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42분,
세종정부청사.
로비의 대리석 바닥은
우석의 발소리를 메아리치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소리가
오늘은 이 시간 이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는 것 같았다.
천장에 달린 조명들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만든
빛의 격자무늬가 거미줄처럼
우석의 시야에서 흔들렸다.
4시 42분.
우석은 이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홍 사무관님."
경비원의 인사가 새벽 정적을 깼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우석은 경비원의 눈을 쳐다봤다.
그저 평범한 친근함만 있을 뿐.
그게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나오셨네요."
"급한 보고서가 있어서요.
국정감사 준비로... 많이 바쁘네요."
거짓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하지만 입안이 사막처럼 바짝 말라서
침이 목구멍으로 삼켜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
우석은 스테인리스 스틸 사이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다크서클이 평소보다 짙었고,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일그러진 반사 때문에
얼굴이 괴물처럼 보였다.
주머니 속 USB를 만지작 거렸다.
작고 무해해 보이는 물건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
3층.
감사관 사무실이 있는 곳.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의 센서등이 차례로 켜졌다.
우석의 발걸음에 맞춰
불빛이 하나둘 길을 밝혔다.
복도 양쪽 벽면에 걸린
정부 정책 포스터가
우석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공정하고 투명한 정부'
'국민을 섬기는 공직자'
그 포스터 문구들이 오늘따라
우석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우석은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감사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출입카드를 대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초록불이 켜졌다.
그 작은 불빛은
허가를 의미하기도
경고를 의미하기도 했다.
모니터를 켜자 로그인 화면이 떴다.
마우스 커서가 깜빡이며
접속 계정 입력을 기다렸다.
키보드 위에 올려진
우석의 손가락이 떨렸다.
첫 번째 시도에서
비밀번호를 틀렸다.
평소라면 무의식으로도
입력할 수 있는 번호였는데,
두 번째도 실패했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그 글씨가 마치
너는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석은 뒷목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는 것을 느꼈다.
그 땀이 셔츠 깃을 타고
흘러내려 등을 흠뻑 적셨다.
세 번째, 겨우 성공.
감사시스템에 접속했고
검고 작은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태준이 말했던 대로
프로그램은 자동 실행되었다.
검은 터미널 창 사이로
알 수 없는 코드들이
빠르게 스크롤되며 움직였다.
[관리자 권한 획득 완료]
간단하고 명확한 메시지.
우석은 서둘러 태준의 병원을 검색했다.
예정된 감사 날짜. 다음 주 목요일.
작은 화살표 모양의 마우스 커서가
빨간 X버튼 위에서 깜빡였다.
클릭 한 번이면 끝.
마우스를 누르는 순간 작은 클릭음이 났다.
아주 작고 일상적인 소리였으나
우석에게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삭제되었습니다.]
우석은 이제 태준의 공범이 되었다.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기자,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현기증이 몰려와 어지러웠다.
태준이 알려준 그 방법 그대로.
USB를 뽑고 시스템을 종료하고
모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임시파일과 로그기록까지 삭제했다.
아무리 기록을 지워도
우석의 기억은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순간은 영원히 남을 것이었다.
모니터가 꺼지자
사무실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창 밖의 하늘은 점점 밝아왔다.
어둠과 빛의 경계 선 위에 서 있는 기분.
우석도 선과 악의 경계 선 위에 있었다.
우석은 사무실을 나서면서
복도 천장의 CCTV를 응시했다.
작은 카메라 렌즈가
빨간 불빛과 함께 깜빡이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 기록이
증거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고개가 차츰 땅으로 꺼졌다.
명백한 직권 남용과 범죄.
공무원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
지금까지 쌓아온
우석의 모든 신념과 원칙.
그리고 출세를 위해 달려온 세월.
그 모든 기록들이
손쉽게 마우스 버튼 하나로
함께 사라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우석은 그 순간에도
그날 호텔의 밤을 기억했다.
소영의 따뜻한 체온.
부드러운 숨결, 충만함.
승진해서 인정받는 것.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이
모두 다 허상처럼 느껴졌다.
우석은 떨리는 손으로
소영에게 보낼 메시지를 입력했다.
[소영 씨, 이제 모두 끝났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참 허무하네요.]
문자를 보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영에게 아직까지 답장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절망감이 몰려왔다.
우석은 미친 듯이
소영에게 연속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소영 씨, 제발 답장해 주세요.]
[그날 밤이 저에게는 정말 소중했어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모든 게 무의미해져요.]
하지만 여전히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우석의 절망감은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방금 전, 저지른 범죄가 무슨 의미가 있나.
난 가정을 지키고 나를 지키고
소영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소영이 거부한다면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간절하게
소영을 원하고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도
무시당하고 있다는 현실이 참을 수 없었다.
우석은 마지막 카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메시지를 입력했다.
[김현우 선생님께 우리 일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읽음]
표시가 뜨자마자
바로 소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전 10시,
청소년 마인드 정신건강의학과
태준의 진료실
태준은 진료실 창밖을 보며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서연의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벨소리가 몇 번 울리는 동안
태준은 손톱을 다듬으며 여유를 부렸다.
"여보세요."
서연의 목소리는 예상대로 떨렸다.
"응 나야, 한태준. 잘 지냈지?"
"무슨... 일이세요.?"
"뭐야, 그 반응은.
반가운 마음에 전화한 건데...
그렇게 경계하니까 좀 속상할라 그러네."
"아니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어서 전화했어."
전화 너머로 서연이 숨을 멈췄다.
그 정적이 태준을 더욱 흥분시켰다.
"당신 남편 있잖아,
홍우석 사무관.
사실 바람피우고 있어.
그것도 서연 씨가 잘 아는 사람과"
태준은 일부러 말을 끌었다.
서연의 침묵이 깊어질수록
태준의 쾌감도 커지는 것 같았다.
"뭐... 뭐라고요? 말도 안 돼.."
서연의 부정은 예상한 반응이었다.
태준은 더욱 잔인하게 웃었다.
"최소영 간호사, 잘 알지?
은서엄마 말이야.
그 여자가 바로 당신 남편이랑-"
"그럴 리가 없어.. 요..."
전화 너머로
서연의 다급한 호흡이 들렸다,
그 소리가 태준의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서연 씨, 현실을 받아들여.
당신 남편이랑 그 여자가
얼마나 치밀하게 당신을 속여왔는지..."
"왜... 왜 이런 말을.."
서연의 목소리가 완전히 부서졌다.
"당신이 믿고 의지할 사람.
그게 바로 나야. 한태준.
그래서 연락한 거야."
태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이 소문이 동네에 돌아봐.
당신 남편 직장, 아파트 주민들.
딸 학교까지..
감당이 안될 거야.
그래서 당신이 걱정돼서 말이야.
잘 알잖아.
옛날에 당신이 자살 시도를 했을 때...
내가 지켜줬잖아.
자살을 시도한 엄마.
바람을 피운 아빠.
그렇게 소문나면 안 되니까..."
"안돼 제발....! 그건"
서연의 절규가
태준 귓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서연의 거친 숨소리만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내일 저녁 9시.
W호텔에서 보자고.
당신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싫어요... 가고 싶지 않아요.."
"선택은 당신 몫이야.
하지만 안 오면.. 다음 날 아침.
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당신 남편 불륜과
당신 정신과 치료기록과 자살시도
모두를 알게 될 수도 있어.
당신 딸도 친구들한테
엄마의 비밀을 듣게 되겠지.
어떤 선택을 하든 자유야."
태준은 전화를 뚝 끊었다.
서연은 한참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온몸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차갑게 굳었다.
남편과 소영. 정말일까?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쳤다.
우석의 눈빛과 소영의 눈빛.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서연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을 쉬려 해도 목구멍에서 막혔다.
배신감과 혼란스러움.
우석이 자신을 속였고
소영이 자신을 기만했다는
그 배신감이 몰려와 비웃고 있었다.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서연은 어디든 갈 곳을 찾으려 했다.
휴대폰을 들고 연락처를 훑어봤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대학 동창, 동네 학부모들.
그 많은 이름들 중에서
지금 자신의 절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연락처에 백개가 넘는 전화번호.
소영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거나
피상적인 관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했지만
이 복잡함 상황과 절망감을
가족과 함께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서연은 목적지 없이 그냥 걸었다.
발이 가는 대로ㅡ
마음이 이끄는 대로ㅡ
하지만 발도 마음도 방향을 잃었다.
모든 곳이 낯설고 모든 풍경이 차가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저 여자 남편 바람피운데'
'정신과 치료받은 미친년이래'
'자살까지 시도했다며?'
속삭임과 수군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결국 돌다 보니 카페 앞이었다.
자주 갔던 민아의 카페.
도저히 안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연은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고립되어 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열심히 살아간다 생각했지만
모두 표면적인 것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우는 자신이 너무 초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고 싶었다.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느니
사라져 버리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딸 때문에.
엄마이기 때문에.
비록 망가진 엄마일지라도.
오후 3시,
으뜸중학교 교무실.
현우는 책상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나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와도
의미로 까지 연결되지 않았다.
자꾸 지훈과 소영.
은지의 얼굴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은지가 자신에게
소영의 불륜 사실을 알려준 이후.
지훈이 불륜 사실을 자백한 이후.
마음이 더욱 복잡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교무실에 울려 퍼지다가
누군가의 기척에 정적에 샇였다.
"김현우 부장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현우가 돌아보니 교감이었다.
평소보다 표정이 어두웠다.
현우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네, 교감 선생님."
"잠깐 저랑 좀 보실까요?"
교감실에 들어가자 장학사도 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여러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현우가 들어서자
장학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를 정리했다.
"김현우 선생님, 앉으시죠."
장학사의 말에 현우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의 쿠션이 평소보다 딱딱하게 느껴졌다.
교감과 장학사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학교폭력 사안 조사 말 입니다만."
장학사가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조사 기간을 단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었다고 판단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직 조사 시작도 안 했는데
어떻게 충분한 증거가..."
현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학사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피해 학생의 진단서입니다.
전치 2주의 타박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스트레스 장애,
의사 소견 및 진단이 나왔습니다."
현우는 진단서를 받아 보았다.
진단서 내용은 명백히 과장되어 있었다.
멱살을 잡은 것 정도로
전치 2주가 나올 리 없었다.
더욱이 스트레스 장애까지
진단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현장에 있던 다른 학생들
진술도 들어보고,
CCTV 영상도 확인해 봐야..."
"김현우 선생님."
교감이 현우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학교폭력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오래 끌면 소문만 더 퍼지게 되어 있어요.
가해 학생에게도 좋지 않고요."
현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은 어떻게 됩니까?"
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학폭위에서 결정될 사안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취해질 것입니다."
장학사가 말끝을 흐렸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전교 1등 학생은 가해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학폭위 결정에 따른 처벌을 받을 것이었다.
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팠다.
태준의 계획이었다.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한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누가 이런 걸 지시했습니까?"
현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들이 쳐다봤다.
"현우 선생님, 그런 말씀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교감이 진정시키려 했지만
현우는 멈출 수 없었다.
"한태준이죠?
그 사람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거죠?
피해 학생 부모를 회유해서
거짓 진단서를 떼게 하고!
장학사님까지 끌어들여서!
학폭위를 조작하려는 거 아닙니까?"
교감과 장학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 선생님, 진정하세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진정하라고요?
무고한 아이가 매장당하고 있는데
교육자로서 양심이 있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방관할 수 있습니까?"
현우의 목소리가 교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든 선생님들이 업무를 멈추고 현우를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에는
동조보다는 걱정과
동정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저러다가 큰일 난다',
'왜 저렇게 나서서 손해를 보려 하나',
'조용히 넘어가면 될 텐데'
하는 마음들이 말하지 않아도 읽혔다.
"학폭위는 내일 오후 2시에 열립니다."
장학사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현우의 항의는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었다.
현우는 교감실을 나와 복도에 섰다.
다른 선생님들이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았다.
누구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김 부장이 한태준이랑 싸운대"
"학폭위 조작이라고 큰소리쳤다면서"
"저러다가 징계받는 거 아니야?"
그때
교장이 지나가다가 현우를 불렀다.
"현우 선생님, 잠깐만요."
교장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복도 한쪽으로 현우를 데리고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런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정말로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교장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현우 선생님,
세상에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힘이 있어요.
그 힘에 맞서봤자
다치는 건 우리뿐입니다.
아이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더 큰 피해가 생길 수도 있어요."
교장의 말은 현실론이었지만
현우에게는 패배주의로 들렸다.
"그럼 포기하자는 말씀이세요?"
"포기가 아니라...
적절한 타협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한태준 씨는 이 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에요.
병원도 운영하고, 인맥도 넓고,
학부모 네트워크에서도 영향력이 큽니다.
우리가 맞서봤자..."
"그래서 무고한 아이를 희생시키자는 거죠?"
현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교장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갔다.
현우는 혼자 복도에 남아
창밖을 바라봤다.
현우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다.
15년 넘게 교사를 하면서
쌓아온 신념과 원칙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전교 1등 학생은 성실하고 착한 학생이다.
그런 아이가 한태준의 권력욕 때문에
희생당하게 둘 수는 없다.
그리고
나의 아내, 최소영.
그리고 그녀. 박은지 모두가.
한태준 입 위에서 놀아나는 현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주먹을 꽉 쥐었다.
정면승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현우는 곧바로 태준의 병원을 찾아갔다.
오후 5시.
청소년 마인드 정신건강의학과.
현우는 태준의 병원 앞에 섰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현우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태준의 술수에 말려들 뿐,
현우는 잘 알고 있었다.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 간호사가 인사를 했다.
환한 미소였지만 현우에게는 가식적으로 보였다.
이곳의 모든 것이
태준의 통제 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태준 원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예약이 있으신가요?"
"급한 일이라서요. 으뜸중학교 김현우입니다."
간호사가 원장실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잠시 후 진료실로 가라고 안내했다.
"똑ㅡ똑ㅡ"
현우는 진료실 문을 노크했다.
짧고 강한 노크였다.
"들어오세요."
태준은 환자 차트를 보고 있는 척했다.
현우가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었다.
권력자의 여유를 과시하고 있었다.
진료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벽면에는 각종 의료 관련 상장과
인증서가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고급스러운 펜과
명함꽂이가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태준의 지위와 권력을 상징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태준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조롱이 담겨 있었다.
현우는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
"학폭위 조사 말인가요?
그건 학교에서 알아서 처리할 문제 아닌가요?"
태준의 태연함이 현우를 더욱 화나게 했다.
뻔뻔함의 극치였다.
"피해 학생 부모를 그렇게 협박했어?
거짓 진술을 하도록."
"거짓 진술이라니요?
부모가 자녀를 걱정하는 게 이상한가요?"
"당신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뭔데!"
현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더 이상 돌려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냥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랄 뿐이죠."
태준이 비웃었다.
"정의? 무고한 아이를 매장시키는 게 정의야?"
"무고하다고 누가 그럽니까?
증거도 있고 진단서도 있는데요."
태준이 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봤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빛이 태준의 얼굴을 비췄다.
"김현우 선생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를 이길 수 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태준이 돌아서서 현우를 바라봤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카드가 없잖아요.
당신 아내의 비밀을 내가 쥐고 있는 한,
당신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태준이 비웃으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완전히 현우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현우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태준의 책상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양손을 책상 위에 짚었다.
태준과의 거리가 1미터도 안 되었다.
"그럼 이건 어때?"
현우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었다.
"당신 아내와 내가 어떤 관계일지 안 궁금해?"
태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방금까지의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뭐라고?"
태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평소의 자신감 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당신... 정말..."
태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인 펜이
손떨림 때문에 굴러 떨어졌다.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지
당신, 기대해도 좋을 거야."
현우는 태준의 반응을 보며
자신의 말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계속 압박을 가했다.
"이제 누가 더 많은 카드를 가지고 있는지
더 궁금해질 거야. 앞으로."
현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냉혹함이 담겨 있었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브라흐만 입니다.
제 소설 신도시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어요.
본업이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연재일을 지키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소설 <신도시>는 총 25화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본래 구상한 것은 30화 정도 분량이었으나,
내용의 전개를 조금 앞당겨서
흥미와 박진감 넘치게 빠르게 다룰 예정에요.
따라서 분량이 기존 보다 조금 길어질 수 있습니다.
본업으로 연재일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