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사원이 웬 말이냐고
하마터면 죽음을 맛볼 뻔했습니다.
굉장했죠, 아, 그러니까 죽을 뻔했다는 말이에요.
시작은 평범하고 지루한 보통의 하루와 비슷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3호선 출근객들 사이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 작년인가부터 새로 도입된 허리는 아프고 짐 올려둘 칸도 없는 정말이지 어떻게 봐도 아무런 장점을 느끼지 못하겠어 어딘지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 신식 중국산 요추만곡 파괴 좌석에 엉덩일 끼워 맞췄죠.
좌석 허리 라인에 곡선이란 찾아볼 수 없고 예의 파랗고 회색이던 보송보송한 재질이 아닌 플라스틱 따위를 대충 얹어놓은 그곳에 스스로의 둔부를 내려놓을 때마다 그 저급함과 자신의 삶이 동격인 듯 잔잔한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해괴망측한 좌석 말이죠.
뭐, 그렇잖아요.
대중교(라 쓰고 고라 읽죠) 통 출퇴근을 하는, 매일 엉덩이를 내려놓을 곳이 있기나 바랄 수 있는 현대 버전 노예 수송선에 매일 타고 있는 입장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두엽은 옷장에 고이 넣어놓고 뭔가를 느끼고 가치판단이나 사유를 할 정신은 소거한 채, 그저 마스크 올려 입을 여물고 열차에 순종해 실려가는 수밖에요. 이번 달도 밀린 카드값과 보험, 적금을 연명하게 해 줄 월급 통장을 채우기 위해서요.
어느 모로 보나 구형 모델에 비해 쓸모가 현격히 떨어지는 '신식' 3호선 열차가 경기도에서 서울로 접어들려던 순간이었습니다.
멋진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왜인지 '어디선가 인센스 향이 느껴지는 것 같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고,
그 가을의 색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카키색 트렌치를 걸친 사람은 마침 비어있던 제 옆 좌석에 몸을 구겨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6평 남짓한 공간 안에 온갖 인센스가 가득 들어차 있는 인센스 상점에 입장한 것 같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200제곱 미터 크기인 힌두 사원 전체가 통째로 제 옆자리로 와 내려앉은 것 같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그 절망적인 심정은 이루말할 수도 없었어요.
아침에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누룽지와 샐러드가 고작이었는데, 제 위장은 그 간단한 음식물조차 소화해내지 못했는지 속이 울렁거리고 미식거리기 시작했죠.
고작 역 하나를 지나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제 시간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는데,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지하철역 10개 이상이었어요.
점점 더 인센스 향에 잠식되며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 했는데, 인간의 신비로운 신체는 그 어떤 악취도 10분 이상 곁에 있다면 그에 적응해 크게 상관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이곤 하지요. 그런 일이 제 몸에도 일어났습니다. 세상 모든 신들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보다는 정밀한 몸을 생성해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려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이제 좀 살겠다 싶어 큰 호흡을 들이마셨어요.
스읍 하...
트렌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파우치를 꺼내더니, 비장한 눈빛으로 파우치의 지퍼를 열고 있었어요.
아, 화장하려나.
뭐,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사람이야 거의 매일 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죠. 앞머리에 색색깔 동글뱅이를 말고 있는 사람부터 화장하는 사람 - 아주 자주 목격합니다. 내후년 즈음엔 코털을 뽑는다거나 면도, 다리털 제모 따위를 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해요.
지하철은 원래부터 뭐든 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요.
'잇츠 토탈리 낫어 빅 딜'이죠.
그런데 오 이럱엔장!!
트렌치가 손을 90도 각도로 어쩐지 몹시 경건하게 들어 올릴 때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파운데이션을 들고 얼굴을 톡톡톡 두드릴 때마다 그의 소매가 다시금 조금 다른 인센스 향을 내뿜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눈빛으로 코너에 몰려 혼쭐나는 강아지 마냥 곁눈질로 그의 움직이는 손과 흔들리는 소매를 지켜봤습니다.
소매가 한번 흔들릴 때마다 그와 제 사이를 채우고 있는 공기들은 조수 간만의 차에 의해 밀려오는 파도처럼 제 방향으로 밀려오길 반복했습니다. 파도라기 보다, 제게 다가오는 것들은 쓰나미였달까요.
그는 파운데이션을 마치고 아이브로우를 마치고 소매를 열렬히 흔들어대며 거울을 수차례 본 후에 화룡점정으로 마스크를 내려 립을 바르고는 아 이제 화장은 끝났군, 하는 순간 다시 한번 소매를 치렁치렁 대며 거울을 들어 자신의 낯빛을 살폈습니다. 그러는 와중 자신의 거울에 비친 옆 자리 사람(나)의 경악으로 가득 찬 눈빛을 봤을까요. 봤다면 다시는 그런 인면수심 극악무도한 행각을 벌이는 일은.. 없겠지요?
완력이나 신체적 수행능력으로는 한없이 하찮은 인간을 세계 제1의 강자로 만들 수 있었던, 공감과 커뮤니케이션, 추론과 상상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말이지요. 다음엔 그러지 않을 거라 상상하고 믿어봅니다.
에이, 설마. 또 그러려고. 눈빛을 봤으면, 인간이라면!
아무튼, 그런 얘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요즘은 인센스 향 향수가 유행인가 봅니다.
인센스 향 좋아합니다.
..
힌두 사원 전체가 내 옆으로 이사 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요즘은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선'이 있는데, 그걸 침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지상정,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걸 침해하려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괜한 짓 했다가 자신의 인생이 귀찮아지고, 하마터면 고소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제는 모두가 모두를 조심해야만 하는 세계가 됐으니까요.
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많이들 교복을 입은 채 대로변에서 담배를 피웁니다.
어른들은 마치 방 안의 코끼리를 보지 못한 것처럼 그냥 지나칩니다. 뭘 어쩌겠나요, 학교 선생님들도 어찌하지 못하는데 말이죠. 괜히 훈계했다가 자기 체면만 구길게 불 보듯 뻔한데 말이죠.
개인의 freedom이 그만큼 존중받는, 지켜지는 사회가 된 것 같아 좋습니다.
헌데, 그 프리덤은 정말 프리덤일까요?
프리덤.. 정말 어렵군요. EBS 위대한 수업 슬라보예 지젝의 자유론 강의를 들었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인간의 선호와 자유는 각기 다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불시에 제 옆에 안착한 힌두사원의 진한 향기도 모두 그저 받아들이는 게 자유 시민 다운 태도일까요. 대중교통에 탑승할 거라면
향수는 최대 3번까지만 뿌리세욧!!
하는 제한을 꿈꾸는 저는, 이를테면 사회주의자인 걸까요...!!
수정 자본주의 얘기도 여기저기 계속해 나오고 있습니다만, 수정 자유주의는 또 어떨까요. 자유는 적절한 제한 안에서야 자유지만 분별없는 자유는 그저 해괴망측이 아닌가 말이지요.
그 분별은 어떤 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 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간다면 이제 좀 어려워지는데요, 넵 한번 생각만 해봤어요.
오해는 말아주세요. 저 좋아합니다,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