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지만 어른이지 못했다 2
나는 여행이 설레지 않다. 여행뿐 아니라 갑작스러운 변화나 새로운 것에도 그렇다. 여권에 도장이 수많이 찍히고 국내도 꽤 돌았지만 지금도 언제나 설렘보다 무서움이 크다. 내가 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은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 생각했으니까 멈출 수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예전에 공황장애로 병원에서 처방받아 두고 먹지 않은 약이 가방에 잘 있는지 확인했다. 약은 먹지 않고 들고만 있어도 위안이 되기에 긴급 시 혹시 몰라 챙겨둔 것이다. 어느새 1시간이 지나고 나는 제주에 도착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건 다른 누군가에게 척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는 '척'이었다. 내 태도가 그렇게 되면 내 마음도 속을까 싶어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야 했다. 정신이 없고 지친 심장을 달래느라 진이 빠졌다. 하필 첫날부터 하늘이 흐린 게 딱 내 마음 같았다. 주변 경치를 둘러볼 여유까지는 없었다. 내가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에만 집중했다. 버스 노선을 찾고 안내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걸로도 벅찼기에 다른 것이 내 눈에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혹여 시야를 넓혔다가는 준비도 안 되어 있는 나에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떠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겠지만 크고 넓은 곳에 갇힌 기분이었다. 곧이어 내가 내릴 곳이 되어 나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거의 혼자 오는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왠지 마음이 놓였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씩 다른 것들이 눈에 조금씩 들어왔다.
나는 모두 여행이나 새로운 시작들에 설렘을 느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만 무서운 게 아니란 걸 느꼈다. 나처럼 무서움을 가진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여태 모두 어떻게 용기가 잘 생기지 싶었지만, 용기는 갑자기 어디선가 뿅 하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두려움을 안고 나아가는 것이 용기라 느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어제 너무 신경을 썼는지 두통이 있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나아갈 길이 제각기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 그 모든 길을 응원하며 '오늘도 즐거운 여행되세요' 하며 방을 나가는 게 우리들만의 인사법이었다. 내가 오늘 향하는 곳은 우도다. 나는 배를 타기 위해 성산항 여객터미널에 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길이 헷갈려 지나가는 또래 여자아이한테 길을 물었다. 그 아이도 우도에 가는 길이라서 같이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서로를 모르기에 더 편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봐줄 사람들이었다. 결국 우리는 하루 친구가 되어 함께 우도에서 놀았다. 친구가 스피드보트를 타자는 말에 거절을 못 해서 타게 되었는데 하필 맨 앞자리였다. 나는 놀이기구도 못 타서 매번 가방 지킴이 신세였는데 스피드보트라니 속으로 엄청 울면서 눈 꼭 감고 '그래, 다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이내 즐거움만 남게 되었다. 나를 스쳐 가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새파란 바다, 새로운 친구와 주변 모든 시야가 내 속에 가득 찼다. 무서움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어리석게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미리 걱정하며 무서워했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했는지 모르겠다. 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나는 지금을 즐기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날 숙소에서 약을 버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