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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Aug 12. 2023

3. 소용돌이가 휩쓴 직후

_2057년 제주, <섬 탈출 게임> 현장


그래, 제주였다.

이화와 가까운 거리에서 생활했던, 본영이 신내림을 받았던.

도무지 갈 일이 없었던 한경면 끝자락이라 알아채지 못했을 뿐, 어쩐지 제주가 풍기는 아우라가 느껴지고 있었다.

단지 길가에 놓여있던 표지판이 모두 없어져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본이 잠시간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자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이화가 말했다.


"지미인, 잘 왔어. 이 경쟁, 잘 해보자." 이화는 예의 환한 미소로 본영에게 말했다.


 잘 왔다니. 잘이란 글자에 묻을 수 있는 함의가 얼마나 많은 줄 알고 하는 말일까.

이화가 떠나기 전, 강민이 보고 들었다는 괴현상과 짐승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본영이 미간을 약간 구기며 눈을 동그랗게 떠 이화를 바라봤다. 무구한, 그러나 혼란이 다분히 묻어있는 눈동자였다.


"너무 변했나 나? 궁금했어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이화는 본영이 얼마나 께름칙해 하며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 생글생글이었다.


물론 본영 또한 이화의 육성을 듣자마자 대번에 미소부터 퍼져 나왔으나 정확히 다음으로 따라온 감정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께름칙함이었다. 사실 께름찍함이라기 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살인 용의자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결코 좋아한 적은 없는 어머니였지만, 삶의 처음부터 함께한핏줄, 그것도 자신을 잉태해 준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이런 의혹과 적개심을 모두 차치하고도 대번에 반가움부터 꺼내드는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본영에게 이화의 빛나는 미소, 여리면서도 충분히 단단한 목소리는 본영의 삶에 존재하기나 했는지 알 수 없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이화를 만나는 매 순간은 제주의 바람을 맞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시에 불어오는 그 바람을 맞으면 잔잔하던 바다는 풍랑을 일으켰고, 노을이 불타 오듯 불그스름한 뜨거운 색으로 변하곤 했다.

그 오랜 의혹의 시간을 지나온 현재의 본영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난 바로 직후에 차갑고 단단한 마음의 셔터를 내려 경계 상태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어, 반가워 이화. 지금까지 태국에 있던 거야?" 하고 묻는 본영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그날 이후 떠돌았어 계속, 이곳저곳. 타일랜드에는 가지 못했어.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에 있었어."

본영은 최대한 건조하게 답했다. 아직 어떤 감정이 옳을지 결정하지 못했으므로, 보류.

"그랬구나, 우크라이나. 위험했겠다."

이화는 본영의 말을 듣고는 한참 동안 본영의 얼굴을 응시했다. 뚫어져라 보기보다는 얼굴 이곳저곳을 뜯어살피며 둘 사이에 만들어진 복잡한 기류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이화는 본영 쪽에 어떤 설명을 갈구하는 눈치였다.


해변의 고지대에 우뚝 솟아있던 둘의 머리 위로 다시 드론이 날아왔고,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박스를 떨어트린 뒤 다른 사람들 쪽에도 마구 내려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드론이 몇 대나 동원된 거야. 하긴, 국가에서 일으킨 짓이라면 드론 수천수백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었다.

드론이 내려놓은 상자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중, 이화가 먼저 상자를 열어젖혔다.

상자를 열던 중간, 이화는 잠시 멈칫했다.

이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본영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화의 어깨너머로 보이던 것은 단단해 보이는 검회색 개머리판이었으니까.


뒤를 돌아보는 이화의 손엔 M4A1 소총이 들려있었다.


"여러분은 지금 2인 1조 팀별로 주어진 무기를 적절히 사용해 생존해야 합니다. 무기는 무작위로 지급되었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무기 지급도, 팀 선정도 무작위로 정해졌으니 게임을 즐겨주십시오."

이화는 얼떨떨하게 총을 쥔 채로 뒤로 돌아섰다. 본영은 온몸에 얼음 같은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꼈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화는 능숙하게 탄창을 빼내어 총알을 확인하더니 총에 눌러 꽂고 잠금쇠를 잠그고는 말했다.

"총이 주어졌다고 꼭 총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


본영의 소름이 채 다 가시기도 전에 상황은 예상과 약간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본영은 꽉 쥐고 있던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왜 날 살려주는 거야?"


이화는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숨을 허, 뱉으며 미간을 구긴 채 본영에게 호소하듯 물었다.

"너, 왜 내가 널 죽일 거라 생각해?"


"그야, 네가 그렇게 떠나간 후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고, 마치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우리 형제가 하는 일은 그야말로 손 뻗치는 족족 다 좌절되었으니까."


"그게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야? 정말?"이라고 말하는 이화의 표정은 어이가 없다 못해 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절망과 충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날 밤, 난 자고 있었지만 강민이 형은 똑똑히 보고 들었다고 했어. 네가 있던 신당에서 살쾡이인지 무언가가 울부짖는 것 같은 토악질 소리가 났다고. 그리고 그날 밤 이후 넌 사라졌고. 네가 저주라도 걸고 떠나간 건 아닐까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영은 되려 자신이 상처 입은 양 말하는 이화에게 쏘아붙이듯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이화는 소총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꽈악 쥐며 기가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첫 총 소리가 울려퍼진 건 그때였다.

언덕 밑에 몰려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손도끼와 권총을 두고 다툼이 벌어졌었고, 권총을 먼저 차지한 쪽에 돌진하는 상대방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만 것이다. 돌진하던 사람은 얼굴에 정면으로 총을 맞았는데, 머리 총알이 무지막지한 파워와 회전력으로 두개골을 꿇고 지나며 뒷통수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놓았다. 말 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뒷통수가 터져나오다시피 하며 온 사방에 피가 튀어있었다. 주변의 바위와 사람들의 뺨엔 핏방울이 튀겨 묻어있었다.

모두가 얼이 빠져 정지해 있었다. 잠시간의 영원같은 순간이 지나고 모두가 모두를 경계하는 상황에 놓였다.

바로 눈 앞에 닥친 단 한번의 살인으로 모두가 잠재적 살인자였고 모두가 적이었다. 소총을 손에 쥔 사람은 이화가 유일했다. 모두 야구방망이 혹은 톱, 손도끼 그리고 기껏해야 리볼버 권총이었다.

이화는 공중에 소총을 발사하며 모두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물론 순순히 듣는 녀석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치만 소총을 면전에 가져갔을 때 총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이화는 지금껏 세계를 돌아다니며 익힌 다양하고 짧은 외국어를 이용해 자신은 더이상의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싶지 않다고 했다. 이 안에 얼마나 살게될지 모르지만 모두 함께 질서를 지키며 살았으면 한다고도 덧붙였다. 본영의 생각에 모두 함께 질서를 지키자는 것은 우스꽝스럽게 실패한 반장선거 공략 같으 느낌이었지만 일단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현재로써 가장 강력한 화기를 지닌 이화는 제1의 위험인물이었으니까.


본영은 여전히, 혹은 더 눈에 띄게 이화를 경계하고 있었고 이화는 소총을 쥔 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눈으로 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영은 그게 어떤 의미인 줄을 몰랐기에 한시가 급하게 주위를 돌려야 했다. 저 분노의 끝에는어떤 사단이 일어나있을 지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이화는 분명히 태국 출신이었지만 이제와서는 태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어떤 나라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녀에게선 모든 국가의 질감이 느껴졌고, 녹진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어느새 정체성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그 자체가 되어가는 중인 듯 했다.


본영은 어떻게든 이 심란한 상태에 빠져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의 소유자로 하여금 주의를 돌릴 수 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결국 생각의 결과물은 한심한 거 였지만.

"이화, 나 이제 지민 아니야. 알아? 본영이야."

"지민 어디가고? 왜? 지민 좋은데."

"이화. 너 지금 지민 좋은데 하면서 총 들고 있으니까 되게 이상하고 좀 무서워. 총구를 좀 내리던지 총을 내려놓는 게 어때."


이화는 생각치 못하고 있었던 듯, 그제야 표정을 풀며 총을 등 뒤로 밀착해 걸었다. 그러는 모습을 보며 본영은 오랜만에 이화와 마주한 채 웃고있었다. 그저 입꼬리 좀 올라가고 웃음을 지었을 뿐인데, 이미 서먹서먹했던 시간들이 탄산 거품 터져 사라지듯 없어지는 듯 했다.

그래, 이화는 이랬지. 나는 이랬지. 본영은 애써 무덤덤한 척 생각했다.


"너가 사라진 후에. 어머니가 내 이름은 본영이라고 하더라. 그때까지 모두가 지민이라고 불렀는데, 본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내가 이 섬을 지킬거라나 뭐라나 말도 안되는 말씀 하시더라고. 그런 걸로 지킬 수 있는 거 였으면 본인 생명 부터 지키셨어야지. 이제 난 신 같은 거 안 믿어. 믿고 싶지도 않고. 그딴거에 메달리는 삶이 불쌍해."


"지민, 본영. 그런 얘기 여기서 나간 다음에 하면 어때? 이런 무기. 신이 없으면 나가는 것 조차 불가능할거야."


본영과 이화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아래에서 깃발을 흔들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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