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50분,
W호텔 로비.
엘리베이터 앞.
서연은 그 숫자만 뚫어져라 보았다.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누가 훔쳐볼까 두려웠다.
지나가는 투숙객 발소리가
서연주변으로 이어질 때마다
자신이 들키는 소리가 아닌가 하며
심장이 움찔거렸다.
데스크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몇 호실 가세요?"라고
부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연은 목덜미로 뜨거움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출까.
수십 번도 넘게 마음속에서 외쳤다.
돌아서야 한다,
지금이라도 뛰어내려 가야 한다.
그러나 발끝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끌려가듯,
숫자가 적힌 금속 문패 쪽으로
자꾸만 방향을 틀었다.
복도에 늘어선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는 게,
도망칠 틈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태준에게서 온 메시지.
[W호텔, 9시. 스위트룸 704호]
눈앞에 새겨진 숫자가 선명해지는 순간,
심장이 옷 속에서 마구 뛰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울렸다.
"역시 올 줄 알았어."
태준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았다.
평소와 전혀 다른 음성이었다.
태준이 덥석 서연의 팔을 잡았다.
그 손길이 진흙처럼 차갑고 끈적했다.
서연은 본능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때마다 태준의 손아귀는 더욱 강해졌다.
"아파요..."
"예전처럼 순종적으로 굴어야지"
태준이 서연을 침대로 끌고
침대 쪽으로 밀어냈다.
서연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원장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 네가 나한테 무슨 자격으로?"
태준의 눈빛이 변했다.
광기와 욕망이 뒤섞인 눈빛.
"당신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도
내가 알려준 거야.
네가 정신과 치료받는 것도
자살할 뻔한 것도
다, 내가 비밀로 해준 거고."
"그건..."
"그건 뭐? 5년 전 그 밤 기억 안 나?"
태준의 말에 서연의 얼굴이 하얘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이 떠올랐다.
5년 전, 겨울.
으뜸마을 1003동 904호.
서연의 아파트.
남편의 무관심과 외로움.
산후우울증이 악화되어
서연은 숨 쉬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욕조의 습기.
보일러를 켰는데도 공기가 식은 느낌.
그날 새벽, 서연의 집은 차가웠다.
화장실 바닥에는
수면제 가루가 소금처럼 흩어졌고
물이 가득 찬 욕조 안에서
서연은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오래된 눈물 같은
미지근한 온도의 물이었다.
“조용히 끝내고 싶다…”
서연이 속삭인 목소리가
욕실 타일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물감 한 방울이 천천히 번지듯,
물 위로 검게 번지는
피의 줄기가 서서히 퍼졌다.
‘빨리 없어지고 싶다…’
거실 쪽에서는
쿵쾅거리는 노크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관리사무소입니다, 가스 경보기가…”
경비 아저씨의 목소리가
두껍게 문을 울렸다.
대답할 힘도,
소리 지를 힘도 없었다.
숨이 차서 목구멍이 막혔다.
문이 ‘철컥’ 하고 돌려지는 소리.
누군가 급히 뛰어들어오는 발소리.
욕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공기가 함께 밀려 들어왔다.
하얀 가운 자락이 먼저 보였다.
한태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놀람이 아니라,
이미 상황을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서연 씨!”
태준은 욕조 물을 빼고
서연의 손목을 꺼내 수건으로 감쌌다.
손끝에 닿은 피부는 너무 차가웠지만,
아주 희미한 맥이 있었다.
그 순간 서연은 이상하게도
안도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응급실 형광등 아래,
간호사가 “자살시도 맞으시죠?”라고
묻는 순간, 태준이 손등을 내밀며 막았다.
“아니요. 단순 찰과상입니다.
수면제 복용 후 어지럼 증세예요.
전 의사이자, 이 환자분 주치의예요.”
그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단호했다.
펜 끝이 차트 위에서 방향을 바꾸고,
‘자살시도’라는 단어가
어디론가 미끄러져 사라졌다.
서연은 그때 알았다.
자신의 목숨이 구해진 것과 동시에,
어떤 빚이 생겼다는 것을.
태준의 손이 자신 손목을 감싸던 감각이,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기억나지?
그날 내가 없었다면
당신은 진짜 죽었을 거야."
" 내가 구해준 목숨이야.
내가 조작해 준 기록이고"
"제발... 그만해요..."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준은 서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5년 동안 널 지켜줬는데
이 정도 보답도 힘들어?"
태준의 손이 서연의 어깨에 올려졌다.
서연은 몸서리쳤다.
"싫어요... 정말 싫어요..."
"싫다고?
그럼 내일 아침 신문에
당신 가족 이야기가 나와도
상관없다는 거네?"
태준이 서연을 침대 쪽으로 밀었다.
서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안 돼요! 제발!"
그 순간 서연이 태준을 밀쳐냈다.
태준이 벽에 부딪혔다.
서연은 그 틈에 방문으로 뛰어갔다.
도어록을 풀고 문을 열었다.
"야! 박서연!"
태준의 외침을 뒤로하고
서연은 복도로 뛰어나갔다.
계단으로 뛰어내려 갔다.
7층에서 1층까지 숨이 차도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한태준이 따라오는 것 같아서
서연은 호텔을 나와서도 계속 뛰었다.
뒤돌아볼 수도 없었다.
오후 10시 30분,
민아의 카페 '시간'.
민아는 이른 마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의자를 올리고 바닥을 닦았다.
그때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민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서연이었다.
얼굴이 창백했고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눈가는 빨갛게 부어있었다.
민아는 급히 문을 열었다.
"서연 씨? 무슨 일이에요?"
서연은 대답 대신 민아를 안았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사장님... 저 어떡하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고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었어요.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서연의 목소리가 흐느낌에 섞였다.
민아는 서연을 카페 안으로 데려왔다.
"서연 씨, 진정하세요. 천천히 말씀해 봐요."
민아는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끓여주었다.
서연은 컵을 받아 들고도 계속 떨고 있었다.
"민아 씨... 저희 남편이..."
서연이 모든 것을 털어놨다.
남편 우석과 절친 소영의 불륜.
오래도록 지속된 태준의 협박.
오늘 호텔에서 일어난 일.
5년 전 자살시도와 기록 조작.
"그 사람이... 한태준이 저를...
계속 이용하려고 해요.
저한테 그런 짓을 하려고..."
민아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단골 노트에 기록했던
모든 일들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다니.
"당장 신고해야 해요. 경찰에."
"안 돼요...!!
그 모든 것들 튀어나오면
제 딸이... 남편이... 모든 게 끝나요."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절망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요. 정말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민아가 서연의 손을 꽉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서연 씨, 들어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떻게요..?"
"저는 지금까지 모든 걸 지켜봤어요.
카페에서 오가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들. 모두 기록해 놨어요."
민아가 카운터에서
검고 작은 노트를 가져왔다.
단골 노트였다.
"여기에 모든 게 있어요.
모든 관계의 비밀과 연결고리."
민아가 노트를 보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로
한태준을 어떻게 막을 수 있나요?"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민아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같은 시간,
지훈의 사무실.
현우가 지훈을 찾아왔다.
지훈은 무척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여길..."
"저를 좀 도와주세요."
현우가 직접적으로 말했다.
"네?" 지훈이 당황한 듯 대답했다.
"혼자서는 한태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훈 씨도 그 자식한테 협박당했잖아요.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지훈이 현우를 쳐다봤다.
이틀 전만 해도 어색한 공간에서
어색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사람이
이제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지훈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사실 제가... 혼자 알아본 게 있어요."
지훈의 말에 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태준이 저한테 말했었거든요.
소영 씨가 저 말고도 다른 남자들을
더 만나고 있다고."
지훈이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저도 궁금해서... 알아봤어요.
소영이가 만났던 남자가 누굴까.
홍우석이라는 사람이에요.
보건복지부 사무관."
"홍우석?"
"네. 서연 씨... 아시죠?
소영 씨 친구. 그분 남편이에요."
현우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서연 씨는 소영과 친한 사이이고
은서를 돌봐주기도 했는데
서연의 남편 홍우석과 소영이 불륜관계라니.
"정말이에요?"
"저도 많이 알아보니까.
그 홍우석이라는 사람도
한태준한테 뭔가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훈이 계속 설명했다.
"공무원이라서 스캔들에 민감하니
한태준이 그걸 이용해서 뭔가 시킨 것 같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직권과 관련된 일일 거예요."
현우가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일단 홍우석을 만나보면
한태준을 공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지훈이 대답했다.
현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영의 또 다른 불륜남. 그것도 서연의 남편.
모든 게 더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그럼 오늘 밤, 홍우석을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제가 한번 만나볼게요."
지훈은 결심을 굳힌 듯 대답했다.
"한태준을 무너뜨리면...
소영이는 어떻게 되죠?"
"그건... 나중에 생각하시죠."
지훈의 말에 현우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밤 11시,
으뜸마을 펜트하우스
은지는 거실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태준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휴대폰에 현우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우리 관계 당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은지는 그 메시지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우가 정말 태준에게 말했을까?
아니면 허풍일까?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한태준이 들어왔다.
표정이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차갑고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여보, 늦었네."
은지가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하지만 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곧장 은지 앞으로 다가왔다.
"김현우."
태준이 차갑게 말했다.
은지의 얼굴이 순간 하얘졌다.
"갑자기 왜 그래?"
"그 교사 새끼와 얼마나 오래 만났어?"
태준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가득했다.
"여보.. 그건..."
"얼마나 날 우습게 봤으면 이렇게 만들어?"
태준이 은지를 쳐다보는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렇게 나를 바보로 만들고 싶었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뭐야? 사랑이야? 진실한 사랑?"
태준이 비웃었다.
"그래, 좋아. 사랑이라면 끝까지 가보자."
태준이 휴대폰을 꺼냈다.
"김현우한테 전화해. 지금 당장."
"여보... 제발..."
"안 해? 그럼 내가 할게."
태준이 현우의 번호를 누르려했다.
"안돼!"
은지가 태준의 손을 잡았다.
"제발... 그러지 마..."
"왜? 사랑하는 사이 아니야?
당당하게 공개하면 되잖아."
태준의 목소리가 점점 위험해졌다.
"당신도, 김현우도 내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이제야 알게 해 줄 거야."
자정이 넘은 시간,
으뜸마을 인근 공원 벤치.
소영은 우석의 협박성 메시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사람이 없는 공원 구석 벤츠에서
둘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
"왜 이런 식으로 연락하시죠?"
소영의 목소리가 차갑고 경계심에 가득했다.
우석을 보는 눈빛에는 애정보다는
불편함과 거부감이 더 많았다.
"소영 씨... 미안해요."
우석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과
애타는 마음이 담겨있었지만
소영은 그것을 외면했다.
"미안하다고요? 협박해 놓고 미안하다고?"
소영은 우석과의 관계를 깊게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은 단순한 실수였고,
현실도피를 위한 일회적 만남이었을 뿐이다.
우석이 자꾸 진심을 보이고
깊은 관계를 원할수록
소영은 더욱 부담스러워졌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 우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 와이프]
우석이 당황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 응, 늦어서 미안해.
회의가 길어져서..."
우석이 거짓말을 하는 동안
소영은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네... 집에 곧 들어갈게요. 응, 알았어."
전화를 끊은 우석을 보며
소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어요?"
우석이 깜짝 놀라며 얼굴이 하얘졌다.
"그... 그게..."
"혹시 어떻게 되세요 부인 이름이?"
"서연이요... 박서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소영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연 언니요?
박서연이 당신 부인이라고요?!"
소영이 벌떡 일어났다.
"소영 씨... 왜 그러세요?"
소영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서연 언니는...
우리 은서를 돌봐주는 분이에요!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분이라고요!"
소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분노와 죄책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언니 남편과 제가... 어떻게 이런 짓을..."
미쳤어... 정말 미쳤어...
은서한테 어떻게 얼굴을 들고..."
소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우석이 소영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영은 더욱 흥분했다.
"저리 가요! 건드리지 마세요!"
소영이 우석의 손을 뿌리쳤다.
소영의 죄책감이 폭발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자기혐오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 대한 깨달음.
"다신...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저도 당신을 모르는 사람으로 살 거예요."
소영이 벤츠를 박차고 일어섰다.
"소영 씨! 잠깐만요!"
우석이 소영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소영은 뿌리치고 뛰어나갔다.
우석은 공원에 혼자 우두커니 남아
절망에 빠졌다.
자신에게는 운명 같은 사람이었지만
소영에게는 지우고 싶은 실수였다.
그리고 이제 그 실수가
모든 사람을 파괴하고 있었다.
새벽 1시,
으뜸마을 1001동 703호.
민아의 집.
서연이 다녀간 뒤 정신이 몽롱해졌다.
누가 뭘 시키고 뭐가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민아는 모든 게 당황스러웠다.
뭔가 잘못되었다.
아니, 모든 게 잘못되어 있었다.
서연의 떨리던 목소리. 한태준의 협박.
5년 전 자살시도. 우석과 소영의 불륜.
머릿속에서 모든 사건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한 거지?'
서연에게 도와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자신이
지금은 너무 가벼워 보였다.
몇 시간째 소파에서
골몰히 생각에 잠겼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민아는 주방으로 갔다.
차갑고 투명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뿌옇게 흐려있었다.
'일단 모든 걸 다시 정리해 보자.'
민아는 평소 습관대로
소파로 돌아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과
그동안 노트에 기록한 것들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지퍼를 열고 손을 넣었다.
지갑의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열쇠고리의 차가운 금속.
핸드크림 튜브의 말랑한 감촉.
볼펜 두 자루.
그리고...
손가락이 가방 안쪽 구석까지
더듬었다. 노트가 없었다.
'어?'
민아는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소파 위에 쏟아냈다.
지갑, 열쇠, 핸드크림, 영수증 몇 장.
볼펜, 그리고 립밤.
검은색 단골노트는 없었다.
"설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민아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둘러봤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재킷 주머니, 바지 주머니.
소파 쿠션 사이. 현관문 서랍장 위.
노트가 없다.
"카페에... 두고 왔나?"
민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오늘 하루를 되짚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할 때 분명 가방에 넣었다.
확실하다.
점심.
단골 아줌마 소식을 적었다.
아들이 곧 결혼한다는 소식.
확실히 기억났다.
그리고 서연이 왔을 때.
'그때 꺼냈지.'
서연에게 노트를 보여줬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다음은?
민아는 기억이 흐릿했다.
서연이 울면서 이야기할 때
민아는 정신이 그쪽에 쏠려있었다.
그 노트를 어디에 뒀지?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나?
테이블 위에 그대로 뒀나?
아니면...
'혹시 가방에 안 넣고 잠깐 꺼냈나?'
민아는 현관으로 다시 가봤다.
신발장 위를 뒤졌다.
우산 꽂이 옆. 택배 상자 사이.
거실로 돌아와,
TV 선반. 화장실 선반.
냉장고와 식탁 위까지.
노트는 아무 데도 없었다.
순간, 민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노트에는
단순히 단골고객의 취향만
기록한 것 아니었으니까.
최소영. 김현우. 오지훈. 박은지.
한태준. 박서연. 홍우석.
모든 사람들의 이름.
그들의 관계. 그들의 비밀.
만남장소와 대화 내용까지.
모든 것이 그 노트 안에 있었다.
"여기에 모든 게 있어요.
모든 관계의 비밀과 연결고리."
아까 서연에게 했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손이 떨렸다.
만약 그 노트를 누군가 발견한다면?
만약 한태준이 발견한다면?
아니, 한태준이 아니라도.
박은지가, 홍우석이, 김현우가 발견한다면.
누구라도,
그 노트를 읽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안돼!"
민아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카페 CCTV를 확인해야 한다.
아니, 지금 당장 카페로 가야 한다.
재킷을 다시 걸치려는 순간,
민아의 손이 멈췄다.
혹시 서연이 실수로 가져간 건 아닐까?
아니다.
서연이 가져갈 리 없다.
민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민아는 오늘 하루를 다시 떠올렸다.
카페를 정리할 때,
화장실을 닦았고
창고를 정리했고
바닥을 쓸었다.
의자를 올렸다.
만약, 카페에 없다면?
그럼 어디에 있는 걸까?
'그때... 노트를 본 기억이 없어.'
분명 서연과 대화할 때까지는 있었다.
하지만 서연이 떠난 후에는.
민아의 기억이 텅 비어있었다.
문은 잠갔었나?
아니, 서연이 나간 후에도
한동안 문을 안 잠갔던 것 같다.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만약, 그 틈에
누군가 들어와서 가져갔다면?
민아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검은색 노트,
겉보기엔 평범한 노트.
그 안에는 이 도시의
숨기고 싶은 비밀이 담겨있었다.
"어떡하지..."
민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서연에게 큰소리쳤던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 카페로 가봐야 할까?
아니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까?
만약 노트가 정말로 사라진 거라면...
민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한태준이 노트를 발견한다.
모든 기록을 읽는다.
그리고...
"안 돼..."
민아는 눈을 떴다.
여기 앉아서
최악만 상상하고 있을 수는 없다.
민아는 벌떡 일어났다.
재킷을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 카페로 가야 한다.
노트를 찾아야 한다.
문고리를 잡는 손이 떨렸다.
혹시 모른다.
어딘가 구석에 떨어져 있을지도.
쓰레기통에 섞여 들어갔을지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신발을 신으려는데 손이 떨렸다.
떨려서 제대로 끈을 묶을 수가 없었다.
'제발... 카페에 있어줘.'
'테이블 밑에 떨어져 있어 줘.'
'쓰레기봉투 안에 있어줘.'
'제발...'
민아는 간절히 빌었다.
그 노트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몰랐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