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20분.
세종 경찰서 2층 참고인 조사실.
형광등이 깜빡였다.
불빛이 켜질 때마다
조사실 안 먼지가 하얗게 떠올랐다.
민아는 차가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맞잡았다.
책상 위,
투명 비닐봉지 안에 담긴 검은색 노트 한 권.
커피색으로 바랜 표지.
구겨진 모서리. 손때가 묻은 고무줄
민아의 단골노트였다.
"김민아 씨"
키보드를 두드리던 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 노트 본인 거 맞습니까?"
민아는 책상 위 노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제 카페에서 쓰던 단골노트예요."
"홍우석 씨 서재에서 나왔습니다."
"... 네?"
민아의 손이 멈췄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홍우석 씨요...?"
"네, 홍우석 사무관 자택 서재에서
압수수색 중 발견됐습니다."
민아는 숨이 막혔다.
왜 한태준 병원이 아닌 홍우석의 서재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우석 씨 서재에서..."
"혹시 홍우석 사무관과는 아는 사이입니까?"
"아뇨, 카페 손님이긴 하지만...
그렇게 친하진 않아요."
형사가 펜을 돌리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홍우석 씨 집에
민아 씨 노트가 있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민아는 당황했다.
'CCTV에 본 후드를 쓴 사람.
당연히 한태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우석 씨였나?
홍우석이 왜 내 노트를...'
"노트를 잃어버린 게 언제죠?"
"나흘 전쯤이요.
그날 밤늦게 카페 마감을 하고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나왔는데
노트가 없었어요."
"CCTV는 확인했습니까?"
"네. 그런데 후드를 눌러써서
얼굴이 안 보였어요."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적었다.
"노트를 분실하기 전
카페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민아는 잠시 망설였다.
".... 그날 밤, 박서연 씨가 왔어요."
형사의 손이 멈췄다.
"박서연 씨요? 홍우석 씨 부인 말입니까?"
"네..."
"노트가 사라진 시간에?"
"아뇨. 그전에 나가셨어요."
형사를 조사 서류를 덮으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박 형사."
"박서연 씨, 지금 당장 참고인으로 소환해."
조사실 문이 닫혔다.
민아는 멍하니 노트를 바라봤다.
30분 후.
같은 참고인 조사실
문이 열리며 가벼운 빛이 들어왔다.
형사와 서연이 함께 들어왔다.
검은색 카디건을 걸친 서연.
부운 눈으로 초조하게 서있는
그녀의 손끝엔 희미한 상처 자국이 있었다.
형사가 자리에 앉자 서연도 천천히 앉았다.
"박서연 씨. 이 노트 보신 적 있습니까?"
형사가 비닐봉지에 속 노트를 가리켰다.
"... 네."
서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게 남편 서재에서 나왔습니다. 누구 거죠?"
"... 김민아 씨 거예요."
민아가 서연을 쳐다봤다.
서연은 민아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노트를 훔쳐간 사람이 누굽니까?"
오랜 침묵 뒤 서연이 말을 이었다.
"저예요."
"그럼 왜 본인 남편 서재에 있었습니까?"
"제가 거기에 숨겨뒀어요.."
서연이 천천히 대답했다.
"왜 숨기셨죠?"
서연이 눈을 감았다.
"남편이 알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형사가 펜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박서연 씨, 왜 이 노트를 가져갔습니까?"
서연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결심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5년 전,
제가 욕조에 누워 자살을 결심한 날이었어요."
민아가 숨을 죽였다.
"한태준이... 그 사람이 저를 구했어요."
서연의 손이 떨렸다.
"그 사람이 제 기록을 조작했어요.
자살시도를... 우발적 사고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걸로
날... 협박했어요.
가족들에게 알리겠다고. 딸한테까지..."
서연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말 한마디에 저는...
여태껏 죽은 사람처럼 살았어요."
"우울증 때문에
한태준 병원 약을 끊을 수가 없었어요.
과다 처방인 것도 알았어요.
하지만... 약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서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 한태준의 개처럼... 부당한 일을 했어요.
그 대가로 돈을 받았고, 가끔 호텔에 불려 가서..."
서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남편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가 매일 밤 약을 삼키며 무너지는 걸.
침실에서 매일 울고 있는 걸.
한태준에게... 그렇게 당하고 있다는 걸."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걸.
그 여자가... 제 친구 최소영이라는 걸."
조사실에 침묵이 흘렀다.
"소영이는 제가 얼마나 힘든지 알았어요.
제 우울증도, 제 고통도 전부. 그런데..."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남편과... 바람을 피웠어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날 밤,
민아 씨 카페에서 그 노트를 봤어요.
사람들 이름과 사실들이 빽빽이 적혀 있더라고요."
서연이 눈물을 닦았다.
"최소영의 불륜. 그리고 소영이 남편 김현우와
한태준 부인 박은지의 불륜까지... 모두요."
"전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서 모든 게 사라졌어요.
남편 명함 뒤에 가려진,
이름 없고 볼품없는 여자가 됐어요."
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제가 아파도, 무너져도...
이 세상은 너무 조용했어요."
"침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대신,
세상에 외치고 싶었어요.
제가 겪은 이 지옥이
단순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이 도시가 얼마나 거짓으로 빛나는지.
이 반듯한 아파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너지고 있는지."
서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그 외침이 소영이를 벼랑 끝으로
몰 줄은... 정말 몰랐어요."
서연이 고개를 떨궜다.
"소영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경찰서 조사실 밖으로
가을 소낙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서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키보드 소리만 조사실을 채웠다.
"그럼 맘카페에 게시한 것도 서연 씨입니까?"
"... 네. 모두 제가 올렸어요."
한 시간 전
세종 경찰서 3층, 다른 조사실.
우석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수갑은 채워지지 않았으나,
이미 느껴지는 무게는 같았다.
"홍우석 씨. 감사자료 조작 사실 인정하십니까?"
"... 네."
"한태준 원장이 협박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형사가 서류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현재 공무원 신분 직무정지 상태입니다.
보건복지부 감사관실에서
징계위원회 소집 통보서를 발송했어요."
형사가 봉투를 우석 앞으로 밀었다.
우석의 손이 떨렸다.
표지에 인쇄된 글자.
'국가공무원법 제78조 제1항
형법 제123조(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징계의결요구서 : 보건복지부 감사담당관'
우석은 봉투를 조심히 열고 속지를 꺼냈다.
'허위 감사명단 조작 및 외압 수용에 따른 직권남용
파면 상신 후 징계위원회 개최 예정'
'형사절차 병행:
공문서 위조 및 직권남용 혐의
검찰 송치 예정'
우석의 시야가 흔들렸다.
'15년 공직생활. 파면이라...'
두 글자에 한순간에 사라질 것 같은
그동안의 삶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형사님."
우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아까 제 서재에서 발견한 그 노트...
그거 제가 훔친 겁니다."
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아내 박서연과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진술서에 그렇게 남겨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형사는 건조하게 대답하고 조사 서류를 덮었다.
다음 날, 오후 2시.
으뜸중학교 교장실.
현우는 서류 한 장을 건네받았다.
'대기발령 통보
사유: 품위유지의무 위반 및 학부모 신뢰 훼손'
교장의 붉은 인주가 선명했다.
"교육청 징계위원회 소집 예정입니다.
학교 명예 실추 건으로 정직 검토 중이에요."
예상했던 일이었다.
교장이 한숨을 쉬며 현우를 바라봤다.
"이건 그렇고..."
교장이 다른 서류를 꺼냈다.
"한태준 씨 건으로 경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학교폭력위원회 조작 의혹으로
교육청 장학사랑 학부모위원들이
경찰 소환됐다고 하더군요."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장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한태준 씨가 자기 아들을
전교 1등 시키려고...
무고한 전교 1등 학생을 학폭위로 조작한 사실.
가짜 진단서 만들고,
피해 학생 부모 매수한 정황까지 나왔어요."
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서..."
교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학교폭력위원회 의결이 전면 취소됩니다.
수사도 계속될 거고요.
나쁜 일 한 사람은 응당 처벌받아야겠죠.
저한테도 책임이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
교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학생... 참 억울했지.
김 선생도 잘 알고 있었잖아요.
저도 그동안... 참 비겁했습니다.
이 자리가 뭐라고.
김 선생님 덕분에 제가 많이 반성했어요."
교장이 현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김 선생님은 정말 좋은 교사입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쉽게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현우는 교장실을 나섰다.
모든 걸 잃었다.
아내도, 직장도, 명예도.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후련했다.
전교 1등 학생.
그 아이는 이제 억울하지 않게 됐다.
학폭위가 취소될 것이다.
한태준은 무너질 것이다.
더 이상 누구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그 아이는 지켰구나.'
현우는 계단을 내려갔다.
교문을 나섰다.
저녁 햇살이 교정을 비췄다.
현우는 잠시 그 빛 속에 서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찾았다.
'박은지'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보세요?"
은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고 떨리는 목소리.
"저... 김현우입니다."
"......"
"전화해도 괜찮았을까요?"
"... 네."
침묵이 흘렀다.
"은지 씨, 저..."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선생님."
은지가 먼저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 때문에 선생님이... 미안해요. 정말..."
은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에요. 은지 씨 잘못 아니에요."
현우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도 잘못했어요.
아내를 지키지 못했고,
은지 씨를 지키지 못했어요."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이 말하고 싶었어요."
현우는 휴대폰을 내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교문 앞.
학원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차에 올랐다.
평범한 일상.
하지만 현우에게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풍경.
현우는 천천히 걸어갔다.
으뜸마을 쪽으로.
석양이 아파트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같은 시간.
경찰서 2층 참고인 조사실.
민아가 서류에 마지막 서명을 남겼다.
형사가 봉투를 꺼냈다.
'증거물 23-115, 박서연 자수 건'
노트가 비닐봉지 속으로 들어갔다.
붉은 봉인 테이프가 붙었다.
찍—
테이프 소리가 울렸다.
"수사 종료 전에는 반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피해자 참고인 겸 소유자로서
잠시 열람은 가능합니다."
민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누군가의 이름, 날짜, 그리고 한 문장씩.
그때.
민아의 손이 멈췄다.
"... 어?"
노트 중간 부분.
페이지가 찢어진 흔적이 있었다.
깨끗하게 찢어진 게 아니라
급하게 뜯어낸 것 같았다.
종이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했다.
민아는 페이지를 세어봤다.
분명 아까 전까지 이런 흔적이 없었다.
"노트가... 찢어진 것 같아요."
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요?"
"노트에서 페이지 몇 장이 찢어졌어요."
"찢어진 거 확실합니까?"
형사가 노트를 받아 확인했다.
"... 확실하네요. 누가 찢은 겁니까?"
민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찢은 게 아니에요.
그리고 서연 씨도 아닐 거예요."
민아는 찢어진 부분을 응시했다.
'이 페이지에 뭐가 적혀 있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적었으니까.
민아는 눈을 감았다.
노트에 적었던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찢어진 페이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