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없네요?
상황이 좋지 않다. 분명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입사 1주 전이 되면 첫 직장에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면서, 잘 할 수 있을까 혹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잠 못이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내일은 또 어떤 정부의 발표가 날까, 내일은 전공의 협회는 또 어떻게 대응할까 하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는다.
애초에 파업을 긍정하는 자세는 아니었지만, 막상 시작되고 나니까 더 별로다. 여론은 최악이다.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나도 계약 거부를 하고, 임용 포기서를 내고 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엔드포인트를 잘 모르겠다. 우리가 이기든 지든 건강보험은 짧으면 앞으로 4년 내로 폭파될 것이고, 의료 민영화는 막을 수 없다. 지금 정부는 의료 민영화를 코 앞에 둔 상태에서, 어떻게든 이를 늦춰보겠다고 의사를 매우 늘리고 페이를 낮춰서 총액 계약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총액 계약제는 쉽게 말하면, 정부가 모든 의사들이 벌어갈 수 있는 돈을 정해주는 것이다. 1년에 의사 단체에게 100원을 줄테니, 그 안에서 의료 행위가 이뤄지는 점수만큼 나눠가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의사가 많아야 행위별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에 무조건 의사를 늘려야한다. 이를 통해 수요 공급 곡선이 맞아 떨어지는 지점에서 가격이 형성되게끔 유도하는데, 문제는 이때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의료의 질적 저하다.
어떤 외자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꾸 권위있는 교수인척 기어나와서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OECD 평균보다 아래라는 소리를 하는데,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말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총액 계약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의료의 질적 저하(시간적 개념도 포함된다)가 문제로 떠올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공공의료를 제외한 민간영역에서의 민영화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국은 민영화되면 안된다 이러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이미 반쯤 민영화된 국가다. 다만, 건강보험과 심평원 그리고 보험 공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지, 보험의 영역에서는 다들 가지고 있는 실비 보험이 이미 민영화된 영역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얘기하는, 혹은 언론에서 이야기 나오는 민영화는 의료 전 영역의 민영화로, '영리병원'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다. 영리병원은 기본적으로 심평원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시장이 허락하는 선에서 가격 책정의 자유를 갖고 있다. 흔히 생각하는 전국민 의료보험이 갖춰지지 않은 미국처럼 세태가 변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상 의사들이 이번 패키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방향성이 잘못됐다. 저수가와 넓은 보장범위로 시작한 건강보험의 말로는 당연히 파산이지만, 이를 보완할 방법은 굉장히 많았다. 건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의학적으로 옳지 않은 급여 체계(문제인케어의 MRI 급여라던가), 외국인 진료 문제나, 한방의료의 급여화(첩약 급여화 등) 등 새는 구멍이 많았기에 막을 방법도 많았다. 하지만 그냥 다들 지켜만 보다가,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질 시점이 되니 당장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의사라는 집단을 망가뜨리는 것 밖에는 없으니, 그것도 민영화로 가는 초입으로 가는 길이니. 하긴 5천만이 넘는 국민들 중 다 해야 15만이 좀 넘는 의사들만 부수면 당장 궁여지책을 마련할 수 있는데, 안하는게 이상하긴 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정부는 정부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할 말도 많고, 버틸 이유도 많은 싸움인 형국이다. 개인적으로 환자에게 피해가 가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사태가 장기화될 것 같은 느낌에 이젠 그러기도 어려워 보인다. 혼란스럽다. 당장 원래였으면 임용이 6일 남은 지금, 당장 다음주 토요일에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 졸업을 했다. 하지만 입학할 때부터 6년 간 기다려왔던 히포크라테스 선서식은 취소됐다. 뭐 의사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데 선서식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래서 난 우리 학교 수십년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선서를 하지 않은 의사다. 웃긴다. 뭔가 중요한걸 잃어버린 기분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진료하고, 환자를 치료하고, 병원 내의 라포와 전문가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의학에만 매진하는 의사가 될 수는 없을까. 언론에 뭐라고 나오는지, 댓글 여론은 어떤지,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다.
누가 그러더라. 정부, 그리고 규제와 싸우는 직업은 하지 말라고.
떠날 때가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