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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도시 22화

USB

by 안개홍

보건복지부 감사실 문 앞.


우석은 멈춰 섰다.

노크하려던 손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이 문을 열면...'


공직. 명예. 미래.

서연. 딸. 가족. 직장.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소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송역 플랫폼.

빈소 앞 환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은서.

엄마를 잃은 일곱 살 아이.


우석은 눈을 감았다.

주머니 속에는 USB가 들어있었다.

이 작은 물건이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했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었다.

감사관 두 명이 놀란 표정으로 우석을 쳐다봤다.


"홍 사무관? 이 시간에..."


"자백하러 왔습니다."


우석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한태준이 저를 협박했습니다."


감사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 명이 급히 녹음기를 켰다.


"불륜 사진으로 저를 협박해서

감사 명단을 조작하게 했습니다."


우석은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손이 떨려서 USB가 책상에 떨어질 뻔했다.


작고 검은 USB.

자신과 아내, 그리고 소영을 죽인 물건.


몇미리그램도 안 되는 플라스틱 덩어리.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의 무게는 달랐다.


"USB에 우회접근 프로그램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새벽에 감사실에 들어가서

한태준 병원인 청소년 마인드 정신건강의학과를

감사명단에서 삭제했습니다."


감사관이 펜을 들어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석은 목이 메었다.


"한태준은 어린 환자들에게

콘서타 약물을 과다 처방했습니다.

그 약물을... 아이들에게..."


우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심리검사를 실시하지 않고도 보험 청구했습니다.

상담치료 횟수도 부풀렸고요.

환자에게 약을 처방해 준다는 조건으로

서류상에 매주 상담한 것으로..."


"증거가 있습니까?"


감사관이 날카롭게 물었다.


"한태준이 저에게 직접 말했습니다.

자랑하듯이...

감사만 피하면 된다고...

아마도 병원 전산에 다 남아있을 겁니다."


감사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홍 사무관, 앉으시죠."


우석은 그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털어놨다.


최소영과의 관계.

한태준과의 첫 만남.

소영과의 불륜으로 협박을 받은 과정.

새벽 4시 42분, 감사실 침입.

감사 명단 조작의 전말.

USB까지 구해준 한태준의 배후의 세력들.


두 시간이 넘게 진술이 이어졌다.


우석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가

마치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이 최소영에게, 은서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내인 서연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감사실장이 조사를 중지하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경찰청입니까? 보건복지구 감사관실입니다.

긴급 고발 건으로 연락드립니다.

약물 과다 처방, 보험 사기, 공무원 협박..

네, 지금 즉시... 조사가..."


우석은 창밖을 바라봤다.


신도시의 아침.

반듯하게 정리된 건물들.

계획도시의 질서 정연함.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어둠은

얼마나 오랫동안 깊었었는지,


어제의 소영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는지.




오전 10시 30분.

청소년 마인드 정신건강의학과.


태준은 진료실에서 차트를 보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태준은 진료실 창문을 슬쩍 보았다.


경찰차 네 대가 병원 앞에 섰다.

검찰 지휘를 받은 형사 여섯 명이 내렸다.

보건복지부 감사관 세 명도 함께였다.


"검찰 지휘로 압수수색 영장 집행합니다."


대기실에 있던 환자들이 놀라 일어났다.

엄마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간호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태준이 깜짝 놀라 진료실에서 나왔다.


"무슨... 무슨 일이시죠?"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었다.


"한태준 씨, 당신은

의료법위반 및 사기 혐의

공문서 위조 및 변조,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병원 및 자택에 있는

진료기록, 처방전, 컴퓨터 본체, 회계장부 등을 일체 압수합니다. "


형사가 영장을 보여줬다.

태준은 영장을 보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모든 혐의가 나열되어 있었다.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찰과 감사관들이 병원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잠깐, 이건 환자 개인정보가..."


태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장 범위 내입니다."


형사가 차갑게 대답했다.


진료실. 상담실. 약품 보관실. 사무실.

경찰들이 모든 곳을 뒤졌다.


진료 기록이 모두 압수되었다.

처방전 대장이 박스에 담겼다.


컴퓨터 본체가 분리되었다.

환자 차트가 상자에 쌓였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간호사 하나가 몰래 휴대폰을 꺼내

병원 앞 경찰차를 찍었다.


밖에서는 학부모 몇 명이 모여 있었다.


"한태준 병원에 경찰 들어가는 거 아니야?"

"헐... 진짜 압수수색이네"

"완전 대박..."




오전 11시.

으뜸마을 맘카페 게시판.


[제목 : (긴급) 청소년 마인드 한태준 경찰 압수수색 중]


방금 병원 앞 지나왔는데

경찰차 여러 대 있고

형사들이 들어가더라고요.

압수수색 영장 집행하는 거 같았어요.


약물 과다 처방이랑

보험 허위 청구 혐의래요.

공무원 협박까지...


사진 첨부합니다.



댓글이 1분 만에 50개를 넘어섰다.


[ㄴ 대박... 진짜네요]

[ㄴ 우리 애 거기 다니는데 어떡해..]

[ㄴ 최소영 씨 자살이랑 관련됨?]

[ㄴ 한태준이 최소영을 협박했다는 소문...]

[ㄴ 최근 학폭위도 조작해서 전교 1등 전학 보낸다던데]

[ㄴ 진료 기록 다 압수되나요? 우리 애 처방전도...?]



20분 후, 또 다른 글이 올라왔다.


[제목 : 한태준 학폭위 조작 의혹도 수사 중이래요]


경찰이 으뜸중도 조사 나간다네요.

전교 1등 학생 학폭위 사건

한태준 원장이 조작했다는 제보 들어왔대요.


피해자 학생 가짜 진단서 발급받게 하고

피해자 학생 부모한테 돈으로 회유했다는데...


그 학생 그럼 무고한 거였어요?



[ㄴ 헐... 그럼 학폭위도 억울하게?]

[ㄴ 어쩌겠어... 돈 없고 빽 없으면 못 사는 세상...]

[ㄴ 한태준 진짜 최악이네요...]

[ㄴ 한태준이 학부모회도 강제로 열었어요. 양심발언합니다...]

[ㄴ 마누라가 바람필만 하네.. 인간쓰레기.]

[ㄴ 와이프가 김현우 선생이랑 바람피운 게 여기도 해당되나...?]


접속자가 폭증했다.

으뜸마을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맘카페는 신도시의 심장이었다.

좁은 세계, 촘촘한 인간관계.


여기서 시작된 이야기는

30분이면 동네 전체로 퍼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학원 앞 벤치에서,

그리고 마트 계산대에서.




오후 6시.

박은지의 수학학원.


텅 빈 교실.

의자가 거꾸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은지는 원장실에 혼자 앉아 휴대폰을 켰다.

으뜸마을 맘카페에 접속했다.


남편 한태준 병원 압수수색 소식이

실시간 인기 게시물 1위였다.


댓글이 수백 개를 넘고 폭발했다.

태준의 폭력과 권력 앞에 숨죽인 사람들.

아이가 연관될까 두려워했던 학부모들.

모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ㄴ 진작 신고했어야 했는데 ]

[ㄴ 우리 애 약 먹더니 이상해졌었어요 ]

[ㄴ 그 사람한테 찍히면 끝이라고들 해서...]

[ㄴ 드디어 무너지네요.]

[ㄴ 이제야 숨통 트이는 기분입니다.]

[ㄴ 으뜸마을 최고 권력자였는데, 속이 다 시원하네요.]


한태준이 무너지자

억눌려 있던 모든 이야기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은지는 새 글 작성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김현우를 구해야 했다.

김현우만은..


은지는 떨리는 손으로 타이핑했다.


[제목 : 박은지입니다. 실명으로 말씀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박은지 수학학원을 운영하던 박은지입니다.

최근 맘카페에 올라온

저와 김현우 선생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김현우 선생님께 죄송합니다.

그리고 으뜸마을 학부모님들께도 사과드립니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남편이 정서적 학대, 협박, 감시.

제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통제했습니다.


김현우 선생님은 그런 저를 위로해 주셨을 뿐입니다.

이건 변명이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남편 한태준이 이 동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침묵했던 것도 제 잘못입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콘서타를 과다 처방했습니다.

상담 한 번 안 하고 약만 주면서

의료보험은 몇 배로 청구했습니다.


무고한 전교 1등 학생을 학폭 가해자로 만들려고

가짜 진단서를 발급했습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을 협박해서

병원 감사를 피해 갔습니다.


고인이 된 최소영 씨도 남편이 협박했습니다.

소영 씨의 죽음에도 남편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제 남편 한태준이 더 이상 이 동네에서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박은지 올림



은지는 마지막 문장을 쓰고

한참을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은지는 떨리는 손으로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게시글이 올라갔다.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ㄴ 실명으로... 대단하시네요]

[ㄴ 한태준이 진짜 문제였네요]

[ㄴ 은지 씨 용기에 박수를]

[ㄴ 현우 선생님도 피해자였구나]

[ㄴ 한태준 때문에 모두가...]

[ㄴ 구속수감 시켜야 합니다]


맘카페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저녁 9시.

세종경찰서 수사과.


형사 세 명이 압수한 증거물을 검토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한태준의 병원에서 가져온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태준 쪽 증거는 충분해요."


형사 B가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약물 과다 처방 기록이 명백하게 남아있어요.

정상 기준의 3배..."

"보험 허위 청구도 수백 건이에요."


형사 C가 덧붙였다.


"학폭위 관련 증거는?"

형사 A가 물었다.


"진단서 발급 기록 조작 흔적 있고

피해 학생 부모와 통화 녹음도 확보했습니다."


"홍우석 자백도 있으니

구속 영장 청구 문제없겠네."


그때.

형사 C가 검은색 노트를 들고 왔다.


"형사님, 그런데 이거 좀 보세요."

"뭔데?"


형사 A가 검은색 노트를 받아 펼쳤다.


"이게 뭐야?"


형사 A가 페이지를 넘겼다.

형사 B가 노트를 들여다봤다. 눈이 커졌다.


"이거... 맘카페 폭로된 사람들 아니에요?"

"... 어?"


형사들이 동시에 노트를 봤다.


"소영, 지훈, 우석... 맞네.

맘카페에 나온 이름들이야."


형사 A가 노트 표지를 확인했다.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카페, 시간'


"여기 으뜸마을에 있는 그 카페 아니에요?"

"맞아. 거기 사장이..."

"김민아."


형사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김민아 노트가 왜 여기에 있지?"


침묵이 흘렀다. 형사 A가 일어섰다.


"지금 바로 김민아한테 전화해.

이 노트 소유자인지 확인하고

한태준하고 홍우석하고

어떤 관계인지 알아봐야겠어."




같은 시간.

민아의 카페.


신도시 저녁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전날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정리되지 않은 소문과

흩날리던 진실의 파편뿐이었다.


민아는 카페 문을 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간신문이 문틈 아래로 밀려 들어왔다.

1면 헤드라인엔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보건복지부 사무관, 감사 비리 자백...

으뜸마을 청소년정신과 원장 구속 수사'


그 밑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 있었다.


‘약물 과다 처방 및 보험 사기,

공무원 협박 정황 포착’


민아는 신문을 접어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안에 적힌 이름들은

모두 자신이 노트에

적어온 사람의 이름이었다.


우두커니 카페 한 가운데 서있던 침묵을

민아의 휴대폰 알림음이 깨버렸다.


"여보세요, 김민아 씨?

세종경찰서 수사과입니다.

혹시 지금 시간 되시면

서에 좀 나와주실 수 있으세요?"


"무슨 일이시죠...?"


"한태준하고 홍우석 압수수색 수사 중에

김민아 씨 소유로 추정되는 노트가 발견되어서요.

최근 노트를 잃어버리신 게 맞나요?"


"네.. 검은색 노트 맞습니다.

혹시 어디서 찾으셨나요...?"


"일단, 본인 거 맞으시면

지금 바로 경찰서로 좀 와주세요."


민아는 휴대폰을 든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노트.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그 이름들.

그들이 카페에 왔던 시간들.

비밀들. 그들이 나눴던 대화들.


그리고 이제 그것들이

빛 아래 드러날 것이었다.


민아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왜 적었을까.

민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기록하고 싶어서,

기억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저 재밌어서?


그날 밤. 신도시는 다시 조용해졌다.

무너진 진실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발밑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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