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들 모두는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비를 뒤집어쓰며 식량으로 삼을만한 것을 찾아헤메었고
어느덧 난민들을 비추던 해도 사그라들어 완연한 어둠이 내렸다.
식량을 구하라는 미션이라니, 미션 따위 없었어도 모두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었을 거다. 문제는 미션이 공개되며 따라붙었던 기한이었다.
'내일 해가 밝기 전 까지'
여름이어서 해가 일찍 떠오른다는 것을 감안하면 5시.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10시간이 채 안됐다.
10시간 안에 식량을 구한다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제주엔 갖가지 풀이 많았지만 환경오염으로 인한 독초 또한 무성했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지만 바다에 살고 있던 물고기들은 수온이 급격히 상승하며 사라졌다. 한 생물 종이 사라지는 건 한 종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도미노식 파멸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이 벌려놓은 일이 그대로 스스로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은, 자연과 가까이 생활해 자연을 두려워하고 아끼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큰 피해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인류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상황을 조성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고 포근한 보금자리에서였고 그들이 만든 상황 속에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참담한 환경에 놓였다.
지금의 난민들 처럼. 이들은 이산화탄소를 미친듯 발생시키는 일도 하지 않았으며, 문명의 이기를 거의 누리지 못한 자들이었다. 문명을 마음껏 향유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이런 신세를 경험해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해수면이 12m 상승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으로 무형의 물질로 지은 공고한 성을 만들어 똘똘 뭉친 그들을 벌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신이라면 모를까.
나무 밑둥을 베고 누워 새우잠에 들어있는 이화의 숨소리를 들으며 본영은 불현듯 황당무계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걸까, 신이라면 모를까. 신이라면 모를까.'
"이화의 신력과 네게 있는 신력이 상생해 힘을 모은다면 필시 너희 둘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될 거다"
신력 따위 원치도 않았거니와 뭘 하던 신 신 거리는 집안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던 본영, 그러니까 과거의 지민에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던 어머니의 말이 유독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구윤회씨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있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아닐 거다. 이미 과거가 된, 고인의 말이야 끼워붙이면 붙이는 대로 의미가 생기는 거니까.
먹을 것을 구할 길은 없었지만 그나마 비가 그쳤고 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모두 마취된 채 이 섬에서 깨어났지만 이화도 본영도 전날 밤을 꼬박 새운 것 같은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저기 총탄이 발사될 때 조차도 몸은 이미 반 이상 잠들어있을 정도였다. 마취 상태로 제주까지 걸어오기라도 한 모양이다 생각을 하다가 말도 안되는 상념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내저었다. 벌써 해가 뜨기 까지 5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본영은 이화를 깨우려 톡톡 건드렸다.
"이화, 이화야. 일어나야해. 좀 있을면 해가 뜰.."
접혀있던 로봇의 상체가 세워지듯 이화가, 이화의 상체가 올라왔다.
본영은 어딘지 께름찍하고 오싹한 광경에 미간이 경직되며 사뭇 심각해졌다.
역시 로봇처럼 일정한 속도의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린 이화가 본영을 마주봤다. 아직 칠흙같은 어둠 속이었고, 이화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전체적 실루엣만 보였기에 본영은 더욱 긴장했다.
이화가 작게 짐승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먹이를 앞전에 두고 가 닿지 못할 때 개나 늑대 같은 짐슴이 내는 소리였다. 일전에 쌍둥이 형 강민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대번에 스쳐지나갔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게 진짜 사실이란 걸 눈으로 확인하자 본영은 얼마간 쇼크를 받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물론 전혀 쇼크를 받지 않았다 해도 이 상황에 어떤 움직임을 취해야 할 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본영은 그저 보지 못한 듯, 듣지 못한 듯 이화의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정말 잡아먹기라도 하겠어.'
이화는, 아니 이화의 몸에 들어있는 그 무엇은 다시 몸을 숙이지 않고 상체만 일으킨 채 이제는 짐승 소리가 아닌 사람의 언어로 중얼중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건 어떤 언어인 지 가늠도 어려운 소리였지만 간혹 태국어의 억양이 섞이는 것으로 보아 이화가 태어난 나라인 태국 말일 것이었다.
이화는 마치 잠자고 있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 처럼 중얼거리며 일정한 리듬의 무언가를 암송하고 있었다. 썩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히 이화는 중얼거리는 정도로 소리내고 있는데, 소리가 반복되면 반복 될 수록 본영의 머릿속에서 거대해졌다. 머릿속에 가득 찬 소리로 인해 두통을 참을 수 없을 때 즈음, 이화는 본영의 손목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이화는 본영의 손목을 물려는 듯 입으로 가져갔으나, 퍼뜩 정신이 든 본영이 손목을 홱 잡아챘고, 이화의 얼굴에 손가락이 부딛혀 이화는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자신을 잡아 누르고 있던 무언가로 부터 빠져나오려는 듯 했다.
"이화! 이화야 너 뭐야 왜그래, 괜찮아?"
본영은 헐레벌떡 몸을 일으키며 이화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당혹스런 상황에 본영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용히.. 목소리 작게. 꿈을 꿨어. 이 섬에 이제 먹을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런데 그게 맞는 것 같아. 동물 한마리 없었잖아. 풀은 거의 독초고. 미션이 원하는 건 결국 사람끼리 사람을 먹는 장면이었어. 그런데 이 섬에서 힘으로 제일 약한 사람은 나일거고, 아까 평화롭게 게임하자면서 총 버렸잖아. 이제 다들 나를 노리겠지. "
감자나 고구마, 칡 뿌리라면 모를까 지금의 제주에 포획할 만한 생명체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본영은 삽시간에 심각한 표정이 됐다.
"생각일 뿐이야 이화. 꿈이잖아. 사실이 아닐 수 있어. 꿈은 가끔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 보여주잖아"
"틀린 적 없어. 내 꿈, 현실이 돼. 항상 그랬어."
시선을 골똘히 내리깔고 말하는 이화의 말을 듣던 본영은 고개를 도리질 하더니 확신을 건네려는 듯 이화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화. 넌 희생양이 될 리가 없어. 우린 그런 목적으로 여기에 오게 된 게 아니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함께 공부할 때, 우리 어머니 구윤회 씨는 항상 내게 이렇게 말했어. 각각의 신령이 깃든 너희 둘이 힘을 모으면 상상도 못한 일들도 가능할 거라고. 그 때는 콧방귀 꼈지만 지금은 알아, 믿어. 느껴져. 우리 둘, 그리고 우리 모두 살아서 이 섬을 나갈거야."
이화는 자못 감명받은 듯한 표정으로 본영을 응시하다 물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위해서 여기로 모인걸까."
본영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슴푸레 그 답을 느끼고 있는 듯도 했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동틀녘의 파아랗게 희붐한 하늘이 되었다.
비에 흠뻑 젖은 옷은 체온에 의해 어느 정도 말랐지만 여전히 차갑고 눅눅했다.
이화의 꿈에 나온 것 대로 앞으로 일어날 상황이 펼쳐진다며느 서로를 잘 지켜주고 보필해야했다.
집에서 나온 후 주술적이거나 제의적인 의식은 전혀 하지 않아 감각을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그간 이화가 전 세계를 떠돌며 무엇을 했을 지는 분명히 짐작이 됐다. 마지막 도시가 우크라이나 였다는 점에서 확실하다 시피 했고, 이화가 제의 올리는 과정을 참고한다면 분명 둘은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모두가 가지고 있던 위협적인 장거리용 무기들은 바다에 던져버렸으니 더더욱.
짙은 파란색으로 밝아오는 아침 하늘 아래 알 수 없는 긴장이 맴도는 고요가 펼쳐졌다.
물론 누구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겠지만, 정말로 그들이 목표물을 이화로 조정했을 지 인간에 대한 한줄기 믿음과 불신이 같은 힘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배가 등골에 달라 붙었을 때, 게다가 식량을 구해야 미션을 통과한다는 엄격한 제한까지 따라붙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 할 것인가.. 동족이라는 개념이 어디까지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지도 내심 궁금해졌다. 물론 오십대 오십에 가까운 추측이었지만, 단 1프로의 차이가 어느 쪽에서 발생할까.
새벽 닭도 울지 않는 고요한 푸른 하늘 아래, 이화와 본영의 숨죽인 호흡 소리만이 나직하고 은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