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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Jul 23. 2022

빨간 코 순록, 루돌프

붉게 물든

 빨간 코를 가져 검은 코를 가진 '정상적'인 순록들로부터 언제나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던 루돌프는 이번 크리스마스에야말로 누구보다 빠르게 끊임없이 달려 산타에게 인정을 받고 검은 코 순록들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었어요.


루돌프는 앞으로 치고 나가는 순간 가속력을 높이기 위해 뒷 다리 운동을 어마어마하게 했어요. 줄자로 재어보니 뒷 다리 허벅지의 두께가 10센치나 두꺼워 졌을 정도로요. 근육을 키우고 더 오래 많이 달리기 위해 폐활량을 키우는 건 너무나 고됐지만 "넌 내 옷과 색이 같은 코를 지녔구나. 루돌프! 네가 최고의 썰매 순록이다! 호호호호" 하며 검정코 순록들의 앞에서 자신을 칭찬할 산타의 모습을 생각하면 힘이 들다가도 기운이 솟구쳤어요. 검은코 순록들이 쳐진 눈으로 자신을 우러러 보는 상상을 하면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어요.


그렇게 드디어 대망의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어요. 순록들이 내쉬는 콧김이 선명하게 보일 만큼 차가운 겨울이 다가온거죠. 썰매를 끌 대열을 갖추고 기다리는 중, 한 검은코 순록이 루돌프에게 말을 걸었어요.


"야, 너 뭐 어디 아프냐? 다른 애들은 콧김이 요구르트 병 만큼 나오는데, 네 콧김은 항아리 만큼 나오잖아. 어디 아픈거 숨기고 멀쩡한 척 해도 소용 없어. 산타한테 보고할거야."


"난 괜찮아. 그냥 숨을 쉬고 있는 것 뿐인걸"

루돌프는 오래도록 자기를 따돌렸던 검은코 순록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마음에서 만큼은 검은코 순록의 머리 위에 올라 내려다 보는 기분이었어요. ㅎ, 달리면서 보면 알게 될거다, 내가 아픈 게 아니라 얼마나 강해졌는지!


산타가 썰매에 앉기 위해 지나가며 순록들의 대화를 들었나봐요. 산타는 루돌프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지긋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 출발하자! 하고 루돌프의 등을 두드렸어요.

산타는 자리에 앉았고, 순록들은 출발 대기중인 증기기관차 처럼 김을 연기처럼 내뿜고 있었어요. 하마터면 내연기관 기계로 착각할 것 같았다니까요!


3

2

.

1

후오!


산타의 외마디 기합과 함께 순록들은 땅을 박차기 시작했어요. 얼마간 달렸을까, 모두는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나무 위에서 달렸고 계속 높아져 숲과 마을 전체가, 얼어붙은 강이, 구름이 내려다 보였어요. 그렇게 1,437 번 정도를 달리자 창문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집이 보였어요. 이번 크리스마스 산타의 첫번째 선물이 주어질 집이었죠. 산타는 줄을 당기며 순록들을 아래로 아래로 향하게 했어요. 세상을 다 내려다 보다가 한 마을을 내려다 보다가 한 집을 내려다 보는 일은 짜릿한 경험이었어요. 세상을 확대하고 축소하는 일 같았죠.

그렇게 확대,,

확대,,

하며 집에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역시 운동을 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뒷다리의 느낌이 평소와 완전히 다른 거 있죠.


이제 거의 다 내려왔어요 조금만 더..

확,,ㄷ,,,, 우지끈 우당타아앙!!


*

*


뒷다리의 힘이 강해졌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강해졌을 줄은 몰랐어요. 다른 순록들 보다 속도를 늦추고 멈추기 위해 발을 땅에 누르는 걸 반 템포 늦게 했을 뿐인데, 뒷다리로 허공을 한번 더 찼을 뿐인데 순록 모두가 중심을 잃고 땅에 나동그라졌어요.


산타는 가까스로 지붕의 굴뚝을 잡고 진땀을 뻘뻘 흘리며 메달려 있었고, 순록들은 모두 일제히 루돌프를 향해 힐난의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죠.


루돌프는 혼자 의기양양해 모두와 산타에게 까지 해를 입힌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산타는 잠에서 깬 집 안의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코코아를 받아와 순록들에게 나눠주고 있었죠.


"이렇게 추운 밤에 선물 배달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세요, 산타 할아버지, 그리고 순록여러분..! 드릴 건 없지만 따뜻하게 코코아로 목이라도 축이고 가신다면 전 너무 기쁠 것 같습니다."

집주인들은 아주 따듯한 사람들인 것 같았어요. 하지만 루돌프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눈 속에 쳐박힌 채 꼼짝 없이 죽은 듯 있었습니다.


그렇게 루돌프가 눈 속에 파묻혀 있는 동안 코코아 타임은 끝이 났고 산타와 순록들은 어느새 출발해버렸어요. 출발하기 전 산타가 모두 줄 섰지요? 하고 물었지만 어떤 순록도 루돌프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네! 하는 소리만 들렸지요.


*


루돌프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두가 발을 맞춰 달리고 멈춰야 하는데, 저 홀로 힘이 남아돌아 반 박자 더 빠르게 달리다 이 지경이 된 거니까요. 눈 속에 얼굴과 몸을 묻은 채 사라지고 싶었어요. 그러나 루돌프는 사라지지 않았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루돌프를 뒤덮은 눈은 햇빛을 받아 천천히 녹고 있었어요.




참새들이 루돌프의 주위에서 지저귀고 있자 이어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한 무리의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다가 루돌프를 발견했고, 루돌프의 빨간 색 코를 보며 광대 분장을 한 순록이 마을에 나타났다고 깔깔거리며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았어요.

루돌프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아이들 뿐 아니라 모든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며 깔깔댔어요.

루돌프가 여러 사람 앞에 누추한 꼴로 서는 건 아닌 것 같아 몸을 털자, 그걸 보고 또 웃기 시작했어요.

뒤늦게 인사를 하려 입을 벌려 소리를 내자 차가운 눈 속에 반나절을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어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도 웃음이 만개했어요.

사람들은 한 집씩 돌아가며 루돌프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했어요. 어젯 밤 마시지 못해 미련 가득하던 그 코코아는 벌써 열잔도 넘게 마시고 있었죠. 루돌프는 이곳에서의 삶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안락한 숙소가 제공되고, 자신이 뭘 하던 기쁘고 즐겁게 대하는 이들의 곁에서 말이에요. 산타와 순록들 사이에서 지내는 건 매일매일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투쟁 같았다면 이곳의 사람들 틈에서 지내는 것은 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고 심지어 환영하고 좋아해줘 천국 지금껏 가보지 못한 고향에 찾아 온 기분 이었어요. 루돌프는 사람 마을에서의 삶을 좀 더 영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렇게 자신의 존재 만으로도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 틈에서 편하게,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으며 지낸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어요. 반년 동안 루돌프는 산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체력을 단련할 일도, 마음껏 평원을 달려야 할 일도 없었어요. 물론 다른 순록들의 놀림에서 도망치며 달리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주기적으로 달려야만 했던 삶에서 벗어나 먹고 자고, 천천히 마을을 거닐고, 또 먹고, 자고 하는 삶을 살다보니 고작 육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도 배가 볼록하게 솟아났어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루돌프를 처음 처럼 기쁘게 바라봐 주었지만, 점차 배가 나오고 나른한 눈빛이 되어버린 루돌프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어요.

하루는 몇명의 아이들이 루돌프를 찾아와 볼록 튀어나온 배를 만지며 깔깔거렸어요.

"야 이 배좀 봐. 돌프 처음 왔을 때 안 이렇지 않았냐? ㅋㅋㅋ 아니 애한테 뭘 먹인거야"

또 한 아이는 말했어요.

"얼마 전에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갔는데, 집에 있던 거 다 먹더라고 이쯤 되면 처치곤란 아니냐? 저 빨간 코도 지금 보니 좀 이상해."


루돌프는 여지껏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게 줬던 음식들을 생각했어요.

코코아, 비스켓, 샌드위치, 양배추 버터 구이, 당근, 마시멜로, 여물, 초콜릿, 고구마, 호박, 양파(맵지만 아주 맛있었어요), 코냑, 보드카, 닭안심 스테이크, 칠면조 구이 ... 평생 먹어보지 않았던 수많은 음식을 먹었고, 운동도 하지 않았으니 배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어릴 적 부터 항상 배고프게 지냈는데, 마을에 온 뒤로 언제나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그 기쁨을 모두 흡입한 결과는 이 배겠죠. 한때 군살 없이 매끈했던 몸이 여기저기 늘어져있는 걸 보니 맘이 울적했어요. 그리고 그토록 살갑던 사람들 조차도 자신의 빨간 코를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루돌프는 세숫물을 받아 고개를 쳐박고 숨이 차 견딜 수 없을 때 까지 이리저리 얼굴을 흔들었어요.


빨간코를 놀리던 아이들과 함께 왔던 아이 중 한명은 그 후로 매일 루돌프를 만나러 찾아왔어요. 그 아이의 이름은 아후아 였어요.

"루돌프, 우리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야하는데, 아직 눈이 많이 남아있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앞으로도 풍족하게 먹고 지내려면 농사를 지어야하는데,, 어쩌지? 네가 도와줄 수 없을까?"

루돌프는 큰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매일같이 마을 주변을 달리기로 했어요. 루도프가 달리며 눈을 밟아 잘게 부수면 눈이 더 쉽게 녹을테니까요. 루돌프는 자신에게 쉴 곳이 되어줬던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 하고 싶었어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먹는 양도 좀 줄이기로 다짐했어요. 사람 보다 덩치가 큰 순록인 루돌프는 식사량도 사람에 비해 꽤나 많았으니까요.


아후아는 그런 결심을 한 루돌프를 존경 어린 눈으로 올려다 보며 고맙다는 말을 연신 했어요. 루돌프는 이 아후아라는 아이와 오래도록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그렇게 아후아는 자주 루돌프를 찾아왔고, 루돌프는 자주 마을을 아주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하루는 아후아가 애인이 자신을 위해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했다며,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나눠먹으려 한다며 복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루돌프를 찾아왔어요. 아후아에게는 기쁜 소식을 나눌 만한 친구가 필요했고, 지금껏 많은 얘기를 나눈 루돌프가 제격이라고 생각한거죠.

그러나 루돌프는 아후아와 조금 다른 기분을 느꼈어요. 이상한 감정이었죠. 아후아의 빛나는 미소를 바라보며 루돌프는 미소가 절로 나왔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울고있던 아기 순록이 분노에 찬 눈을 부릅뜨고 있던 거에요. 루돌프는 자신도 모르게 예쁜 케이크를 들고 자랑하며 살랑살랑 춤을 추던 아후아를 코로 들이받았어요. 물론 그렇게 강하게 하려 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루돌프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 새빨갛고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코는 엄청나게 커져있었어요.





아후아는 거대한 붉은 코에 들이받혀 유리창 쪽으로 나가떨어졌어요. 애석하게도 유리창 앞에는 창을 들고 서있는 이누이트 원주민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 있었어요. 조각상이 들고 있던 창은 종이를 떨어트려도 가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고 뾰족한 건 말 할것도 없었지요. 불쌍한 아후아는 사소한 자랑의 댓가로 이누이트 조각상의 창을 돌려받은 거에요. 창과 하나가 된 아후아의 몸에선 몇 초 간격으로 붉은 물이 흥건하게 뿜어져 나왔어요.


루돌프는 말 없이 붉은 물만 뿜어내는 아후아를 보며 몸 속 깊숙한 곳에서 부터 전율하는 무언가를 느꼈어요. 아후아의 죽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책감, 공포, 앞으로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가 될거라는 예감,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붉은 물에 대한 흥분이었어요. 루돌프는 그 붉은 물이 풍기는 냄새에 압도되고, 흥분하고 있었어요. 자신의 주둥이 앞에 달린 코의 색과 같은 액체를 보며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고,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흥분을 느꼈던 것 같아요. 루돌프는 눈을 번쩍이며 아후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물의 맛을 봤어요. 비리고 담백하고 조금 단 맛도 나는 듯 했는데, 그 맛이 퍽 마음에 들었어요. 질척거리는 그 질감은 또 어떻고요!


루돌프는 아후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물에서 온 몸으로 뒹굴었어요. 코 부터 시작해서 주둥이, 손, 어깨와 허리, 골반에도 물을 듬뿍 묻혔어요.


루돌프는 빨간 코를 탓하며 자신을 버리고 따돌린 순록 무리들 사이에서 언제나 허기졌던 시절을 떠올렸어요.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했지만, 간혹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날 조차도 어딘가 공허하고 텅 비어 허기졌었던 그 감각이 피에 뒹굴며 모두 보상받는 듯 했어요.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루돌프 자신에게 상냥히 대해줬던 아후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몸을 감싸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루돌프는 언제나 허기졌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도 쉴 장소도 내 편도 아닌, 자신을 상냥하게 대하는 누군가의 몸에서 나오는 붉은 물 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루돌프는 알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눈을 반짝이며 집 밖으로 뛰쳐 나갔어요. 밤이 되었고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온 늑대들은 루돌프의 눈빛을 보고는 깨갱 하는 소리를 내며 달아나 자신들의 굴로 돌아갔어요.

루돌프는 밤새 내린 눈에 몸을 비벼 붉은 기운을 지우고 다시 빨간 코 광대 순록으로 사람들의 마을에 찾아갔어요.

몇번의 겨울을 지나며 땅에 붉은 발굽 자국이 향하는 마을엔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광대 루돌프는 어느 곳을 가던 환대를 받았어요.

처음엔 그랬죠.

 


환대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어요. 루돌프는 두번 다시 볼록한 배를 가질 틈이 없이 안주하지 않고 마을을 옮겨다니고 있다고 전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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