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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Jul 26. 2022

오로빌에 부치는 마지막 회신 3-2

처절할 정도로 몸 던지는 사람 없잖아요 요즘엔



 댄 일 줄만 알았던 단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다른 멤버들은 못 가거나 늦게 가겠다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단과 현은 동시에 폰을 보며 두 사람을 꾸중했다. 반얀트리는 집에 사정이 생겨 가지 못하게 됐다고, purify는 검진을 받으러 들린 병원에서 당장 치료를 해야한다고 했단다. 심각한 일은 아니고 간소한 문제라고 얼버무리며 사라졌다. 애초에 나온단 말을 말던가.


“왠지 purify, 그러니까 정화님 닉네임이랑 비슷하지 않아요?” 단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러니까요. 거의 필터 같아요 상황 분위기를 다 바꿔놔요.” 현이 짧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근데 왜 위즈덤이에요? 여잔 줄. 이지혜나 정지혜 이런 사람일 줄 알았잖아요”

“현이거든요 이름이. 그, ‘현명할 현’자 써서.”

“아-. 재미없다. 그래서 위즈덤.” 단은 세상 따분한 사람을 다 본다는 듯 현을 바라보며 늘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현은 문득 자신의 무딘 유머 감각을 장난섞어 힐난하던 J의 모습이 스쳐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왜 성별도 다르고 생김새도 너무나 다른 이에게서 J가 느껴진단 말인가.


“꼬, 꼭 재밌어야 하나요 닉네임이, 쩝” 스스로 재밌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며 딱히 반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다소 멍해진 현은 착잡함과 당혹스러움이 응축된 옹졸한 소리를 냈고 이어서 반문했다.

“그럼 단은 왜 단이에요?”

“이름이 단이에요.”

“단? 외자?”

“네. 김단.”

“뭐야 여기도 재미없는데요.” 현은 김빠진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도 외자. 김현이에요. 배 안 고파요? 커리 드실래요?” 현은 은근히 자신도 외자임을 덧붙였다.


현 또는 단은 같은 성씨에 같은 외자이며 같은 관심사를 가진 상대가 흥미로웠다. 단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짜이도 마셨고 커리 하나만 시켜서 나눠먹는 거 어때요?”

단과의 대화는 채팅방에서 그랬듯 죽이 잘 맞았다. 이미 만난지 몇 개월 정도는 된 사람 같았고, 식사 중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단은 퍼그와 시츄의 혼혈인 덩치 좋은 믹스견을 키우며, 현은 고등어 옷을 입은 코숏 고양이를 모신다는 것, 단은 밴드 너바나는 몰랐으며 ‘열반’이라는 뜻만 알고 있었다는 것, 단과 현은 동갑이었다는 것, 단은 바다를 몹시 좋아한다는 것과 현은 바다라면 질색을 한다는 것을, 단은 어릴적 부모님을 따라 인도에 거주 했다는 것 정도였다. 처음 얼굴을 마주한 둘은 커리를 먹는 내내 피식거리며 서로에 대한 의아함과 호감이 뒤섞이고 커리와 짜이향이 혼재된, 오묘한 공기를 호흡했다.


식사를 마치고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서촌을 거닐었다. 여름 초입의 저녁은 선선했고 옛 궁궐 터가 가까운 골목길은 노을빛 아래 고즈넉하게 주황 빛으로 물들었다. 단과 현은 길거리에서 파는 작은 팥빙수 하나를 먹었으며 도서관에 들려 오로빌에 관련된 책을 찾아봤다. 현은 단이 무슨 단이냐고 물었고, '박달나무 단' 이라는 답을 듣자 현은 그건 ‘단군’의 단과 같은 뜻이 아닌가 생각했다. 단군의 직속 후예와 함께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현은 오로빌의 탄생 배경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하는 단의 건조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섬세하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책 페이지를 넘기는 단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간혹 단과 눈을 맞추며.


밝은 갈색으로 빛나는 단의 눈에선 홍채의 세세한 결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J의 눈동자 색도 밝은 갈색이었는데. 단에게서 세상에서 사라진 절친한 친구의 눈빛을 본 듯한 이상 야릇한 기분이 됐다. 눈앞의 여성과 J가 동일시 되는 느낌은 현이 단에게 빠지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됐건 이미 시작된 장력으로 부터 빠져나올 길은 보이지 않았다. 현은 단의 홍채를 바라보며 단의 생을 훔쳐보기라도 하는 듯 조마조마 했다. 현의 시선은 단의 눈동자와 손 사이를 오래도록 헤매었다. 도서관 안은 적막했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같은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에 대해 논하는 단의 말이 귀로 들어오긴 했으나 현의 사고는 이미 다른 생각에 압도 되어 있었다. 단이 말하는 내용과는 전혀 다른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설레발치지 말자, 들뜨지 말자, 오버하지 말자…’ 현은 연거푸 되뇌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을 나서며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이만 헤어지고 나중에 그룹 사람들과 만나야 할지 결정 혹은 무언가를 망설이는듯 도서관 열람실에서보다 사뭇 조용히 밖을 나섰다. 도서관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방향을 틀자 각종 꼬치구이와 맥주를 파는 아늑해 보이는 가게가 있었다. 단은 가게 앞에서 걸음이 느려졌고, 마치 이미 다음 일이 예정되어 있기라도 한듯 곧바로, 현은 “여기 들어갈까요?” 했다.

꼬치의 종류가 방대한 곳이었다. “채소 꼬치가 많아서 좋네요” 현의 말에 단이 작게 웃었다.

“채소 꼬치라고 해요? 야채라 하지 않나? 둘 다 같은 말이지만” 단은 현의 낯선 단어 사용에 반문했다.

“채소가 좀 더 듣기 좋지 않아요? 야채 꼬치던 채소 꼬치던 의미는 같으니까요, 나만 그런가.”

“그런 것도 같네요, 지혜로운 현이 그렇게 말하니, 채소가 조금 더 귀엽고 좋게 들리네요”

“에, 오로빌 도착해서도 제 이름 갖고 놀리겠어요”

“놀리는 거 아닌데” 단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현은 그 말에 어떤 반응도 꺼내들지 못했다. 놀리는 게 아니라면 뭐냐고 꼬치꼬치 상세히 캐묻고 싶었지만 찰나의 망설임에 그 간단한 입을 벌리는 행위 조차 할 수 없었다.


남아있는 맥주를 들이켠 뒤 채소 꼬치에 손을 가져갔다. 단의 손이 꼬치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0.1초 찰나의 간격으로 현은 꼬치를 잡지 못했고 단의 손은 먹음직스러운 송이 꼬치를 잡고 있었다. 현의 손은 어정쩡한 포즈로 단의 손 위에 놓여있었고, 단과 현은 서로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 채 정지해 있었다.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한없이- 늘어난 영원 같은 순간을 수습하기 위해 현은 자연스럽(지 않)게 손과 시선을 옮기며 헐레벌떡 머릿속에 있는 ‘아무 말’을 꺼내들었다.

“그, 아까 읽고 있던 책은 뭐예요?” 현이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뒷수습이었다. 단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며 무슨 책? 하고 물었다.


마침 가게 주인은 오늘 하루 사정이 있어 문을 일찍 닫는다는 언질을 줬고, 단은 지인들과 근처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둘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자욱한 여운의 안갯속에서, 어딘가 축축이 젖은 듯한 상태로 어정쩡하게 헤어졌다. 현은 ‘잘 들어가고 다음에 멤버들과 보자’는 문자를 했으며 단은 한참 뒤에야 현이했던 질문에 답을 했다. ‘짜이집에서 읽고 있던 책 맞죠? 그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어요. 왠지 본 것 같이 내용은 얼추 알겠는데 디테일은 전혀 모르겠는 그런 책 있잖아요 특히 고전 중에. 그래서 읽는데 좋더라고요, 베르테르’


현은 헷갈렸다. ‘그 책이 좋은 거예요, 고전이 좋은 거예요, 아니면 베르테르라는 사람이 좋은 거예요? 베르테르는 좀 처절하지 않나’


'뭐, 셋 다? 처절할 정도로 한 사람한테 몸 던지는 사람 없잖아요 요즘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단의 답장은 어딘지 단호했다. 현은 마치 단에게 꾸지람을 받은 듯한 기분에 멋쩍게 이마를 긁적였지만 동시에 희망과 기대가 뒤섞인 알 수 없는 활력으로 마음이 부풀고 있는 걸 느꼈다. 괜스레 가로수에 하이파이브를 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알라딘에 접속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주문했다.


그 뒤, 오로빌을 향하는 날이 가까워 올 때까지 단과 현은 아주 정중한 방식으로 쓰여진 몹시 과장된 고전풍의 장난스러운 편지를 왕왕 주고받았다.


“오, 현! 당신의 편지가 농담이길 저는 바라고 있어요. 당신이 떠나버린다면 홀로 남겨진 이 길고 지루하며 남루한 생을 감내해 낼 용기가 제게는 도저히 없어요… 정 그래야 하시겠다면 하겐다즈의 초코 아이스크림 케이크만이라도…ㅋㅋㅋ"


“아, 단. 저는 아마도 이미 당신에게 제 세상을 완전히 정복당한 것 같군요. 당신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떠나갈 엄두 조차 낼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제 자신이란 걸 몹시 실감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당신과 마주한 지 고작 며칠이 흘렀을 뿐인데 그 사이 온 우주의 탄생과 소멸이 지나간 듯 했습니다. 몇 년이 훌쩍 지난 듯 무척 길었죠. 당신이 없는 지루하며 박복한 시간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해 걷고 또 걸었습니다만 의도치 않은 하겐다즈 매장을 발견해버렸고 불가피하게 당신의 생각에 닿을 수 밖에 없었죠. 제 삶에 불쑥 찾아와 미모, 기쁨, 행복, 우아를 제 것으로 삼고 제게는 우울, 혼돈, 비참, 비루 만을 허락한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전 당신에게 무엇 이어야 하겠습니까 …ㅋㅋㅋㅋㅋ”

이런 식이었다.


둘은 오로빌 모임 이외에도 곧잘 여름의 향기가 터질 듯한 경복궁 어귀를 산책 했으며, 공포 영화 한편과 로맨스가 가득한 영화 그리고 옹졸한 캐릭터가 나오는 치정 스릴러 영화를 봤고, 다소 전위적인 연극 두편을 봤다. 간헐적으로 한밤 중의 몽마르트 공원(서초구에 있는)을 산책했고, 공원의 토끼들에게 콩콩이와 불도저라는 이름을 붙여줬으며 단풍에 물든 공원 너머로 뜨는 해를 바라봤다. 국내에 출간된 오로빌에 관한 서적을 대부분 섭렵할 즈음, 어느덧 비행기 탑승 날짜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느새 길가의 가로수도 겨울 옷차림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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