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새벽.
세종경찰서 지하 1층 증거물 보관실.
이경위는 주위를 살폈다.
복도는 조용했고 아무도 없었다.
이경위는 서둘러 증거물 보관실로 들어갔다.
'증거물 23-115, 박서연 자수 건'
검은색 노트.
이경위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노트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페이지를 넘겼다.
- 10월 4일, 정장 차림 남자.
한태준, 오지훈, 교육청 언급
K로 불리는 사람에게 보고?
- 약속장소.
Dataloop
10/14, 19:30, 시청 근처.
Lounge72 Bar. 8F'
- 컨소시엄, 신도시 프로젝트.
이경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이경위는 기록이 새겨진 페이지를
거칠게 찢어냈다.
찢어낸 페이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사물함을 열었다.
'증거물 32-118. 홍우석 자백 건'
검은색 USB.
이경위는 주머니에서
똑같이 생긴 USB를 꺼냈다.
기존 USB의 라벨을 떼어 붙였다.
시리얼이 비슷하게 보이도록
표면 스크래치를 내고,
봉투 테이프를 새로 재봉인했다.
원본은 안쪽 포켓으로 사라졌다.
이 작은 검은 조각이 품은 폭발력을
이경위는 알지 못했다.
다만 K가 지시한 대로
동일 모델 USB로 바꿔치기하는 것만 중요했다.
봉지에 봉인 테이프를 다시 붙였다.
다음 문구가 기재된 테이핑을 덧붙였다.
[분석결과 : 데이터 손실. 내용물 훼손 추정]
이경위는 증거물 보관실을 서둘러 나왔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문서파쇄기에 찢긴 페이지를 갈아 넣었다.
그리고는 텔레그램을 켰다.
[이경위 : 처리 완료했습니다.]
[K라인 : USB는?]
[이경위 : 모두 처리했습니다.]
[K라인 : 수고.]
오후 2시.
세종경찰서 3층 참고인 조사실.
찢어진 페이지.
'누가 찢었을까...'
서연이 노트를 훔쳤고 맘카페에 폭로했다.
하지만 서연은 페이지를 찢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이 폭로하고 싶었을 테니까.
홍우석?
우석도 아니었다.
찢어진 페이지를 본 건 경찰서에서였다.
'그럼 누가?'
민아는 눈을 감았다.
노트에 적었던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 아.'
카페에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40대 중반쯤.
정장을 입었지만 평범한 얼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남자는 구석 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민아는 커피를 내리면서
무심코 그 대화를 들었다.
"네, 한태준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민아의 손이 잠시 멈췄고 눈이 번쩍 떠졌다.
책상 스탠드를 끌어당겼다.
거칠게 찢긴 노트에 손끝을 댔다.
미세한 잉크의 압흔이 촉감처럼 살아났다.
각도를 바꾸자 희미한 압흔이 보였다.
글씨는 사라졌으나
눌렸던 압흔은 여전히 종이에 남아있었다.
희미한 글자 문양이 떠올랐다.
D… a… t… a… L… o… o… p.
민아는 숨을 멈췄다.
그 아래로 숫자와 글자가 흩어졌다.
'Dataloop
10/14, 19:30, 시청 근처.
Lounge72 Bar. 8F'
조사실을 나오며 민아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기억나는 글자를 모두 적었다.
손이 떨렸다.
같은 날. 오후 3시
세종경찰서 2층 형사과
형사 B가 압수한 증거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진료 기록, 처방전.
한태준 병원에서 나온 서류들.
형사A는 증거물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중 이상한 장부가 눈에 띄었다.
형사 B가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안형사님,
한태준 병원에서 나온 기록인데요.
이게 좀 이상합니다."
빼곡한 메모들.
환자 명단, 약품 목록. 금액...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2024. 3. 15 - 첫 만남]
"신도시 프로젝트 참여 제안.
병원 감사 면제, 학군지 독점권 보장.
대가: 분기별 정산금"
[2025. 9. 20 - 2차 미팅]
"홍우석 협박 지시받음.
USB는 K가 제공.
성공 시 2억 추가 지급"
[2025. 10. 03 - 3차 미팅]
"오지훈 투자 유도 지시.
K Capital Partners 통해 120억 투자.
수수료 15% 수령 예정"
"이게 뭐지?"
형사 A가 갸우뚱 거리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K지시사항]
[2025. 10. 06 - 4차 미팅]
"맘카페 폭로 건으로 협의.
타이밍은 K가 결정.
목적: 여론 통제 테스트 및 사회적 압력 실험
일단 대기."
'맘카페 폭로 건 협의?'
형사 A의 눈이 커졌다.
한태준이 맘카페 폭로를 계획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형사 A는 뒷면을 확인했다.
K의 이니셜 로고와 전화번호 하나.
010-XXXX-XXXX.
형사 A는 사이버수사과에
해당 번호의 주인 추적을 의뢰했다.
30분 후.
담당과 조사관이 와서 말했다.
"안형사님, 이 번호 추적이 안됩니다."
"뭐라고?"
"여러 번 번호 주인이 바뀌었고
최근 사용한 주인을 찾아보니까,
노숙자로 확인됩니다. 대포번호 같아요."
형사 A는 서류를 내려보며 말했다.
'도대체 누구야..?'
다음 날 오전 10시.
보건복지부 청사.
로비의 대리석 바닥은 반질반질했고,
그 위로 사람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우석은 징계 통보서를 접어
푸석푸석한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우석은 서둘러 감사관실로 향했다.
감사관이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감사관님, USB 원본은 경찰에 제출됐죠?"
"네."
"USB를 한태준에게 준
배후세력은 확인됐습니까?"
감사관이 얼굴을 들었다.
"경찰 쪽에서 USB가 소실됐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우석의 목소리가 커졌다.
"경찰서에서 증거물 분석하려 보니
데이터가 전부 없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우석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확인하고 제출했어요.
USB에 분명히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저희도 황당합니다만,
근데 경찰 쪽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감사관이 한숨을 쉬었다.
우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USB까지 사라졌다.
모든 증거가 지워지고 있었다.
우석은 한태준을 떠올렸다.
태준이 무심코 했던 말.
"USB는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위에서 받은 거지..."
'위에서...'
우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태준 뒤에... 누가 있어.'
'복지부 안에도... 그들이 있는 거야.'
태준 뒤에 있던 그 세력.
그들은 경찰뿐 아니라
보건복지부 안에도 손을 뻗고 있었다.
우석은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청사 주차장 입구에 서 있었다.
차 안에 사람이 있었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우석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친 것 같았다.
우석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
오후 2시.
으뜸중학교 3층 복도.
현우는 교무실 창문 너머로
교장실을 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교장이 이상했다.
학폭위 조작 건으로
학교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교장은 이상하리만큼 너무 평온했다.
오히려 더 여유로웠다.
엊그제 우연히 들었던
교장과 수상한 남자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한태준은 언제 풀려납니까?"
교장의 목소리.
현우는 문틈으로 귀를 기울였다.
"조만간 보석으로 나올 겁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습니다. K님도 안심하시겠군요."
"K님께서는 만족하고 계십니다.
학폭위 조작 건도 잘 무마됐고..."
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징계위원회 열릴 겁니다.
정직 6개월 정도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도록
잘 다독이겠습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현우는 급히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교장실 문이 열리고
정장 입은 중년 남자가 나왔다.
평범한 얼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남자는 복도를 걸어 나갔다.
현우는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교장이 들고 있는 명함이
분명 현우 눈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대각선으로
줄 그어진 K의 이니셜 로고.
현우는 머릿속으로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봤다.
'이건... 개인이 아니야. 시스템이야.'
'교장도... 그들과 한패였어...'
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후 5시 구치소
한태준은 차가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한태준, 변호사 면회."
교도관이 문을 열었다.
태준은 면회실로 걸어갔다.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한 원장님."
변호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보석 신청... 승인됐습니다."
"뭐라고요?"
태준의 눈이 커졌다.
"내일 오전에 나가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상부에서... 배려가 있었습니다."
변호사가 조용히 말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변호사가 메모지를 건넸다.
작은 쪽지.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입 조심. - K]
태준의 손이 떨렸다.
짧은 문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축하드립니다, 원장님."
변호사가 나갔다.
태준은 메모지를 꽉 쥐었다.
'K가 날 아직 버리진 않았군.'
저녁 6시.
민아의 카페.
민아는 카페 문을 열고
햇빛이 바닥으로 스며들게 두었다
"DataLoop..."
민아는 휴대폰으로 검색했다.
[DataLoop AI]
[대표: 오지훈]
[사업내용: AI 기반 도시 데이터 분석 솔루션]
"지훈 씨 회사잖아..."
민아는 즉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훈 씨, 저 민아예요.
오늘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7시쯤 카페로 갈게요.”
저녁이 될 즈음
지훈이 카페에 들어왔다.
지훈과 민아는 창가 구석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지훈이 물었다.
민아는 종이를 꺼냈다.
"이거... DataLoop가 지훈 씨 회사죠?"
지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제 노트 밑에 있던 종이에
압흔이 남아있었어요.
복원했더니 이 글자가 나왔어요."
경찰서에 증거물로 압수된 단골노트.
그 일부가 찢겼다는 사실.
조곤조곤 사실을 설명하며
민아는 종이를 지훈에게 보여줬다.
'Dataloop
10/14, 19:30, 시청 근처.
Lounge72 Bar. 8F'
지훈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건..."
"뭔가요?"
"제 투자자들...
그 사람들 미팅 일정이에요."
"투자자요?"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회사에 120억을 투자한 사람들.
K Capital Partners라는 곳인데..."
지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엔 몰랐어요.
그냥 일반 투자자인 줄 알았죠."
"하지만..."
지훈이 민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순한 투자 수익이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제 회사 기술이요.
AI 기반 도시 데이터 분석."
지훈이 설명했다.
"학업 성취도, 소득 수준,
부동산 거래 내역, 인구 이동...
세종시 전체 데이터를 분석해서
패턴을 찾아내는 거죠."
"그걸로 뭘 하는데요?"
"부동산 시세를 조종해요."
민아의 눈이 커졌다.
"AI가 예측한 대로
특정 지역 개발 정보를 흘리고,
학군지 소문을 퍼뜨리고,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거예요."
"그럼..."
"투자 수익률이 엄청나게 높아지죠.
그들은 제 기술로
세종시 전체를 실험장으로 만든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민아는 종이를 다시 봤다.
"Lounge72, 10월 14일...
내일이잖아요."
"네."
"그럼 내일 거기 가면
그 투자자들을 만날 수 있는 거네요?"
민아가 일어섰다.
"제가 가볼게요."
"안 돼요!"
지훈이 민아의 손을 잡았다.
"이건 분명 개인이 아니에요.
태준 뒤에 배후세력이 있습니다.
이 도시를 움직이는 사람들 말이죠."
"어쩌면... 소영 씨의 죽음과 연관이..."
"민아 씨.
이건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제가 갈게요."
지훈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투자자들이니까
제가 가볼 수 있는 명분이 있어요."
"혼자 가시려고요?"
"네."
지훈이 민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소영이를 지키지 못했어요.
최소한... 이번엔 제대로 하고 싶어요."
그들이 누군지 제가 파악할게요.."
흔적들.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건
이름 모를 누군가의 힘이었다.
이 소설은 세종 신도시라는 공간을 모티프로 했으나, 실제 지역·인물·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작품 속 모든 설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입니다. 유사성은 우연일 뿐,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