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잠잠하나 했다. 언니랑 같은 방을 쓰다가 언니가 대학생이 되고 다른 지역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3층에 제대로 내방이 생겼다. 겨울이 다가오는 추운 밤 매번 늦게 자다가 오래간만에 일찍 잠이 들었다. 아주 늦은 밤 1층에서부터 쿵쾅거리는 계단 소리에 잠에서 깼다. 2층에서 자는 엄마 방을 여는 소리와 아빠가 성질내는 소리를 들었다. 18살을 먹었어도 여전히 저 소리는 익숙하지 않았다. 숨어서 듣는 내 심장도 이렇게 뛰는데 엄마 심장이 무너질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고 내려간 아빠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슬며시 2층으로 갔다. 그 방은 마치 도둑이 들어온 것 같았다. 엄마는 덤덤히 치우며 우선 올라가라고 했다. 나는 그날 제대로 잠들지도 못 한 체 아침이 돼서 학교에 갔다. 학교가 마치면 집에 일찍 가야겠단 생각뿐이었다. 내가 수업을 들은 건지 친구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생각은 나지 않는다. 종이 울리고 집에 가려는데 엄마한테 톡이 왔다. 마치고 집 근처에 있는 엄마 친구 집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엄마 친구 집은 이미 이혼 가정이었고 중3 태영이라는 아들과 함께 주택에서 살고 계셨다. 엄마 친구분은 1층, 아들은 2층을 쓰고 있었다. 나는 1층에 도착해 문 앞에서 전화했다. 엄마는 그곳에서 문을 열어주고 들어오라고 했다. 엄마는 당분간 입을 옷과 속옷 등 필요한 물건만 들고 나온 상태였다. 엄마가 말하길 이모와 태영이가 함께 1층에서 생활할 테니 나와 엄마는 2층 태영이 방에서 잠시 집 구할 때까지만 지내자는 것이다. 뭔가 그 상황이 부끄러웠다. 말 그대로 우리 집을 코앞에 두고서 쫓기듯이 나와 이렇게 남의 집에 잠시 얹혀산다는 것 아닌가. 물론 그 모자는 충분히 우리를 이해했지만, 이모와 태영이 눈을 보자니 너무 낯이 뜨거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맙기도 부끄럽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태영이를 하굣길 버스에서 보면 모른척하며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이 민망해서 아주 느리게 걸어 그 집에 도착하곤 했다.
그 생활이 며칠 가진 않았다. 엄마가 급한 대로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 투룸을 잡았다. 그리고선 아빠가 집을 잠시 비운 틈을 타서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모든 짐을 차에 박아두고 집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다. 조마조마하면서도 차에 타는 순간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 뒤로 이혼 진행이 빠르게 진행되나 싶었지만,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미성년자를 키우고 있는 부모는 이혼 숙려기간이 100일간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해가 지나고 고3이 되었다. 엄마는 내가 고3이라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혼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는 되려 내가 아직 19살밖에 되지 않아서 미안했다. 나 때문에 100일이나 더 끌어야 하니까. 내가 한 살만 더 많았어도 바로 도장을 찍고 나올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이 백 년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언니는 자취 중이고 엄마는 잠시 3개월간 서울에 있었다. 주말마다 엄마가 내려오긴 했지만 고3이 시작되고 투룸에서 혼자 사는 것에 어느덧 익숙해졌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평화가 어색할 정도였다. 야자가 끝나면 텅 빈 집에 혼자 가방을 내려놓고 수저통을 씻고 공부를 하고 샤워를 했다. 잠자리에 들려면 그래도 한참 멀었다. 새벽 2~3시 잠들 때가 대부분이었고 늘 6시에 일어나서 항상 아침을 먹던 습관이 있어서 그 와중에 아침까지 먹고 등교 준비를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예민했던 것 같다. 매일 밤 슬프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고 결벽증은 얼마나 심한지 모든 것이 제 위치에 있어야 속이 시원했다. 학교까지의 모든 신호들의 신호 패턴까지 외우고 발걸음 하나하나 속도에 따라 신호가 정확하게 바뀌게 걸었다. 강박에 불안에 참 가지가지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수시 넣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수시 넣을 때가 되어서 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