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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Aug 19. 2023

4. 가까이 하지 마

 언덕 아래 멀찍이 한 난민 소년이 산탄총을 들고 모두를 위협하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내지르며.

옷차림과 피부 색으로 보아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은 소년과 같은 문화권도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공유을 것은 이 낯선 땅에서 깨어난 후 몇번의 눈 맞춤과 아주 간단한 인사 따위 정도가 전부였을 것이다.


최초의 총알을 발사해 사람을 숨지게 했던 사람에게 소리치며 소년이 다가서고 있었다.

본영은 그 모습을 쩔쩔매며 바라보다 이화를 바라봤다. 때마침 이화 또한 본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안다는 듯 눈을 맞췄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총이 발사된 바에야, 가장 좋은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강력할 수 밖에 없겠지.

이화가 하늘에 소총을 난사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육지로 몰려드는 파도처럼 일제히 이화를 향했다.

떨림이 동반된 소리로 이화는 사방을 향해 짧게 외쳤다. Gun down! Gun down!

난민들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으나 끝까지 의심하며 총을 땅에 내려놓고도 손을 떼지 못한 채 이화를 바라봤다.

그러나 사방에 있는 모두를 시야에 둘 수 없었다.

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생전 총이라곤 만져본 적도 없는 자의 손에서 발사된 총알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갈 뿐이었다.


"We don't want a fight. I don't want anyone to die. We need to pull together and escape!

Мы не хотим драки. Больше никто не должен умирать. Мы должны объединить усилия и сбежать. ..."

이화는 영어와 러시아어, 스페인어, 스와힐리어 등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로 같은 메세지를 전했다.


"누구도 죽지 않아야해. 우린 탈출을 원하는거지 싸움을 원치 않아. 힘을 합쳐야해."

언덕 밑의 난민 몇몇은 조금 전에 죽음을 겪을 뻔 했던 사람 답게 삶에 대한 열망이 촉촉히 눈동자에 묻어났다.

그들은 '이스케이프'를 외치며 무기를 놓고 두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인 채 언덕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이 촉촉했던 건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자칫 운이 나빴다면 총에 맞을 뻔 했을 이화는 한껏 뭉쳐있던 긴장이 풀어지며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본영 또한 벌컥벌컥 뛰던 심장이 아직 채 가라앉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본영은 감탄과 충격이 뒤섞여 이화에게 물었다.

"이화, 총 쏘는 법은 어떻게 알았어?"

"많이 봤어, 우크라이나"


곧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화가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 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그곳은 22년 이후로 30년 넘게 전쟁이 이어져오고 있었고,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진 무법지대나 나름 없었다.

죽음이 아주 가까운 곳. 이화가 보내온 지난 날을 떠올리다보니 본영은 눈 앞이 까마득해지는 듯 했다. 고개를 들어 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하늘은 곧 비가 쏟아질 듯 검회색을 띄었다.

먹이를 찾는 까마귀 같은 드론은 쉴 새 없이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 - 육지, 서울


"대표님, 오전 회의에서 말씀하신 원목 체어 제작 계획서 가져왔습니다. 대표님?"


"아아, 혜원씨 미안해요 잠깐-" 직원이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온지 조차 한참만에 알아챈 대표는 짐짓 놀라며 말을 흐렸다.


"대표님도 저거 보고 계셨네요. 기분 되게 이상하지 않아요? 살아보겠다고 우리나라 찾아온 사람들 데리고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라니, K 방송 진짜.." 혜원은 진저리 쳐진다는 듯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말 끝을 흐렸다.

대표는 자신도 백번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이 인상을 약간 구기며 미소지은 뒤 직원이 가지고 온 서류를 살펴보았다.


"좋아요, 이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겠어요. K 방송 염려는 내려놓고 계획서대로 수고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런데 그 방송에 대표님이랑 완전 닮은 사람 나오는 거 보셨어요? 직원들이랑 다들 대표님인줄" 혜원은 숨은 그림 찾기 게임에서 숨은 것을 발견한 사람마냥 자랑스레 웃음지으며 말했다.

대표는 웃지 않았다.


"그런가요. 많이 닮긴 했더라고요."  대표는 뭔가 말을 이어가려는 듯 했으나 곧 전화가 우악스레 울려 대화는 중단됐다. 혜원은 대표를 유심히 바라보다 작게 목례한 뒤 자리를 떠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네, 굿 퍼니쳐 대표 구," 기껏 받은 전화에서는 ARS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민법 개정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의 전화였다. 아직까지도 ARS를 사용하다니 지나치게 게으른 것 아닌가, 혹은 멍청하거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몸을 던져넣고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방송 화면에서는 오랜 경계와 접전 끝에 난민들이 서로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쇼가 어느 지점에 다다를 때 마다 사뭇 비장하며 경쾌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곤 하는 MC의 재간이 펼쳐졌다. MC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지 불쾌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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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랜 시간 기다려주신 동서남북 전 세계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전 이 쇼의 기획자이자 MC를 맡은 쎄이 입니다. 기나긴 준비 끝에 드디어 금일! 시작된 2057 섬탈출게임! 첫번째 선물, 보급품이 부여됐고요, 벌써 첫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우린 힘을 합쳐서 탈출해야돼!' 라고 말하던 난민, 이화의 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난민들은 협력해 미션을 완수할 수 있을까요?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 됩니다! 현재는 잠시간의 소강 상태가 찾아온 우리 섬 사람들. 아무 관여 없이 지켜만 본다면 이 방송의 이름이 <섬 탈출 게임>일 리는 없겠죠. 우리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그 타이밍이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함께 생활하게 될지도 모를 이웃이 될 누군가를 찾아내기 위한 미션! 화면에 떠있는 세가지 미션 중, 적합하다 생각하는 미션을 골라주세요.

가장 많은 시청자가 고른 미션이 섬 난민들에게 부여됩니다!"


경박스런 MC의 멘트가 끝난 뒤, 화면에는 몇가지 선택지가 띄워졌다.


1. 사냥

2. 뗏목 제작

3. 안식처 탐색


네, 이 섬에서 생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일 미션들이 첫 미션으로 마련되었는데요! 과연 전세계 시청자 여러분 께서는 어떤 미션을 골라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중간 앞으로도 지급될 선물/보급 아이템 선택 기회, 미션 선택 기회가 있으니 여러분의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자, 많은 분들이 투표를 해주고 계십니다. 생방송으로 방송 중이기 때문에, 남은 투표 시간은 앞으로 60초 입니다!


MC는 섬에 있는 난민들의 생존이 마치 게임 캐릭터의 일인 양 혐오스러울 정도의 경박스러움으로 일관했다.


자, 투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떤 미션이 뽑혔을까요!! 오, 사, 삼, 이, 광고 후에 발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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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는 천고가 높은 통유리 창 앞으로 나아가 비가 쏟아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이거, 막대로 이렇게 머리 쓰다듬으면 두꺼비 소리 내. 집에 그리울 때 해야돼."

이화는 집에서부터 가져온 두꺼비 목탁을 긁으며 강민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강민은 어른같이만 행동하던 이화의 연약한 모습을 본 듯 했다.

강민은 이화의 투명한 밝은 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슬퍼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이화와 장난을 치던 지민은 두꺼비 목탁을 높은 곳에서 떨어트렸고 두꺼비는 모양이 뒤틀렸으며 더이상 두꺼비 같은 목탁 소리도 나지 않게 됐다.

그토록 고고하게 당돌하던, 어른 같던 이화가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우는 걸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고, 강민은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한 스쿱 떠서 땅바닥에 내동댕이 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것저것 만들기를 좋아하던 강민은 다음날 이화에게 원래의 두꺼비와 비슷하게 생긴 자그마한 개구리 모양의 목탁을 건넸다.

두꺼비 만큼 몸통이 크지 않아 목탁 소리의 울림은 덜했지만, 이화에겐 다시 생기가 돌아온 듯 했다.

그때 부터 강민과 이화는 함께 마당 청소를 하기도 하고, 무서운 어머니 무당 구윤회씨를 피해 숲으로 나돌기도 했다.

어머니 무당 구윤회는 언제나 둘을 멀찍이 떨어트려놓곤 했다.

작두 날 세우는 칼 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강민에게 호통치곤 했다.


'너,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는 없어도 같이 다니고 가까이 하진 마.! 서로 끝이 안좋으니까. 떨어져!'

태어나서 부터 절대적이었던 어머니의 말에 따라야 할 것 같은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바다로 나가려는 썰물의 힘 처럼 강력한 반작용으로 이화와 가까워지고만 싶었다.


구 대표는 창밖을 바라보다 유리창 바로 앞에 다가가 머리를 유리창에 가져다 대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머니, 내가 그때 어머니 그 말을..." 강민은 다시 한번 유리창에 머리를 가져갔다. 이번엔 조금 더 큰 소리가 나도록.


영상에선 다시 섬의 전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예의 경박스런 MC 쎄이는 다시 시청자의 이목을 끈 뒤 시청자가 고른 미션을 발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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