떻게 제 이름을..."

"걱정 마세요. 의뢰인의 요청으로 조사한 겁니다."

"의뢰인이요?"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하네요. 잠깐만요."


전화 너머에서 남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완전히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지훈 씨, 처음 뵙겠습니다. 한태준입니다.

사진은 잘 받으셨나요?"


지훈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이름이었다.


"한태준이요?"

"아, 제 이름은 잘 모르실 테고...

으뜸중학교 김현우 선생님은 잘 아시죠?"


등줄기로 차가운 전율이 흘러내렸다.

김현우. 으뜸중학교 영어교사. 최소영의 남편.

지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저에게 이런 걸..."


"간단합니다.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최소영 씨에 관한 진실 말입니다.

혹시 지훈 씨 말고 다른 남자들도

많이 만나고 있다는 걸 아세요?"

태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저 말고... 다른 남자들이 더 있다고요?"

지훈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모든 증거를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최소영 씨를 지키는 일입니다.

전 최소영 씨가 유부녀라는 사실도 알고 있고

남편이 으뜸중학교 선생 김현우라는 사실도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오지훈 씨가 특별한 내연남이라는 사실까지

모든 걸 다 알고 있거든요.

최소영 씨를 지키기 위해서

오지훈 씨가 저를 도와주셨으면 하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남편인 김현우 선생님께 모든 사실을 말하세요.

당신과 최소영 씨의 관계를.

내일까지, 남자답고 정직하게."


"내일까지요?"


"시간을 넉넉히 드리는 겁니다.

저는 선택권을 존중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게 못하겠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런 경우에는... 제 방식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겠죠.

사진들은 여러 곳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소문은 여러 입을 통해 빠르게 번져나갈 겁니다.

한 사람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면...

그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명예도

함께 더러워지는 법이죠.

대충 말씀드려도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오지훈 대표님?"


잠깐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화기를 붙잡은 지훈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피가 몰렸다.


"결정을 내리세요. 내일까지."

"......."

"오지훈 씨가 소영 씨에게 진심이라는 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진심이야말로 가장 좋은 동기이기도 하니까요."


전화가 끊어진 후 지훈은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손은 벌벌 떨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진짜 실체.

그리고 소영과 함께 이뤄낸 은밀한 관계.

지금까지 어렵게 쌓아 올린 자신과 회사의 모든 업적.


그 모든 것이 단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상실의 공포감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도대체 소영의 남편을 만나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당신 아내와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너무 직설적이고, 너무 잔인했다.


"잠깐의 실수였습니다."
그건 거짓이었다.

적어도 지훈에게 소영은 절대 실수가 아니었다.


"이제 그만 끝내겠습니다."
그 문장은 무의미했다.

끝내겠다고 말하는 순간

소영의 얼굴이 떠올라 심장이 더욱 빨라졌다.


만약 이 모든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소영은 어떻게 될까.

남편 앞에서 발각된 아내.

가정은 산산이 깨져버릴 것이고,

여러 남자를 만난다는 더러운 험담이

동네 전체에 퍼져나갈 것이다.

은서의 이름까지 이 모든 소문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그 모든 파국의 시작을

자신이 직접 열어야 한다는 건가.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저려왔다.

어떤 선택도 원하는 결말은 아니었다.


지훈은 소영을 잃을까 두려웠고,

동시에 현우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남자답게, 정직하게."

태준의 그 말은 협박이면서 동시에 조롱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자신이 가장 지켜야 할 사람을

가장 크게 배신하게 되는 모순.

지훈은 그 끔찍한 모순 속에서

완전히 발이 묶여 있었다.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세종청사 보건복지부 빈 회의실


우석은 보고서 철을 끼운 팔을 천천히 내리고

숨을 고르는 척했다.

초조함과 창백함이 그의 표정을

점점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때 손목의 진동이 한 번 짧게 울렸다.


[홍우석 사무관님, 한태준이라고 합니다.]
[문자로 보내드린 사진들... 잘 보셨죠?]


회의실의 빈 의자들은

방금까지 누군가 앉아있었다는

온기마저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당신의 비밀을 확실하게 정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면 결과는... 뻔하겠죠.]


[첫째, 불륜 사실로 공직생활이 완전히 끝납니다.]
[둘째, 아내와 아이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받습니다.]
[셋째, 일상은 소문에 완전히 잠식될 겁니다.]


문장마다 점이 있었고, 점마다 잔혹한 멈춤이 있었다.

멈춤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상상으로 쫓겨간다.

우석의 상상은 대부분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먼저 과장이 회의실 문을 세게 닫고

경악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홍 사무관! 이게 사실인가?"


책상 위에 놓인 그날 밤 호텔의 사진 몇 장.

과장의 손끝이 그 사진들을 톡톡 치며 차갑게 말했다.


"인사혁신처에 이미 보고가 들어갔어.

어휴, 언론에도 벌써 흘러나갔고..."


과장은 이마를 짚으며 깊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록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 공무원 아닌가.

홍 사무관 기록에 이런 게 남으면...

더는 같이 일할 수 없겠네."


사무실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석에게 쏠렸다.

누군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누군가는 비웃음 섞인 코웃음을 흘렸다.

우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의자에 얼어붙어 있는 모습을

상상 속에서 반복해서 그려냈다.


또 다른 장면이 겹쳤다. 우석의 아내, 서연.

부엌의 따뜻한 불빛 아래에서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이 '쨍' 하고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쏟아진 뜨거운 물이 바닥에 흩어졌다.

서연의 손끝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여보... 당신 정말...?"

목소리는 낮았지만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가족을 두고, 아이를 두고, 이런 짓을...?"

서연의 눈빛은 울음보다도 훨씬 더 차가웠다.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우석은 그게 훨씬 더 두려웠다.


"난 당신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서연의 물음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


우석은 무릎을 꿇고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끝은 허공에서 공허하게 움켜쥘 뿐이었다.


그 순간 아이 방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작은 그림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아빠...?"


그 짧은 한 단어가

세상의 모든 판결문보다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석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잔혹했다.


머릿속에서 울린 질타와 비난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지만,

이미 그의 가슴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제 제안은 단 하나뿐입니다.]
[수락하시면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겁니다.]


우석은 한 손으로 다른 손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씹힌 표피가 혀끝에서 쓰디쓰게 남았다.

결국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올 줄 알았습니다."

태준의 목소리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사람의 여유로운 톤이었다.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우석의 어조는 완전히 다른 음계로 떨어져 있었다.


"그건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죠.

내일 밤, 제 병원 진료실로 오실 수 있습니까?"


태준의 미소는 친절했고, 그래서 더욱 잔인했다.






다음 날 아침이 오면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들을 것이다.
누군가는 깊이 상처받고,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이 다치게 될 것이다.


제각각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질 것이다.

누군가는 그 무너짐을 '정직'이라고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그 세워짐을 '진실'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그 아슬아슬한 기로에 서 있는

지훈과 우석은 밤새도록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뒤척이는 동안,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갔고


내일이라는 이름의 심판대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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